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름 없는 것들의 밤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에게는 없다. 피도 눈물도 땀도 체온도. 생명도. / p.176
AI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이야기. 인공지능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오류값을 낼 때마다 아직은 먼일이라고 코웃음을 치지만, 파파고가 이세돌 바둑기사를 이기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순간 현실로 체감되고,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기계와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은 명백하지만, 과연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날이 올까. 아직까지도 많이 혼란스러웠다.
현실과 허구 그 사이에서 공상을 펼치다 집어든 정보라 작가님의 연작소설이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고통에 관하여>, <붉은 칼>에 이르기까지 세 번째 접하는 소설이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 중 인간의 저항이라는 카테고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을 꼽는다면, 역시 정보라 작가님의 소설이었다. 기계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해서 기대가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죽음의 위기에서 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의 도움으로 흡혈인이 되었다. 그녀가 사는 시대는 기계가 인간을 사는 세계를 지배한 후, 기계를 온전히 믿는 추종자들은 기계에 저항하는 이들을 찾아 처단한다. 인간의 흔적이 없는 수영장에서 기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 빌리와 주인공 무리가 함께 기계 연구소를 무너뜨리고, 기계 무리에게 저항해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많이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현실적으로 상상이 가능한 장르를 선호하는 독자로서 SF나 판타지 또는 필모그래피 자체가 곧 장르인 작품의 세계관은 완독률이 낮다. 이 작품은 명백하게 후자에 속했는데 사회 이슈와 철학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여러 번 곱씹으면서 읽었다. 분명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한 호흡에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스토리가 주는 몰입감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타인의 피를 빨아들이고, 빌리로부터 받았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다시금 되뇌이는 장면과 화장실 안에서 벌어지는 그 여성의 서사는, 오늘날 우리가 자주 접하는 몰래카메라 범죄를 겹쳐 읽게 만드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 공간이 주는 불쾌함과 냄새가 마치 코끝을 맴돌았다. 여러 모로 이 계절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기계와 기계 추종자, 기계 저항인과 흡혈인의 싸움이 아니다. 지배하려는 권력과 그에 맞서는 자들의 저항이자 투쟁의 이야기다. 거칠고, 더럽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그들의 습도 높은 이야기가 이 여름의 불쾌함과 어울러져 더욱 피부에 와닿았다.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미묘한 현실과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가상의 경계선에서 공상의 그림을 더욱 짙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