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의 시대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왜 가난한 청년들이 부유한 부모를만난 자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겪어야 하는가? 왜 여성이 남성보다더 쉽게 살해되어야 하는가? 왜 택배 노동자의, 콜센터 직원들의, 요양원 수용자의 호흡기는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안전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몰래 촬영되어 불법 사이트에공개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라돈에 의한 저선량 피폭을 걱정하지 않고침대에 누울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왜 안전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동시에 자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안전으로서의 자유‘혹은 ‘자유로서의 안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념에 도달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위험, 불안, 공포를 함께 겪는 자들의 연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무해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 P28

벡에 의하면, 위험사회의 시민들은 막스 베버가 예견한 자본주의적 철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비판한 ‘도구적 합리성‘을 폄하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가 분석한 ‘파놉티콘‘과 규율 권력에 공포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합리성‘을 기대한다. 유럽의 대표적 비판 지성들이 디스토피아로 형상화해 온 안전을 지켜주는 통제된 감시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민중이 꿈꾸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 P30

레비나스의 윤리는 인간의 세계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21세기에 그가 말하는 이웃은 인간 너머로 확장되고 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그를 죽일 수 없다면, 우리는 이제 그 얼굴의 목록에 철창에 갇힌 개들, 미치거나 장애를 갖고 도살을 기다리는 돼지들, 살처분되기 위해구덩이에 던져진 닭들도 포함시켜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비인간의 얼굴들, 도처에서 ‘우리도 살고 싶다. 죽이지 말라‘고 외치는 이얼굴들도 이제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의 자리는 역동적으로 분열되어간다. 거기에는 절대적 경계도 없고, 특권적 위치도 없다. 더 괴로워하는 존재는 언제나 어딘가에 있으며,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무해의 시대는 고통이 회피되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껏 인정되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기왕의 것들과 연결하는, 강인하고 질긴 망해이엮어지는 그런 시대다.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