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4일
조성기 지음 / 한길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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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주는 1980년 3월 6일 공교롭게도 내 생일날 수형번호가 붙은 군복을 입은 채 세 명의 사형수와 함께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야산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30-)

1975년 3월 박근혜는 직접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만났다. 일설에 따르면 최태민이 육영수 혼에 빙의되어 평소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현해 보여 박근혜를 압도해버렸다고 했다. 영혼합일설 교리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최태민은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했다. 5월에는 2,000여 명이 모여 임진각에서 '구국기도회'를 열었는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최태민이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78-)

고향도 경북 영주군이라 동향인과 같은 친밀감을 느꼈다. 둘 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진해로 내려와 같은 관사를 사용하고 있는 처지라 거의 매일 조석으로 만나 담소를 나누고 식사와 술을 함께했다.

한번은 김계원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부탁했다.

"육군대학 비품들이 많이부족하네.부총장이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장군과 친하다고 하니 부산 한번 다녀오게. 여기 사정 잘 이야기하여 필요한 비품들이 빠리 보급되도록 해주게." (-105-)

통일혁명단은 전위정당으로서 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철폐, 민중민주주의 혁명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 일소, 민족 재통일 성취 등을 당 강령으로 내걸고 주체적인 정책들을 제시했다. 민주적 토지개혁, 주요산업의 국유화, 민주적 노동법 실시, 여성의 권익보장, 무료 교육제, 선진적 의료보험제, 무상치료제 들을 열거했다. (-163-)

"이 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 아래 전 국민이 굳게 뭉쳐 조국 근대화의 신념을 가지고 땀 흘려 일한 결정이며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값진 민족 자산으로 전국토의 4대 권역을 완전한 일일 생활권으로 품어 균형적인 발전을 기약하는 지름길이다. 1974년 11월 14일 김재규" (-227-)

김계원의 안색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박흥주는 최종 선고임을 의식했는지 더욱 긴장하고 덥수룩한 얼굴로 의젓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박선호는 올곧은 자세로 앞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기주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고 유성옥과 김태원도 바짝 굳어 있었다.

나를 비롯하여 사형 구형을 받은 8명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도 유석술은 2년이 감면되어 3년 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명은 약간 달라졌다. 나는 내란목적살인죄와 내란수괴 미수죄가 적용되었고 나머지 6명에게는 내란목적살인죄와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가 적용되었다. (-287-)

차지철이 말한 남민전 같은 용공단체가 배후에서 조종하는 시위가 아니라 자발적인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였다.

부산시위 사태가 벌어지기 일주일 전 구자춘 내무부장관은 지하당 성격의 예비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그 일당 74명 중 20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및 간첩 혐의로 검거하고 54명은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차지철은 수배 중인 남민전 일당이 부산으로 내려가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350-)

1980년 5월 18일 ,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며, 그 사이에 우리에게 잊혀진 날짜. 잊혀질 수 있는 역사, 1980년 5월 24일에 주목해 보고자 하였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1909.10.26)에 비견될 정도로 역사적 비중을 품고 있다.대한민국 근현대사는 1979년 10월 26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며, 1979년 10월 26일은 군부독재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나아가는 역사적 전환기였다.

역사는 누군가가 살아서 역사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 죽어서 역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197910.26과 1980.5.24 는 제4공화국이 종식되고,제 5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죽음으로 역사가 전환기가 되고, 권력이 바뀌고,나라의 체계가 달라진다. 40여 년전 일어난 두가지 사건, 그리고 두명의 죽음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역사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성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1980년 5월 24일 사형에 처해진 김재규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를 비움으로서, 청와대 관람을 하게 되었던 날,그곳에서, 심수봉 김재규가 있었으며, 박근혜,박정희, 정승화, 14대, 16대 국회의장을 맡았으며, 8선의원이었던 이만섭李萬燮 (1932 ~ 2015)이 있다.

소설 『1980년 5월 24일』 은 김재규의 총성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 소설에서, 박근혜 탄핵의 주역이었던,대한구국선교단 최태민이 나오고, 최태민의 딸 최순실,1970년대 박근혜가 20대 였던 당시를 상상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뒤에 숨겨진 1970년대 최태민이 저지른 다양한 종교적 행위 속에,박정희대통령의 어두운 흑역사다.

김재규는 1980년 죽었지만,대한민국은 민주화 운동이출발할 수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전두환 군부 세력이 들어서게 된다.전두환 이후 노태우가 집권함으로서,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화와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김재규가 쏜 총성은 군부 독재,유신 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었고, 민중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국민에 의한 나라, 정제적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세상, 불온서적 한 권 가지고 있으면 잡혀 가던 그 시절이 사라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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