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으로 본 한국 근대사
최덕수 외 지음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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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과 11일 2회에 걸친 회의에서 일본 측은, 양국간의 우의를 친밀히 해 다시 사이가 소원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조약을 맺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전문 13조로 된 「조일수호조규」 초안을 제출했다. 조선 측이 조약이 무엇이냐고 묻자, 일본 측은 두 나라가 국제 간의 〈통의(通義)〉에 의거해 항구를 개방하고 서로 무역을 하기 위한 약정이라고 설명했다. 조선 측은 조일 양국이 조약 없이도 300년 동안 서로 교역해 왔는데, 왜 지금 갑자기 조약이 필요한가라고 반문했고, 조선은 가난한 나라이고 백성들은 새 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양국 간의 무역이 확대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이며, 일본도 큰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조선도 잃는 바가 클 것이니 이전에 예에 따라 부산에서 교역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도 상호 교역을 하는 국가들 사이에 조약을 맺는 것이 국제적 관행이라 하면서 조약 체결을 고집했다. 조선 측은 조약 초안을 서울에 전달해 그 수락 여부를 10일 내에 회답하겠다고 했다. (-30-)

제 4관 조선에 거주하는 미국 인민이 본분을 지키고 법을 준수하면 그 생명과 재산은 조선의 지방관이 마땅히 대신 보호해 주고 조금이라도 속이고 모욕하거나 손해를 주고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만약 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이 장차 미국의 집과 재산을 겁탈하고 불태우거나 훼손시키려 하면 지방관은 한번 영사에게 통지하여 즉시 마땅히 군사를 파견해 탄압하는 동시에 범죄자를 조사해 체포하고 법률에 따라 무겁게 처리한다. (-82-)

제36관 아편은 입항을 엄금한다. 만약 장차 아편을 몰래 운반하거나 혹은 몰래 운반하기를 희망해 시도하면 장차 화물은 관청에서 몰수하고 그 몰래 운반한 총수에 따라 매 1근마다 7,000문의 벌금을 징수한다. 다만 그것이 조선 정부에서 쓸 것이나 혹은 거주하는 일본 인민이 약으로 만들기 위해 공급하는 것이라면 일본 영사관이 그 일을 증명하고 항구에 들어온 것은 이 한도에 있지 않다. (-146-)

독일은 조선과 1882년 6월에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그런데 독일은 이 조약의 비준을 사실상 거부하고, 이듬해 11월 26일(음력 10월 27일) 에 조선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왜 독일은 조약 비준을 거부했을까? 독일이 조선과 새롭게 체결한 조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독일이 새로운 조약을 체결한 그날,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또 다른 서구 열강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국가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231-)

1880년 이후 통리기무아문 설치, 군제 개편, 조사 시찰단 파견 등 조선 정부의 개화 정책이 구체화되면서 정부 내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정치적 기반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 정책은 1882년 임오군란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청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1883년 중반부터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친청적 집권파와의 대립 속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희망을 걸었던 일본 정부와의 차관 교섭도 실패로 돌아가자 개화파의 위기 의식은 커져만 갔고 정변을 구상하게 되었다. (-283-)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시종일관 열강의 동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문제는 청일 양국의 이해관계 뿐만 아니라 영국,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 또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9월 15일 (음력 8월 16일) 평양 전투와 18일 환해 해넌 이전까지 서구 열강은 최후의 승리가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영국이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국이 평앵전투 이후에도 계속 패전할 경우 러시아에 대한 견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영국의 대중무역도 크게 타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열국 공동 보증에 다른 한국의 독립 보장> 과 <청국의 일본에 대한 전비 배상>을 조건으로 공동 강화를 열국에 제안했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모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325-)

1896년 4월 1일 , 조선을 출발한 민영환은 긴 여정을 거쳐 5월 19일 러시아에 도착했다.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정부 주요 인사들을 여러 차례 만나 조선 국왕의 환궁 이후 신변 보호를 위한 왕실 수비병의 파견과 경비 지원,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상환하기 위한 300만 엔 차관 제공, 조선과 러시아 간의 전신선 가설을 요청했다. 또 재정 고문과 군사고문을 파견해 줄 것도 요청했다.하지만 국왕 고종과 정부 신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러시아 수도로 어려운 사행길을 떠났던 민영환이 다시 고된 여정을 거쳐 조선에 당도했을 때, 그가 러시아에서 얻어 온 것은 13명의 군사 교관과 조선의 요청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애매모호한 답변뿐이었다.

이처럼 러시아가 조선의 요구에 확답을 기피하고 군사 교관을 파견하는 선에서 조선의 요청을 마무리 지으려 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민영환이 대관식 참석을 위해 조선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14일, 한성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와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는 조선과 관련해 「베베르-고무라 각서」 를 체결했다. (-376-)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

러시아 국 외무대신 로마노프 로스토브스키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특명 전권대사 육군 대장 야마가타 후작은 조선국의 형세에 관해 그 의견을 교환하고 다음 조항들을 합의 결정한다. (-380-)

의화단 사건이 발생할 당시 열강들 가운데 러시아는 만주 지역에 있는 자국의 철도 및 이권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의화단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만주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러시아와 청국 간에는 러시아군의 철수에 관한 협상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내세운 무리한 철군 조건으로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즉 러시아는 만주의 정황이 다시 불안해질 경우 러시아군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과 만주의 영구적 점령을 청국 정부에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요구 조건에 대해 청국 정부는 물론 미국,영국, 독일 등 열강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러시아군의 즉각적 철군을 요구했다. (-453-)

러일 전쟁 발발 이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로젠 -니시 의정서」 를 통해 마련된 불안한 균형 위에 놓여 있었다. 청일 전쟁 이후 한반도를 놓고 벌어진 열강의 세력 경쟁이 또 한번의 전쟁으로 폭발한 것은 1904년이지만 ,러일 간의 갈등이 화해할 수 없는 수준이며 머지않아 전쟁으로 귀결될 것임은 일찌감치 감지되고 있었다. 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출병한 러시아는 <신노선>으로 알려진 강경 노선을 동아시아 정책으로 채택했고 일본 역시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보호국 화를 추진해 온 일본은 경의 철도 부설권을 한국 정부에 요구해, 이미 부설권을 확보한 경부철도와 연결해 한국 전역을 일본의 세력권 아래 두려 했다. (-565-)

이토는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의 폐위를 추진하고, 대한제국에 보다 강력한 지배를 행사하려 했다. 이토 통감은 밀사 파견 사실이 알려지자 헤이그 평화회의에 위원을 파견한 책임은 전적으로 고종에게 있으며, 이처럼 공공연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협약 위반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를 할 권리가 있음을 통보했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는 양위해야 한다며 고종을 압박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일본 국내 여론에도 상대한 파장을 가져왔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사이온지 내각과 이토 통감의 한국 경영의 실책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한국에 대한 강경 여론이 들끓었다. (-675-)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이토 통감이 외교와 내정을 포함한 국정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궈자가 된 이후 병합은 시간상의 문제일 뿐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동안 한국 병합을 유예하고 있었던 것은 의병들의 강력한 저항과 일본의 치밀한 외교적 계산 대문이었다. 당시 의병 투쟁은 지방 행정을 마비시킬 만큼 거세게 타올라 이를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 및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을 병합하는 것에 대해 완전한 승인을 얻지 못한 시점에서 병합이 가져올 여러가지 외교적 압력을 우려했기 때문에 섣불리 병합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732-)

책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의 첫머리에는 1876년 2월 26일 조선과 일본간에 만들어진 「조일수호조규」 조약에서 출발하여, 청일 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된 이후,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권을 상실한 날로,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國權被奪)까지,34년간 조선의 치욕적인 근대사를 다루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이 왜 조선과 무역에 있어서, 조일수호조규(1876.2.26)를 맺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통감이 지배한 동아시아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조선을 침탈한 이후 청나라까지 국가 세력을 확장하고 싶었다.그 야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이 호시탐탐 청나라에 세력권을 넓히려는 정치적 계산을 우선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 첫 시작으로 , 청나라를 제거하고, 러시아와 거리를 두려 했다. 일본에 의해 신체적 위협을 몸으로 느꼈던 고종임금이 러시아 영사관으로 들어간 시점이며, 러시아는 그 당시 중국의 만주를 자신의 세력권하에 두려 했다. 러시아의 입장과 조선을 세력권하에 두려 했던 일본의 외교적 이해관계는 러시아와 일본 , 두 나라 간에 「베베르 - 고무라(小村) 각서.1986.5.14」,로마노프-야마가타(山縣)의정서 1896. 6. 9」, .「로젠-니시협정,1898.4.25」 를 조선 몰래 러시아-일본간 밀약을 체결하기에 이르었다. 즉 친러파였던 조선 왕실은 일본을 이해하지 못했고, 러시아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국제 관계의 근본 룰을 알지 못했다. 1894년 3월 전봉준이 이끌었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運動 을 제거하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조선이 망국을 가는 지름길이었고, 일본이 조선을 침탈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이후 러시아는 중국을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려 했으며, 영국 , 프랑스,독일과 외교적 줄다리기가 이어졌지만, 그 결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자였던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기에 이르렀다.여기에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을사오적,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 이 있었다. 을사늑약 (乙巳勒約) 체결 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반일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조선 근대사 때 체결된 조약을 이해한다는 것은 100년전 조선이 처한 국제적 현실을 이해한다는 의미다. 외세는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길 원하였지만, 조선은 폐쇄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패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어했다. 그 야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조선은 동학농민혁명을 잠재우기 위해 성급히 청나라를 끌여 들였고,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제국이 추구하는 야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그 과정에서, 무능한 조선 왕실은 친러파를 강행하였으며, 일본자객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나아갔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조선을 국제적 외교에 있어서, 러시아 -일본 두 나라간의 밀약을 맺게 된다.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고종황제는 헤이그특사를 러시아에 파견햇지만,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조선 시대, 준비되지 않은 외세에 의한 무역 강제 개항, 조약 그 당시 외세의 힘겨루기가 한반도 조선 땅에 진행되었으며, 영일 동맹 뿐만 아니라, 영국과 조선의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독일이 조선에게 요구하였던 것까지,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5.22), 조영수호조약(1822. 6.6) ,조독 수호통상 조약(1882. 6.30) 까지 분석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관세 자주권 회복을 시도했던 조선은 조일통상장정(1883. 7.27) 을 체결하였고,이에 영국과 러사아, 프랑스가 반발하여, 임오군란에 이어지면서,제물포 조약, 조일구호조규속약(1882.8.30) 체결한다. 책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조약들 속에서, 서구 열강과 일본, 청나라는 자신의 국익을 얻기 위한 조약이었지만, 조선은 풍전등화에 놓여진 망국 조선의 국가 안전과 왕실의 생존을 담보로 체결한 조약에 불과했으며 결국 무너지는 나라 조선을 버린 ,국가적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였던 친일 을사오적의 치욕적인 역사만 기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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