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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선 자본주의 - 미국식 자유자본주의, 중국식 국가자본주의 누가 승리할까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정승욱 옮김, 김기정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경제학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자본주의의 승리와 영원한 성공을 "역사의 종언"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내부로부터 점점 커지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고 중국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에 기초한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항상 결함이 있었고 특히 오늘날에는 부정확해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은 새로운 세계 질서, 즉 홀로 남은 자본주의와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영향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두 가지 주요한 변종, 즉 자유주의적 성과주의 자본주의와 정치적 자본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모두 인류의 삶에 지대한 변화와 성과를 가져왔음은 분명하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인 성과주의 자본주의의 혜택으로 자유, 성장, 그리고 인권 의식을 말하게 되었고 중국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자본주의는 극적인 경제 성장률과 빈곤 감소로 이어졌다.
그러나 저자가 잘 설명하듯 자본주의의 각 유형에는 미래의 성공을 제한할 수 있는 고유한 내부적 모순이 있다. 자유주의적인 성과주의 자본주의는 높은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 권력을 이용해 특권이 보장되는 상류층 엘리트들을 생산한다. 이 때문에 성과주의 자본주의는 성과에도 미흡하고 민주주의도 덜 성숙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처럼 국가가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정치 자본주의는 시스템이 의존하는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 숙련된 행정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자본주의는 반드시 부패를 조장하는데, 이는 효과적인 행정과 성장을 저해할 수 있고 따라서 체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이 책은 자본주의 각 유형의 도전과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함의를 논할 때도 상당히 흥미롭다. 어떤 시스템이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예측을 하지 않지만, 몇 가지 잠재적인 결과를 제공한다.
저자는 엘리트 포획의 잠재력을 지닌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마도 성취욕에 불타는 소수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는 바랄 사람이 거의 없는 미래형 정치 자본주의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중산층을 우대하는 세금 정책, 견실한 공교육, 더 큰 자본 소유,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시민권 빛"을 통해 궁극적으로 미래는 국민 자본주의 또는 평등주의 자본주의, 즉 능력주의적 자본주의의 산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저자는 두 가지 획기적인 변화를 직설적으로 정의한다. 첫째, 처음으로 세계는 하나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인 자본주의에 따라 지배되며 둘째, 서양의 산업화 국가들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경제력 격차가 재조정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시기의 대표주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와는 달리, 저자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를 목적론적인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과 위기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우선 저자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이념인 서구식 '자유주의적 성과주의 자본주의'와 주로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국가 주도의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자본주의' 사이에 큰 분열이 있음을 전제로 이 두 자본주의 체제의 장단점을 살펴본다. 자유민주주의에 자본주의를 덧입힌 서구식 자본주의에는 여러 장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로서 사회적 이동성과 역동적 혁신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민주주의 정부를 침탈하고 세계화 시대를 빌미로 축적된 막대한 재산으로 법치를 타락시키는 과두정치의 출현으로 위협받고 있다.
19세기 고전 자본주의와 20세기 사회 민주적 자본주의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요인들이 자본의 집적으로 훼손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자유주의적 성과주의 자본주의'하에서 공교육 제도의 훼손은 물론 특히 상속세 같은 세금의 재분배 작동 기제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부와 양질의 교육은 점차 선택적 소수를 위한 유일한 영역으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계층 간의 고립은 결혼 방식에도 반영된다. 마땅한 결혼 상대를 귀족 계층에서 찾던 대신 이제는 부와 소득을 기준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사회 양극화를 완전히 수용하여 일말의 책임감조차 느끼지 않는 이 엘리트 계층은 잘 식별되지도 않을뿐더러, 각 정치계급이 이익을 추구하도록 자금을 대어줌으로써 민주주의를 공허한 의식절차로 위축시키고 있다.
자유주의적 성과주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자본주의 총아인 정치 자본주의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서 현실로 나타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로, 정치 엘리트들에게 시민이나 부자들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한다. 이는 경제와 사회를 지휘할 최고의 인재들을 매우 효율적 기술적으로 능숙한 관료로 만들어 준다. 여기에 당이 정책을 펼칠 때 자신과 지지자들에 관한 법을 임의로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당이 제도를 더 발전시키고 선택된 수혜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법치가 실종된다. 이로써 중국은 경이적인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 왔으며, 세계적 불평등의 증가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인구의 95% 이상을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 숫자 뒤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중국 내부의 불평등은 서구의 그것보다 훨씬 더 극악하다. 공공부문보다 훨씬 규모가 큰 민간부문의 부유한 엘리트들은 직접적으로 정치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그들의 이익은 국가에 의해 잘 보장되고 있다. 당과 관료제 등 체제 전체가 부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약점인데, 중국 곳곳이 부패로 만연해 있다. 이는 1989년 천안문 광장 봉기 진압 이후 중국이 사회 평화적 토대가 되어온 고성장을 이룩함으로써 당과 관료주의가 체제를 진전시키는 데 필요한 올바른 정책 결정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또 다른 위험은 정치 엘리트에 의한 법치주의의 선택적 적용이다. 이것이 얼마나 잠재적으로 폭발적일 수 있는지는 지난 몇 달 동안 홍콩에서 목격되었다. 그것은 끔찍하게 잘못된 결정이며 중국 정부는 인민군 파견 부족으로 여전히 홍콩에서 정치적 평형 회복 수단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언급하는 두 가지 요점은, 중국의 경제적 번영이 세계화에 의해 가능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세계화가 아직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이미 중국 경제를 긴장시키고 있다. 게다가 자본가들은 생산물 시장이 얼마나 쉽게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국외 자본은 중국 내수시장으로부터 쉽게 발을 뺄 수 있는 데다 중국 이외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수입국이 다변화되고 있는데, 이를 진행하는 미국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독려를 받고 있다. 둘째, 자본주의는 위기를 낳는다. 중국은 경제적 상승 이후 국내 경제 위기를 겪은 적이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닥쳐올 일이다.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중국의 정치 자본주의가 얼마나 건실한가를 보여주는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책은 지난 2세기 동안의 경제와 사회사에 대한 큰 그림을 제공함으로써 의심의 여지 없이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경제와 사회를 조직하는 체계로서 자본주의가 승리한 후 경쟁자가 없으며 다른 어떤 시스템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더 많은 번영을 제공한다. 그러나 저자는 몇 가지 경쟁적인 자본주의를 구분한다. 그는 미국이 구현한 자유주의적 성과주의 자본주의와 중국이 구현한 정치적(권위주의)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변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훌륭한 관료들을 자랑하지만, 법치가 없는 후자는 부패라는 치명적인 내부결함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자본주의처럼 공산주의가 산업화한 중산층을 개발하지 않고 봉건주의에서 벗어나 근대세계로 발전시켰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산업 근로자들의 높은 생활 수준, 즉 노동조합, 대중교육, 그리고 누진적 세금과 이윤을 생산하는 데 도움을 준 요인들은 최근 몇십 년 동안 대폭 줄어들었다. 저자는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자본을 소유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그리 치우치지 않는 이른바 '대중 자본주의'로 정의되는 미래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더 평등한 자본주의가 출현할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자본가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경제체제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저자는 봉건주의 시대 이후, 그리고 공산주의 시대 이후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고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기준인 지금 더 공정한 세계에 대한 전망은 어떠한가?’ 그의 결론은 냉정하지만 숙명론적이지는 않다. 자본주의는 틀려먹은 것도 많지만 좋은 점도 많다. 게다가 곧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우리의 과제는 개선점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나름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승자의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물질적 번영을 이룩하고 자율성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물질적인 성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인정하도록 우리를 몰아붙이는 도덕적 희생을 동반하는 데다 안정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서구에서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불평등과 자본주의적 과잉이라는 변종 아래 삐걱거린다. 그 모델은 이제 정치적 자본주의로 비중을 다투는데, 중국은 효율적이지만 부패에 더 취약하고 성장이 더디면 사회불안에 더 취약하다고 주장한다. 미래를 내다보며, 저자는 전 지구적 번영이든 로봇에 의한 대량 실업이든, 어떤 단 하나의 결과가 불가피하다고 선언하는 예언자들을 무시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위험한 체제인 동시에 인간의 체제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로부터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는지는 우리가 어떤 체제를 선택하고 얼마나 명확하게 살펴보는가에 따라 판가름 될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현주소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흥미롭고 중요한 읽을거리다. 이미 소멸해버린 공산주의의 망령으로 우리 사회를 빨간 색깔 입히기에 열심인 분들을 비롯하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일독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