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 소통하는 지도자는 흥하고 불통하는 지도자는 망한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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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명의 황제가 통치한 명나라는 제국이 흥망성쇠하는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치국의 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실천한 황제가 통치했을 때는 번영했지만 ,무능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황제가 통치했을 때는 어김없이 외우내란이 끊이질 않았다. 제국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황제의 인격과 경륜 그리고 통치 역량에 좌지우지되었다. (-9-)

오랜 세월동안 중원의 지배자였던 한족은 원나라 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원나라는 각 민족을 4등급으로 나누어 차별 정책을 폈다. 지배 계급인 몽골족은 1등급, 색목인은 2등급, 북한의 한인은 3등급, 남방의 한인(남인)은 4등급이었다. 몽골족의 통치 아래에서는 한인과 남민이 천민 계급이었다. 남인과 한인의 처지는 비참했다. (-16-)

명나라는 대도를 직접 함락시키면서 큰 위험이 따르므로 먼저 전략적 요충지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난 뒤에 대도를 고립시켜 함락시키고자 했다. 부하 장수들은 모두 그의 탁월한 계책에 탄복했다. (-61-)

당시 시행한 형법으로는 목을 자르는 참수형과 가족을 몰살시키는 것 이외에도,내장을 뽑거나. 피부를 벗기거나, 무릎을 파거나, 돌로 눌러 죽이는 등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잔혹한 짓들을 했다. 그는 관아 앞에 사람 모양의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게 했다. 만약 뇌물을 받아먹은 관리가 있으면 그를 죽이고 난 뒤, 껍질을 벗겨 허수아비에 씌워놓고 관리들에게 경고했다. (-77-)

영락제가 엄청난 금액을 들여 정화에게 서쪽 바닷길을 개척하게 한 까닭은 행방불명된 혜종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얘기도 있다. 설사 그 얘기가 사실이더라도 주목적은 영락제 시대에 농업 생산량의 증가와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잉여 물자를 외국에 보내서 황실과 귀족들의 사치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10-)

만귀비는 환관들과 짜고 무서운 음모를 꾸몄다. 행여 헌종의 성은을 입어 회임한 비빈들이 있으면 온갖 명복으로 탕약을 먹여 낙태시켰다. 심지어 현비 백씨가 낳은 헌종의 둘째아들 주우극이 3세 때인 성화 7년(1471) 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만귀비의 흉계에 걸려들어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헌종은 그녀의 이러한 악행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203-)

무종은 여색만을 밝힌 게 아니었다. 그의 성적 취향은 아주 유별났다. 마음에 드느 미소년이 있으면 즉시 양아들로 삼았다. 사싱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재위 16년 동안 공식적으로 100여 명을 양아들로 삼았다. 정덕 7년(1512) 한 해 동안에는 무려 미남자 127명의 성씨를 주씨(朱氏) 로 바꾸는 기행을 벌였다. (-257-)

"선생은 미음조차 못 먹는다고 들었소. 짐은 선생의 병세를 심히 우려하고 있소. 선생께서는 집을 위해 국가의 대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낱낱이 말해주기 바라오."

임종을 앞둔 정거장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물은 것이다. (-346-)

"정차려는 황당무계한 추론으로 고계우가 죄를 저질렀다고 모함하고 있사옵니다. 만일 그의 허망한 주장을 용인한다면 많은 거짓말들이 연이어 날조되어 나올 것이옵니다.이는 정사를 바르게 다스려야 하는 조정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옵니다." (-353-)

만력 24년(1596) 9월 명나라 책봉 사절단이 일본 대판성에서 풍신수길을 만나 명나라 황제 신종이 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고칙을 전했다. 하지만 풍신수길이 원한 '화의 7개조'에 대하여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던 까닭에 양국간의 협상이 완전히 깨졌다. 만력 25년 (1597) 1월 풍신수길은 또 14만여 명의 대군을 조선에 출병시켜 다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풍신수길은 임진년(1592) 의 조선 침략이 실패한 이유가 전라도 수군의 강력한 저항과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판단하고, 전라도를 반드시 공략하여 전라도민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했다. (-369-)

진충은 또 주유교의 유모, 객씨(客氏)에게 접근했다.주유교는 어린 시절에 객씨의 풍만한 젖가슴을 만지며 자랐다. 그녀에게 유모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눈치 바른 진충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감지했다. 객씨는 위조와 '대식(對食)'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식의 유래는 이렇다. 당직을 서는 환관은 궁중에서 밥을 지어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이 가지고 온 차가운 음식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궁녀는 궁궐에서 불을 지필 수 있었으므로, 환관들이 평소에 친한 궁녀에게 음식을 데워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 남녀가 오랫동안 함께 밥을 먹으면 부부처럼 친해지기 마련이다. 환관과 궁녀 간의 이러한 '은밀한 부부놀이' 를 대식이라고 칭한다. (-408-)

승정 17년 (1644) 1월 이자성은 대군을 이끌고 동정을 단행했다. 그의 목표는 명나라의 심장부인 북경의 황궁이었다.이자성은 군사를 일으킨지 두 달만에 파죽지세로 북경성을 함락시켰다. 대순군이 창의문을 지나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급해진 승정제는 대신들을 찾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독대감 왕승은만의 그의 곁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대명 황제가 포로로 붙잡히는 치욕을 면하는 것밖에 없었다. (-452-)

원나라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 땅을 지배했다. 명나라는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중국 땅을 지배했다. 청나라는 1616년부터 1912년까지 중국 땅의 지배자였으며, 중국 대륙의 마지막 왕조로 역사기록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중국과 이웃나라로서,고조선이후,지금까지 역사의 굴레 속에 포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대한민국이 중국땅을 삼키지 않는 이상 그럴 개연성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를 함께 배워 나갈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여러 왕조 중에서, 명나라는 조선이 한반도를 지배할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조선이 500년동안 지배자가 될 수 잇었던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환관이 지배하는 나라 중국이 처한 현실, 일본이 외세의 지배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로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면, 중국은 외세 침략에서 자유롭지 않은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다.그 과정에서,중화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조선은 오랑캐, 왜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살아오게 된다. 명나라에는 영락제 때 정화대함대가 있었으며, 콜롬버스 이전에 신대륙을 지나온 시간이 있었다. 지리적 잇점과 자원이 많았으며, 천문과 과학의 발달로 가능한 남다른 기술력이 명나라에게 있었다. 하지만 왕의 구널겨 주변은 그와 동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만력제 재임기간 임진왜란으로 풍전등화에 놓여지게 되었으며, 청나라가 중국 다에 세워질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은 명나라라는 썩은 동앗줄을 쥐고 한나라의 국가를 운영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명률에 따라서, 죄인을 법으로서 다스렸고, 중국에 환관과 궁녀가 있다면, 조선에는 왕실을 보존하는 내시와 궁여가 함께 존재한다.이처럼 비슷한 제도와 국가 운영 체계, 그과정에서, 한반도 땅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들을 본다면,우리가 처한 현실 하나하나 이해할 수가 있었다. 16명의 황제가 200여년동안 명나라 권력을 쥐면서, 공포정치와 여색을 탐하였으며, 몽골의 침략에서 자유롭지 못한 명나라는 결국 국가운영 자체가 붕괴되는 위험에 처해지게 된다. 과거 황건적의 난으로 ,위촉오 삼국 시대가 도래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으며,마찬가지로, 명나라가 무너진 계기는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해 발생한 명나라의 혼란기를 틈타, 몰락한 양반 출신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서서히 명나라는 중국의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명나라는 청나라에 흡수되었으며, 청나라가 중화제국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적 흐름 속에 일본이 친미전략을 취함으로서, 제국주의로 발돋움하게 되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일본이 중국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는 그 역사적 흐름속에서, 명나라의 흥망성쇠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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