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전서를 독함 창해 최익한의 다산 3부작 교주본 1
최익한 지음, 류현석 엮음 / 21세기문화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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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은 1897년 천석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까지는 유교적 보수성을 삶의 기반으로 하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러나 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스승 면우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하면서 식민지 지식인의 책무를 심절히 깨달은 듯하다. 곧바로 그가 독립군자금 모집을 감행하여 서대문 감옥에서 2년 넘게 징역을 살았기 때문이다. (p59)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1표 2서(《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면서 실학자이다. 특히 그는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18년간 그곳에서 성리학을 갈고닦게 된다. 최근 보았던 영화 [자산어보]는 주인공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쓴 한국 최초의 어류 생태서인 자산어보를 모티브로 하였다. 여기서 정약용은 조선시대의 사상가이며, 천주교 신자였다.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부터 서양의 과학·천문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으며, 그가 남긴 대표적인 저서 1표 2서는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여유당이 수몰되면서, 다산의 자료가 소실될 위험에 놓였다. 1934~1938년 신조선사에서 다산의 시문과 저서를 모아서 《여유당전서》를 4년에 걸쳐 편찬하였고, 2012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정본 여유당전서》를 출간하였다. 참고로, 최익한 선생은 1938년 12월 9일~1939년 6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64회에 걸쳐 '여유당전서 서평'을 연재하였다.



선생은 졸곡卒哭 후에 곧 고향으로 돌아가서 형제가 한자리에 모여 경전을 강론하고 노자 《도덕경》의

與兮若冬涉川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머뭇거리고

猶兮若畏四鄰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조심하라

는 구에서 취하여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하니 외약畏約의 뜻을 보인 것이다. (pp124~125)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는 신사임당·허난설헌처럼 특별한 의미가 있다. 노자의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여與와 유猶 자를 딴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다산의 파란만장한 삶의 원칙이 암시된 듯하다. 어쨌든 창해 최익한 선생의 저서가 남한과 북한에 다수 남아 있는데, 여러 방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영남 유림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선생이 태어난 해인 서기 1762년은 갈릴레이가 천문학의 명저 《대화》를 발표한 후 130년이요, 뉴턴이 광학과 만유인력을 발견한 후 96년이요, 제너가 우두술牛痘術을 발명하기 전 겨우 34년이었다. 당시 서양에서도 실증과학이 신학의 신비적 전통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지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었다. 더구나 신학의 잔당인 서양 선교사들은 멀리 동양에 와서 서양 과학의 지식을 한갓 포교의 향기로운 미끼로 약간 던져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나마 주워 먹으려고 선생 일파는 최대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다. (p266)

1934~38년에 여유당전서가 편찬되었다. 창해 최익한 선생은 다산 연구의 개척자로서 앞서 말한 대로 1938~39년에 최초의 다산학 개론서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6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물론 교주자 류현석은 최익한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3회에 걸쳐 필사하고 30회 가까이 읽은 후에 다산의 저서와 최익한의 연구 성과를 교정 주석하였다. 특히 『여유당전서를 독함』의 원문 한자를 하나하나 맞춰 나갔고, 문맥에 맞게 해결하는 치밀함과 완벽함으로 각주에 오류 및 오탈자를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덕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수정하였는가? 선생에게 덕은 물론 오묘히 내재한 성리性理가 아니라 윤리의 실천이며, 덕정德政은 바로 ‘위정이덕爲政以德(덕으로써 정치를 함)’이다.

공자는 “임금을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위정이덕’이다. (p342)

최익한 선생은 1897년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태어나 1909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개최된 시회詩會에 참가하여 장원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영남학파 거두였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가 어릴 적 잠시 들렀던 영주군에는 다산 정약용, 함석헌 선생이 추구하였던 민본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도 민실련(민본사상실천시민연합)이 현존하고 있으며, 선비정신의 본질과 애민사상을 이어나가려고 한다. 21세기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인성 교육은 애민사상과 민본에 있으며, 사람의 도리와 역할을 다하는 데 있다. 위정이덕, 즉 정치가 바로 설 때 민심이 따르고,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한다. 다산이 1표 2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학문의 요체이다. 그동안 내가 지역 향교 유림에서 《추구》, 《소학》, 《천자문》, 《논어》를 공부한 이유다. 내년에는 《맹자》의 사상을 배우련다.



최익한은 ML당 사건 이후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 포기하고, 동대문 밖에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추잡스런 ‘스캔들’을 일으킨 탈락분자라고 비난한 것이다. (p560)

1957년 9월~10월 중순: (최익한은) 최창익·박창옥朴昌玉 등이 주동한 ‘8월 종파 사건’(1956)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으로 보이며, 몰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p597)

최익한 선생은 군자금 사건과 ML당 사건으로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출옥하였다. 해방 이후 월북하였고, 김일성 대학에서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였다. 하지만 그의 책은 남북이 분단된 상태이니만큼 종합적으로 섭렵해야 한다. 지역 사회에서도 다산 연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남인 영남학파가 추구하였던 사상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해 최익한 선생은 전반부는 분단 전의 남한에 살았지만, 후반부는 북한에서 살았으므로 특별히 주목해야겠다. 창해 최익한의 다산 3부작 교주본 《여유당전서를 독함》, 《실학파와 정다산》, 《정다산선집》을 더 공부하여, 다산 정약용과 최익한 선생께서 이 땅에 남기고자 하였던 민본·애민사상의 본질을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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