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왕
이홍 지음 / 문학사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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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양옥집 마당에 있는 황소였다. 동네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희귀한 구경거리를 보러 집 앞을 얼쩡거렸다. 지나가는 우유 배달원들과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고 동네 아이들도 슬며시 대문을 조금 열고 문틈에 콧날을 디밀거나 담장에 매달려 얼굴만 비죽 내밀고 황소를 구경했다. (-58-)

휴대폰 너머에서 루가 내게 물었다.

"지현, 날 사랑해?"

나는 입술을 다물고 속으로 숨을 골랐다. 장례식장에서 비롯된 육체적 피로로부터 회복되지 않아서일까. 그 짧은 단어가 입 밖을 나오지 않았다. 루는 매일 밤 사랑한다고 말해 왔지만 내게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125-)

교민들 사이에 연수와 나의 결혼 소식이 퍼졌다. 소문의 근원지는 지현이었다. 한국 식당 하나를 빌려 잡지에 광고를 싣는 거래처 고객들을 초대한 것이었다. 지현은 웨딩 사진 촬영에서 연수의 얼굴에 발라준 화장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듯 했다. (-199-)

엄마가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리, 연수 이모 만나러 싱가포르에 갈까?"

엄마가 물었다. 아무리 나를 친자식처럼 돌봐 준 분이라 해도 기억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고온다습한 그곳 날씨가 진저리 나게 싫기도 했다. 제이콥 사건이 터진 후 엄마와 나는 동남아시아의 삶을 접고 자카르타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260-)

지운 삼촌과 엄마와 나는 각자의 입맛대로 마시고랭과 락사와 샌드위치로 요기를 했다. 나는 바닷가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소설가 이홍의 『씨름왕』의 배경은 야구,축구 만큼 인기 있었던 씨름, 1980~190년대 천하장사에 대한 추억을 삼키게 한다.주인공 지현의 아빠는 씨름왕이었고, 황소를 타오면 동네 사람들이 구경오기 바빳다. 어린 시절 남다른 삶을 살았던 지현은 자신의 남편이 황소같은 남자가 되길 바란다. 이탈리아 남자 루를 선택하고,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하게 된 것도, 지현의 의지였다. 하지만 루와 지현은 결혼하였고, 임신했던 두 쌍둥이 중 하나는 살아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루와 지현은 이혼하고, 지현은 지운이 있는 싱가포르로 떠났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점은 지현의 선택 하나하나에 대해서다. 우리는 지현의 삶에서, 씨름왕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싱글맘이라는 현재의 상황을 엮어 나가고 있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20세기와 21세기르 넘어가는 그 시점에 우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16가에 진출하는 것 뿐만 아니라 4강에 진출할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대화들을 보면, 그때 우리가 생경하게 여겼던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을 회상할 수 있게 한다. 한글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 뜻은 다르지만, 서로 연상이 되는 두 단어, 씨름왕과 싱글맘에 주목하였다. 지현은 그렇게 황소와 같은 남자를 원했지만, 1차는 실패하고,그 실패에 대한 또다른 선택으로 싱가포르에 머무르게 된다. 동기였던 지운과 지운의 아내 연수와 함께 살아갔던 것도 그래서다. 물론 지현에게는 유일한 혈육이자 피붙이인 재우가 있었으며,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지현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 볼 수 있다. 물질적으로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지현의 삶이 생각한 것보다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삶이라는 것은 물질적 풍요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소설 『씨름왕』에서 말하고 잇으며, 씨름의 들배지기를 소설에서 느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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