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과 제주역사 - 4.3길찾기 6
박찬식 지음 / 각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927년 후반부터 제주청년연합회의 중심 인물들은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제주도 야체이카를 구성하여 갔다. 제주청년연합회의 실질적 주도자인 송종헌은 1927년 7월에 광주에 가서 전남도당의 책임자인 강석봉으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고 정식 입당하였다. 이어서 그는 1927년 7월 25, 6일 광주의 광양여관에서 개최되었던 전남도당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전국대회 출석 대의원으로 서태석을 뽑고 후보로 송종현을 선정하였다. (-53-)

제주도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은 이 시기에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하여(1931년 5월 16일), 곧바로 위의 테제에 대한 비판회를 가졌다. 당시 야체이카의 구성원은 대체로 제주청년동매의 간부들로서,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신인회와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칸의 구성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에 기반을 둔 운동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일람표를 통해서도 재건 야체이카사건에 관련된 자들 가운데 사건 이전 도일 경력이 있는 자는 김태안(79, 김태륜(48)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32-)

한편 1948년 1월 22일 조천면 신촌리에서 열린 제주도당 지도부와 비밀회의가 경찰에 적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1월 중순 신촌리 출신 남로당 조직부 연락과장 김생민을 체포한 뒤 그로부터 주요 정보를 확인한 뒤 남로당 조직부 아지트가 있던 신촌리를 급습하였다. 당시 조직부장은 김달삼인데, 1948년 초에 아지트를 신촌리 민가에 두고 있었다. 미국 정보보고서에는 모임에 참석했던 남로당 간부를 비롯한 221명이 검거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238-)

1949년 목포 형무소 탈옥사건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4.3사건, 여순사건,숙군으로 이어지는 이승만 정권의 폭력적 반공국가 수립 과정에서 빚어진 연속적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1년 뒤 같은 처소에 대한 일괄 '숙청'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의 결과는 아니라고 본다. (-367-)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에는 4.3 사건이 아직도 종료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제주도는 전쟁 이전부터 극단적인 공포와 굶주림, 격분, 좌절, 체념 등의 집단적 일상성과 정서가 사회의 인간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은 아니었지만 , 주민들은 4.3의 '내전'에 이어서 연속된 전쟁을 겪었다. 예비검속과 형무소 재소자 학살(죽음의 일상화), 잔여 유격대 토벌과 방위 조직 동원(내전의 연속과 동워늬 일상화), 피난민의 입도에 따른 식량난의 가중(배고품의 일상화),피난민(외래밍)과의 갈등(갈등의 일상화),레드콤플렉스 극복을 위한 참전 등 작은 전댕을 섬 내부에서 벌이고 있었다. (-430-)

4.3 특별법의 규정에 따라 4.3 위원회는 2003년 10월 15일 4.3의 진상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보고서를 확정했다.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진상조사보고서에 근거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실을 정부가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 을"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도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였다. (-516-)

1946년 12월 자유신문은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는 것에 관해 보수진영에서는 당국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도민의 태반은 人委(인위) 를 위시하여 도로 승격한 것을 아직도 반대하고 있다"라고 전하며,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첫째로 본토와 고립됨으로써 식량 등 물자교류가 힘들 것, 둘째 모든 행정구역의 개편은 미군정이 아닌 민족의 뜻에 의해 수립될 우리 정부에 맡기고 싶어하는 것, 셋째 도 승격 이후 기구가 확대되어 세금이 늘고 2백명읻던 경관이 곱으로 느는 것, 넷째 제주도의 군사기지화에 대한 우려 등이었다. (-622-)

제주섬의 문화 정체성의 변화과정을 제주 역사의 정치적 요인, 특히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제주인들은 고대 탐라국의 독립 경험에서 부터 비롯된 자율성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주인의 자립적,자강적 정체성으로 지속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고려와 조선과 같은 중앙정치 체제의 강력한 구심력에 이끌리면서 중앙에 대한 순응과 더불어 반발하는 사례도 빈발하였다. 중앙의 대리자인 지방관의 수탈 속에서도 순응의 정체성은 '조냥'과 '수눌음'으로 표출되었고, 반발의 정체성은 민란으로 표출되는 저항정신, 저항을 초월한 別國(별국) 의식으로 승화되었다. (-731-)

2003년 노부현 정권 당시, 4.3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2만 ~3만에 달하는 제주도민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과거사 정리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 6명이 경찰에 의해 죽어 나갔으며, 제주도가 공산당(남로당 제주도당 세력) ,국가 전복을 원하는 북한사회주의 세력이 제주도 땅에서, 한라산 인근을 둘러싸며, 경찰과 관군에 대항햇다. 우리는 1948년 4.3 에 대해서, 4.3 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4.3 사건은 폭동, 반란, 항쟁, 봉기, 양민학살로 다르게 불리고 있으며,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난 이후 4.3 사건 으로 통일 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1978년에 발표한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이 널리 알려진 이후의 변화였다. 여기에 최근 작품 으로 세권으로 된 『제주도 우다』나 나왔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다시는 4.3 사건의 비극이 재현되면 안 된다느 경종을 울리고 있다.제주도 4.3 사건은 공식적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였으며, 6.25 전쟁 기간에도 이어졌다.

30만 인구 제주도 도민이 제주도에 삶의 터전을 만들고 있었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섰으며, 1948년 4월 3일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져 제헌국회가 구성되기 직전이었다.이승만 정권이 남한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였던 북한과 김일성 정권은 제주도 땅에 제주도 사회주의 계열의 남로당 제주도당 세력 운동가들을 투입하였으며,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책에는 1920~1932 년 사이에 , 제주도 사회운동 주도 세력이 표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조천만세시위운동(1919) , 제주노동회(1923), 제주청년회(1924), 신인회(1925),함덕 협성청년회 노동야학(1925), 제주청년연합회(1926), 제주소년연맹(1926), 조선공산당야체이카(1927), 한수풀소년단(1927), 천황모독 기사투고사건(1928), 화북청년회 학생처벌 항의사건(1929), 제주 무정부주의결사<우리계> (1929), 조천 노동 야학 사건(1930) ,성산포 격문사건(1930),신창독서회 주도(1930), 혁우동맹(1930) 재건 야체이카(1931), 연평리 비밀결사<적> (1931), 제주 청년동맹원 사건 (1931), 종달리 농민회 (1931)화북청년동맹원 혁명가 제창사건(1931), 함덕 비석사건1931),구좌해녀 투쟁(1932), 강창보 탈출 방조사건 (1932) ,조천연설사건(1932), 제주도 적색농조 창립준비위원회(1933),함덕리 독서회(1934), 신좌소비조합 상무이사(1938), 조천소비조합사검(1939) 등이 있었으며, 1945년까지 사회운동이 이어졌으며, 제주도 4.,3 사건이 발생할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6.25 전쟁으로 인해 제주도로 피난온 3만 인구가 제주도 땅에 살게 되면서, 극심한 공포와 혼란은 가중된다.

이 책을 읽으면 , 북한 사회주의가 제주도에 물들어가는 과정 속에서,제주도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 다시 우리가 보여주었던 역사적 사실이 정리되어 있으며, 대만에 2.28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통치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저자는 4.3 사건을 6.25 전쟁의 축도(縮圖) 로 보고 있으며, ,10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또한 ,4.3 사건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즉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 아닌 , 대한민국에서,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느끼게 해준 것과 동시에, 70 년 내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야만 , 국가 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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