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그리고 리더십 - 개인과 조직을 이끄는 균형의 힘
김윤태 지음 / 성안당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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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토지 개혁의 이성계파의 핵심 전략이었다. 위화도 회군 후 어수선한 정국에 확실한 주도권을 잡으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고려 구신(옛 신하)들의 정치적 견제와 방해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카드였다. 회군 후 최영의 실각과 우왕, 창왕의 폐위로 개경의 민심은 이성계에게 싸늘해졌다. 민심을 다시 결집시킬만한 무언가 필요했던 이성계파에게 토지 개혁은 지지율 반등에 큰 역할을 했다. 민심과 시대의 흐름을 올바른 읽은 기획의 승리였다. 민심이 그들에게 있으니 경쟁 상대가 없었으며, 또한 거칠 것이 없었다. (-32-)

한편 조말생의 정치 생명은 유배지에서 끝이 났을까? 그건 세종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능력 있는 자는 흠이 있더라도 그냥 버리지 않고 그의 재능을 사용했다. 그것이 세종의 원칙이다. 어찌 보면 지은 죄를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갚으라는 뜻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헌부의 강력한 처벌 주장을 누르고 충청도 회인으로 유배를 보낸 세종은 2년 만에 조말생의 유배를 풀어 준다. 이에 대간들은 조말생이 한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세조은 이를 묵살했다.(-89-)

강국이었던 명나라는 황제 권력에 대한 직언과 견재가 약했다. 그러면서 황실의 부패가 늘어나고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면서 환관들이 또 다른 권력 집단이 돼 국정농단을 일으켰다. 겱룩 300년도 못 돼 명나라 왕조는 무너졌다. 이에 비하면 조선 시대 대간들의 직언이 가진 역사적 의미는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넘어 왕조를 더욱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177-)

영조는 탕평을 추진하면서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원칙을 제시했다. 영의정에 노론이 임명된면 좌의정은 소론이, 판서에 소론이 임명되면 참판은 노론이 맡는 형식으로 당파 간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형평성을 맞춰 불만을 최소화하는 인사 원칙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마저 뒤흔들며 인정하지 않았던 소론을 정치적으로 보복하지 않고 화합의 정치로 가겠다는 의지를 탕평으로 먼저 보여줬다. (-279-)

조선(1392~1910) 은 518년의 왕국을 유지했다. 반면 명나라 (1368~1644), 청나라(1616~1912) 두 나라의 치세는 300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땅 정벌을 대신 군대를 돌려서, 고려 공민왕 왕조를 무너뜨린 이후, 정도전과 이성계가 설계한 조선은 왕권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이룬 나라였다. 선조 임금 때,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발생하였지만, 나라의 위기를 몸을 바쳐 구할 수 있었던 백성과 승려,양반 계층이 있었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 27대 왕 중에 태조 이성계,태종 이방원, 세종, 세조, 성종, 선조, 광해군, 영조와 정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주요 왕의 리더십을 배워볼 수 있다.

조선의 왕은 외척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태조와 태종의 치세, 왕권강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외척에게 당근과 채찍을 들어서, 회유 혹은 상을 주는 방법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조선 말엽, 외첡이었던 민씨 집안의 치세를 왕권으로 누를 방도가 없었다. 때로는 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국정농단이 발생할 땐, 비정하리만큼 저성의 형법이나 왕권으로 다스렸으며, 세종 임금이 애민사상으로 조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건,태종 이방원의 완권강화가 숨어 있었다.태종의 치적에 비해 세조의 잔인함응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서 정통성을 상실했다. 한편 조선은 왕으로만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에겐 정도전이 있었고, 신숙주는 예종, 성종에 걸쳐 명재상으로서,왕의 리더십을 보완하였다. 때로는 생육신과 사육신에 의해,단종을 폐위하고, 세조의 정통성의 부당함을 죽음으로서 ,신하들은 권력에 저항하였고, 역사의 수치로 남지 않으려는 신하의 의지 또한 존재했다. 정승 황희와 조말생을 등용하였던 세종은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재임용하여 그들이 적재적소에 쓰여지도록 한다. 한편 광해군은 시대를 잘못 만난 왕으로서, 임진왜란를 목숨을 다해수습한 왕이었지만,시대가 인정하지 않은 폭군이 되고 만다. 광해군은 뛰어난 실리외교를 추구하였고, 현대에 들어와서, 광해군을 폐위하고 , 인조반저 이후, 인조가 보여준 친명배금 정책이 병자호란을 불러온 것과 비교하여, 결과론적이지만, 광해군의 짧은 왕권에 대한 아쉬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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