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 가벼운 책이야기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읽고 쓰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책과 사회문화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엿보인다.

말하고 듣는 인간들을 위한 매체 환경은 기업들의 천국이다. 깊이 사고하는 사람은 충동적으로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으니까. 소비자들이 생각보다 먼저 반응을 할수록 판매자와 플랫폼 운영자가 돈을 번다. 그들은 우리가 더 원시적인 동물이 되도록 부추긴다. 백화점 인테리어는 점점 더 휘황찬란해지고, 페이스북에서는 점점 더 텍스트보다 이미지와 동영상이 많아진다.
그곳은 선동가와 음모론자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받은 감정과 욕망의 자극을 더 큰 자극으로 증폭하는 감수성 예민한 이들이 이곳에서 인플루언서라는 아주 정확한 이름으로 불리며 환영받는다. 의미를 묻고 논리를 따지는 사람들은 진지충이 되어 사라지고 인간 트랜지스터들이 대접받는다. 이제는 정치인, 사회운동가 들도 이곳에서 주로 활동한다. 요즘의 정치 운동, 사회 운동 들은 철학 대신 열광을 연료로 삼는다. 현대사회는 이런 식으로 동물화하는 것 같다.
- P34

나는 이것이 ‘말하고 듣기’와 ‘읽고 쓰기’에 같은 원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러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에서는 예의가 중요하다. 읽고 쓰는 사람 사이에서는 윤리가 중요하다.
예의와 윤리는 다르다. 예의는 맥락에 좌우된다. 윤리는 보편성과 일관성을 지향한다. 나에게 옳은 것이 너에게도 옳은 것이어야 하며, 그때 옳았던 것은 지금도 옳아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괜찮은 것이 너에게는 무례할 수도 있고, 한 장소에서는 문제없는 일이 다른 시공간에서는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나 그 가족 앞에서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무신경하거나, 무례하다. 그러나 그것을 비윤리적이라고 여겨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예컨대 인터넷 공간의 모든 사람에게, 앞에 없고 그가 모르는 암환자 가족이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암 걸리겠네’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돌겠네, 미치겠네, 죽겠네’라는 표현은 어째서 허용하는가? 신경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과 그 가족, 최근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족들의 상처는 왜 살피지 않는가?
예의는 감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윤리는 이성의 영역이며, 우리는 비윤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비판 의식을 키워야 한다. 전자도 쉽지 않지만 후자는 매우 어렵다.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윤리에 대해서는 보편 규칙을 기대해볼 수 있으며, 온갖 암초 같은 딜레마를 넘어 우리가 어떤 법칙을 발견하거나 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의는 끝까지 그런 법칙과는 관련이 없는, 문화와 주관의 영역에 속해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란의 상당수는 예의와 윤리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예의와 윤리는 폭력을 줄이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이다. 이 두 덕성은 서로 겹치지 않으며, 맥락과 상황의 문제(예의)를 보편적인 법칙(윤리)으로 만들고자 할 때 종종 충돌이 발생한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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