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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마니아
김쿠만 지음 / 냉수 / 2022년 10월
평점 :

술맛 좋은 인생이겠군요. / p.252
학교 다닐 때에는 다른 친구들보다 유행을 조금 늦게 타는 편이어서 누가 봐도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당시에 유행했던 MP3 플레이어보다는 CD로 돌아가는 CD 플레이어를 더 선호했으며, 김광석 님이나 유재하 님의 노래를 참 좋아했었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는 영스트리트라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혼자 실실 웃었다. 조금은 과거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을 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딱 중간에 선 사람인 듯하다. 동영상이나 사진 편집에 관심이 있다거나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습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봐서는 그래도 디지털 세대로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유튜브 매체보다는 독서를 즐기고, TV 프로그램보다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선호하다 보니 아날로그 감성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는 젊은 사람이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낭만적이라고 칭찬해 주시지만 솔직히 가끔 스스로 정의를 내리는 것에 대해 혼란스럽다.
이 책은 김쿠만 작가님의 단편 소설집이다. 제목부터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요즈음 뉴트로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과거 유행을 현대 방식으로 맞게 재구성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데 아날로그 감성이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추억을 자극할 수 있는 소설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과연 소설 안의 인물들은 어떻게 레트로를 즐기고 있을까.
표제작인 <레트로 마니아>를 포함해 여덟 편의 소설과 해설이 실려 있다. 솔직히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하거나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들이어서 당황스러웠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요즈음 신조어인 '돌+I'로 표현될 정도로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법을 어긴다거나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아닌데 주변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흔들게 될 것 같다. 소설의 내용이나 문체, 호불호를 떠나 인물 자체로만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지점이 새로우면서도 흥미로웠는데 개인적으로 <레트로 마니아>와 <제임슨의 두 번째 주인>이라는 단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레트로 마니아>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자는 게임기가 있는 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주인은 한국 사람이지만 시게루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레트로 게임기를 수집하기도 하고, 가게에서 죽치고 앉아서 게임을 하는 등 그야말로 레트로 게임 광이었다. 그곳을 방문하는 손님들도 조금은 이상하다. 꽤나 가방끈이 긴 손님은 주인과 싸우는 게임을 하다가 얻어 맞았고, 청소년 손님은 게임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하지만 맞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제임슨의 두 번째 주인>은 제임슨이라는 술집 주인과 아르바이트생의 이야기이다. 제임슨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이지만 자신은 아일랜드계 한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화자는 안 교수라는 사람과의 회식에서 남은 최종 2인 중 한 사람으로 제임슨을 알게 되고, 거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일을 하게 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술집을 이어받아 운영한 화자는 전 주인이 된 제임슨으로부터 손님들의 정보를 받는데 <레트로 마니아>의 손님들처럼 이상하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정치색이나 성 정체성까지 기재가 되어 있으며, 방문하는 손님들 중에서는 JAMESON을 자매손이라고 우기기까지 한다.
두 편의 소설 모두 소설의 방향을 흔들만한 큰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인 답지 않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돈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니아라고 불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들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두 아르바이트생, 진상이면서 아닌 것 같은 손님들까지 처음에는 이들이 어이가 없어서 웃겼고,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공감이 되어서 웃겼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다른 소설에 이름이 보일 때면 반가웠다.
거기다 중간에 건조한 유머도 웃긴 포인트에 한몫했다. 목사님께서 요한계시록으로 설교를 했다는 말에 자신이 순순히 믿는 주님은 맥주밖에 없다는 대답, 아일랜드인이라면 주근깨가 있어야 하지 않냐는 물음에 인종차별적 발언이라고 응수하는 말 등이 그랬다. 어떻게 보면 심심하고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시크한 유머가 딱 취향에 맞았다.
읽는 내내 웃으면서 가볍게 읽다가 해설을 보면서 소설의 무거움이 확 느껴졌던 것 같다. 사실 이상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기에 작가의 의도나 소설에 담긴 반영적인 부분을 읽지 못했는데 해설이 딱 그 지점을 꼬집어 주었다. 그제서야 어둡고도 냉혹한 현실과 인물들의 무기력함이 보였다. 어떤 화자는 소설 작가로 살아가고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으며, 또 안 교수라는 인물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여기저기 쫓기고 있다. 오죽하면 <장우산이 드리운 주일>에서는 아예 대놓고 비와 멸망을 기다리겠는가.
인물들이 살아가는 현재를 보고 있으니 어쩌면 특별하고도 특이한 게 가장 평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지칭했었던 스스로가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묘하게 마무리는 위로가 되었던 소설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