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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 영화로 읽는 기술철학 강의
박승일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6월
평점 :
_ 제목부터 선명하게 지향성을 드러내는 ‘기술철학’ 도서다. “공학, 사회과학, 인문학”을 아우르는 공부를 지향하는 미디어융합연구자가 대중 강연 형식으로 쓴 책이다. “기술을 빼놓고는 인간, 자연, 사회, 세계를 말할 수 없기에 ‘보통 사람의’ 기술에 대한 교훈, 성찰, 질문, 고찰이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요구된다”는 문제의식을 지녔다.
_ 이 책의 태도를 잘 드러내는 구절은 서문에 있다. “‘기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국면마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죠.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어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이 문장을 길게 늘인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길게 늘인 것’에는 저의 질문과 고민, 망설임, 성찰 그리고 잠정적인 답변에 이르는 수많은 사유의 여로가 총합되어 있기도 하죠. … 같은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한 발자취가 달라진다면 당연히 전혀 다른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30쪽)
_ “생각의 문을 여는 기술철학 입문서”: 책은 기술철학적 논의를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활용한다(“SF라는 사변적 우화”). ‘상상의 나래를 펼쳐’ 화두를 쉽게 끌어내기 위한 선택이다. 줄거리, 핵심 모티프, 인물, 결말 등을 가지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것들을 끌어낸다.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기술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3개로 구분하고(최대주의, 최소주의, 개입주의), 각각의 입장에서 유의할 부분을 짚는다(이 책의 태도는 ‘비판적 개입주의’이다). 2부에서는 가장 최근의 기술적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인공지능에 대해 논한다. 인공지능과 의식의 문제, 지능과 사회성, 체화‧감각과 AGI, 기술적 발전 누적 속 ‘블랙박스’ 현상과 인간의 역할 등을 다룬다. 3부는 텔레비전과 SNS, 인터넷의 역사, 자동화와 노동‧인간‧사회의 관계, 인간과 비인간 존재 및 구성적 외부의 관계(“신유물론”) 등 앞에서 다루지 못한 기술이 매개된 인문사회적 화두를 다뤘다. “입문서”(또는 “교과서”)라고 보면, 기술과 매개하여 진지하게 다뤄볼 수 있는 인문학적‧사회과학적 화두들을 두루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_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내용을 각 부에서 하나씩 추려보면, 1부 <터미네이터 2>에서의 ‘보통 사람 존 코너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78쪽,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들이야말로 기술에 대한 급진적 대립 속에서 ‘공허함’과 ‘맹목성’을 넘어서는 선택이 가능한 존재라는 것), 2부의 <핀치>에서의 ‘체화된 인지’(체화 없이 지능은 발생할 수 없다)와 ‘사회적 존재’(자율성, 실수,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한 끊임없는 연쇄) 발생에 관한 논의(244~254쪽, 최대주의적 AGI 논의와는 달리 지능과 사회성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것), 3부의 <월-E> 해설에서의 자동화와 노동의 ‘종말’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른바 ‘인간의 동물화’(368쪽, 노동을 통한 세계 개조의 성취와 자아 인식이 사라지면 이는 곧 역사와 사회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것) 등이었다. 인공지능, 자동화, 디지털 자본주의 논의에서 곧잘 소멸되는 요소들을 다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_ 상당히 정교하게 세부적으로 내용을 파고드는 것에 비해, 큰 틀에 있어서는 다소 뭉툭하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 정치경제학’을 논하면서 사실상 그 필요성을 거의 기후위기에서만 끌어오는 것, ‘욕구’와 ‘욕망’은 분명하게 구분하면서도 ‘의지’는 욕망과 쉽게 동치시킨 것, 사회성의 범주를 논하면서 사실상 ‘가족’과 ‘친구’ 등 개인으로서의 최소 집단만을 논하는 것 등).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참고할 부분들이 꽤 많은 책이었다. 인공지능을 포함한 기술에 관한 논의의 핵심은, 결국 ‘인간은 (집단으로서의 총체적 존재인)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하고 있는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기술을 통해 인간을 논하고, ‘포스트휴먼’을 공상적인 문제가 아닌 다수 대중으로서의 ‘인간의 재탄생’ 개념에서 사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