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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대학 다닐때 페미니즘 문예비평 동아리를 마음 맞는 친구와 만들었던 적이 있다.
문학,영화,연극,미술,노래 등을 다루었었는데,
그 당시 '페미니즘' 혹은 '여성'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려면 조금의 용기와 꿋꿋함이
필요했었다.
사상만을 내세우고자 시 답지 못하고, 연극답지 못하고, 소설답지 못한
구호(?)같은 작품들이 참으로 많았었다.
(음..쓰고 보니 논란의 소지가 많은 문구있듯...에궁^^..순전히 저의 좁은 소견^^*)
그 속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은 든든한 빽(?)이고 자존심이었다.
요즘은 주로 묵상집이나 여러 가지 생각들을 담으신 산문집을 내셨었는데
소설집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인생의 중후반부의 일을 소설의 소재로 많이 쓰셔서 지금 내 옆에 계신 양가 부모님도
떠오르고, 그 나이가 될 나의 미래도 떠올리며 재미있게,푸근하게 소설을 다 읽었다.
<그 남자네 집>은 성신여대 출신으로 돈암동 지리를 좀 아는지라
선생님은 '그 남자의 집'을 찾아 돈암동 골목길을 다니셨지만,
나는 나의 20대를 추억하며 선생님의 뒤를 쫓아 돈암동 골목길을 헤매고 다닌 듯 하다.
내가 학교 다닐때만 해도 안감천이 있었는데..선생님의 젊은 시절처럼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하천의 흔적은 고대로 남아있었었는데...요즘은 가면 헤맬듯하다.
<촛불을 밝힌 식탁>도 읽으면서 두 세대를 다 공감하게 되는 감정의 모순을 겪기도 했다.
당연히 지금의 내가 속한 30대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그 윗세대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니....
하지만 소설에도 나오듯이
"알아듣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책을 읽고 나면 그냥 간단하게 내 서재에 메모 정도나 남기는데,
이 책 역시 그럴 생각이었었는데, 맨 뒤 작가의 말을 읽고 나니 마음이 울컥해졌다.
"9년 만에 또 창작집을 내면서 또 작가의 말을 쓰려니 할 말이 궁했던지 문득 이게 마지막
창작집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곧 피식 웃음이 나면서 그런
객쩍은 짓을 안하게 된 것은 아마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였을 것이다.
그 분은 연세가 일흔을 넘고 나서부터는 해마다 생신때만 돌아오면 올해가 마지막 생일이
될 것 같다고 비장한 어조로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마지막 생일은 그 후에도 십 수차례나
더 계속되어 최초의 예언적 비장미를 잃었다. 왜 그랬을까? 그 분은. 생신을 잘 차려달라는
엄포였을까. 아니면 반복되는 연중행사에 진력이 나서였을까.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짓이라도 안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아차산 기슭에서 길고 지루한 여름을 보내고 나서 박 완서 >
불혹의 나이에 등단하셔서 그 만큼의 세월을 한국소설사에서 큰 자리를 만드셨다.
여자의 일생에서 불혹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 분이다.
박 완서 선생님의 소설에는 항상 내가 있다.
여자인 내가 있다.
과거의 내가 있고, 지금의 내가 있고, 또 미래의 내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 친정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박하지만 영혼이 풍요롭고 자유로운..꼿꼿하고 자존심있는 그런 마음속의 친정에
온것 같아 참 따뜻하고 위안이 된다.
근데...................
작가의 말을 읽다보니 두려워졌다.
이제 선생님의 글을 뵐 기회도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방정맞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루한' '진력' 이라는 단어들을 보니 그런 위기감은 더 실감나게 와 닿는다.
흘러가는 것을 막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고,
지나간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도 참 못할 짓임을 잘 알지만,
흘러가는 많은 것들속에서 가슴 먹먹해지는 일들을 감당하는 건 여전히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