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
신재민 지음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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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문 너머에 아버지가 있을까. / p.97

생전 할머니께서는 늘 화재 사건을 보시면서 나라가 망하려는 징조라는 말씀을 하셨다. 화재 피해자분들께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년 화재가 끊이지 않는데 나라는 왜 여태 멀쩡히 굴러가고 있는지 괜히 토를 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예전 어르신들의 미신 같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요즈음 더 많이 일어나는 듯한 화재가 제발 판타지로만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화재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신재민 작가님의 장편소설이다. 여름에 어울리는 장르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선택하게 되었다. 그동안 추리나 스릴러 작품들은 영미권 아니면 일본 작품들을 주로 접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작가님들의 작품을 접하는데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특히, 상상력이 가장 큰 약점이었던 내 머릿속에도 그려질 정도의 스토리텔링은 강점으로 다가왔다. 기대를 가지고 페이지를 넘겼다.

소설의 주인공은 지재헌으로, 도편수로 이름을 날린 지범근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죽기 전 유언으로 도편수 제자에게 전 대통령 이용암 생가를 재건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제자는 이용암 재단의 부탁에 거절했지만, 재헌은 이를 수락한다. 불에 탄 이용암 생가를 다시 건축하는 과정에서 기이한 일과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게 된다. 과연 지재헌은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무사히 생가를 완성할 수 있을까.

술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역시나 언급했던 스토리텔링의 매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건축이라는 소재가 주는 낯선 느낌은 있었지만 전문적인 용어를 모른다고 해서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주인공이 유언을 어겨서 일어나는 일과 드러나는 비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속도감 있는 작품을 원하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인물들의 양면성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에서 지재헌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가지고 복수하기 위해 재건축 제의에 응한다. 또한, 재헌의 건축을 돕는 인물들은 각자의 이유로 악인 이용암을 돕는 일을 선택한다. 그나마 선하게 보이는 문시록마저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기 위해 동참했다는 점에서 다르게 느껴졌다. 이들에게서 동전의 양면 같은 모습이 보였는데 제일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누구나 선악을 가지고 태어난다. 성장하면서 그만큼의 선악을 학습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간다. 하늘 아래에 완전 악인도, 무결한 선인도 없다. 과연 그들이 무조건 잘못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잘못된 길을 걸었던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나와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겹쳐졌다. 재헌과 그를 돕는 이들 모두 각자의 목적 앞에서 완전한 해답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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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레이디가가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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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사람이 보이면 바로 도망쳐야 해. / p.141

모든 독서가 다 좋지만 아쉬운 점이 바로 독자로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혼자 독서하면서 감상을 남기다 많은 지인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내 해석이 정답이 아닐 뿐더러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깨달음을 얻고 싶었다. 이미 인쇄된 책은 독자의 결정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바뀐다 해도 오탈자가 다음 쇄에 수정되는 정도이지 않을까.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을 생각하면서 선택한 책은 미치오 슈스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예전에 독자가 읽는 순서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N>이라는 작품을 읽었다. 원래 성향 탓에 그냥 순서대로 읽었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도 읽었는데 크게 와닿는 지점이 없었다. 특이한 실험이라는 소재 자체만 납득했을 뿐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독자가 주인공의 생사에 관여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그 점에 다시 한번 혹해 집어 들었다.

이 책에는 두 작품이 실려 있다. <지오스민>과 <페트리코>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첫 장에는 독자가 어느 이야기부터 먼저 읽을지 체크할 수 있는 면이 있고, 개인의 선택에 따라 끌리는 것부터 먼저 읽으면 된다. 다 읽고 난 이후에 편집자 후기를 통해 연결고리와 해석을 접하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놀랐다. 사실 의식하지 않고 따로 읽으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각각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렵지 않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장르 소설 중에 가장 독창적이 재미있었다. 스포일러를 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뭘 더 덧붙여야 할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재미 면에서는 확실히 충족되었다는 점은 자신할 수 있다. 장르 소설을 좋아하지만 기존 작품들과는 색다른 매력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아마 만족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하나의 강렬한 인상보다는 전작과 비교되는 감상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솔직하게 <N>은 참여한다기보다는 파헤친다는 인상이 더 강했던 반면,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독자가 작품에 개입해 주인공을 쥐고 흔드는 느낌이었다.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생사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완성도가 조금 아쉽더라도 이렇게 실험 정신 가득한 작품을 계속 만나고 싶다. 작가가 아니어도 함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 어디에서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추억이었다. 과연 이 작품의 주인공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죽일 것인가. 그건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 잔인하게 죽여도, 아니면 인류애를 가득 담아 살려도 그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온전히 느껴 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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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가 XXX였던 건에 대하여
정해연 외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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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건 오PD의 말처럼 저 녀석들이 앞으로 뭐가 될 줄 모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 p.158

최애를 묻는 질문에 늘 난감한 웃음을 짓게 된다. 누군가는 한때 학창시절에 큰 추억을 선사해 준 우상이었고, 또 다른 이는 긴 시간 동안 나의 이메일 아이디를 차지했고, 지금까지 내 휴대 전화 뒷자리에 생년월일로 남은 이도 있다. 열광하게 만들어 준 것만큼은 고마운 일이지만, 차마 말하기 창피하다. 같은 존재가 아님에도 그 사람의 과오로 나 역시 똑같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야말로 최애가 XXX다.

이제 남아 있지 않은 최애들을 떠올리면서 선택한 책은 정해연 작가님과 김아직 작가님, 정명섭 작가님, 박지선 작가님께서 참여하신 앤솔로지 소설집이다. 처음에는 제목에 혹했다. 언급한 것처럼 내 과거의 최애들은 하나같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거기에 작가님들의 라인업이 흥미로웠다. 지우고 싶은 내 최애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지점에서만큼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소설집에는 작가님별로 한 편씩, 총 네 편이 수록되었다. 음악 방송 1위 기념으로 떠난 MT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인기 아이돌 그, 외딴 행성의 서바이벌에 참가하게 된 비인기 그룹의 멤버, 콘셉트를 위해 떠난 다른 나라에서 군사기업으로 오해받은 아이돌, 요괴를 쫓는 능력을 가진 아이돌 그룹의 보컬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 다채로운 매력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술술 읽히는 소설집이었다. 누군가를 덕질했던 아이돌 팬이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가 아닐까. 한 권의 소설집 안에 SF부터 스릴러, 판타지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다가왔다. 참여하신 작가님들의 작품을 읽고 취향에 맞았다면 이 작품집도 추천한다. 처음 접하는 작가님의 작품도 꽤 흥미로웠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읽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김아직 작가님의 <엔딩 요정의 비밀>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선유다. 선유는 '노 웨이 아웃: AT37'에 출연한다. 인기 아이돌 그룹에게 먼저 제의가 갔지만, 이를 거절하면서 선유에게 기회가 돌아온 것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다른 그룹의 팬들이 두려워 몸을 사릴 생각이었는데 제작진은 제작진은 선유를 불리한 구도로 몰아간다. 과연 선유는 우승할 수 있을까. 예전에 시청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과연 나의 과거 최애들은 진짜 XXX이기만 했던 것일까. 실제로 뉴스 사회면을 도배했던 이들도 있었으니, XXX는 확실히 맞는 말이다. 내 추억을 도려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도 있다. 읽는 내내 나름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는 이들의 고군분투에서 연민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들의 팬이라면 최애를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상의 세계에서 얼마 없을 그 팬들이 참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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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야옹 씨의 조그만 상실에 관하여 HiP 시리즈
정보라 지음 / 텍스티(TXTY)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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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놈은 그저 벌레에 불과하다. / p.63

한계를 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안주하는 것보다는 도전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회피형 인간으로서 많은 것을 맞닥뜨리기보다는 피하는 게 편하다고 여기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럼에도 어려웠던 작가의 작품을 계속 접하게 되는 것은 내가 하는 저돌적인 도전이다. 과거에는 이해가 안 되었던 세계관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물론, 이게 뭐 대단한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도전하게 되는 작품이 바로 정보라 작가님의 소설이다. 얼마 전에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이라는 작품을 읽었는데 벌써 또 신간이 나왔다. 그것도 미출간 단편선이었다.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신작을 연달아 읽게 된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데 그래도 늘 믿고 읽으니 무조건 접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대와 설렘을 안고 페이지를 넘겼다.

작품집에는 총 세 편이 수록되었다. 이름을 빼앗기는 세상에서 '내 이름을 불러 줘'라는 희미한 소리를 듣게 된 한 경비대원 여자의 이야기, 이십 년마다 처녀를 요물에게 바치는 마을에서 금지된 사랑을 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에게 새끼를 살해당했지만, 인간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길고양이 귀야옹 씨의 이야기. 모두 여성이거나 암컷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술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작가님의 작품 중 가장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짧게 시작해 굵직하게 끝맺는 이야기지만,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확고하다. 거기에 결말 또한 명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이 낯설게 다가왔던 독자들이라면 이 작품으로 입문해도 좋을 것이다. 세계관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되, 이해하기는 훨씬 쉽다.

개인적으로 <바늘 자국>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요물에게 몸을 내어야만 하는 한 처녀의 이야기다. 다른 마을 주민들은 말로써 위로하는 듯하지만 정작 그녀를 이해해 주는 것은 몸종 애련뿐이다. 애련과 주인공은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요물에게 가게 되었지만, 가까스로 탈출했다. 다시 돌아온 마을에는 애련의 시신이 있었다. 그녀는 애련을 묻고, 이 모든 것을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가장 낮고 약한 곳으로 향하는 게 인간의 선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누구나 권력에 욕심을 부리게 되고, 높은 곳을 본다. 작가님의 작품은 늘 지름길의 이정표였다. 이름을 빼앗겼던 이에게 이름을 되찾아 주고, 순결을 잃은 이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길고양이의 상실을 생각해 주는 것. 허구의 세계라도 따뜻한 선을 잃지 않게 만드는 것이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에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힘이자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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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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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실존하는 신에게 악의 문제를 따지기란 중력이 중력인 까닭을 두고 세계와 다투는 일과 같다. / p.214

이번 주말부터 매주 한 번씩 온라인 독서모임으로 천문학자 칼 세이건 님의 <코스모스>을 함께 읽는 중이다. 절대로 혼자 페이지를 안 넘길 책이지만 독서가로서 한번쯤은 접해야만 하는 불멸의 고전 도서이기 때문에 부담감을 안고 참여했다. 그 시간동안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손목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감히 위대한 책을 앞에 두고 그런 잡생각을 한다는 게 스스로도 민망했다. 역시 과학은 너무나 큰 벽처럼 느껴진다.

늘 멀고도 깊은 과학 분야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지점은 SF인 듯하다. 그렇게 접한 이 작품은 단요 작가님의 단편소설집이다. 작가님의 작품은 그래도 자주 접했다. 특히, 쌍둥이 이야기를 다루었던 <트윈>은 흥미롭게 다가왔고, 선악을 주제로 했던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SF이지만 철학적인 느낌이 매력적이었다. 나름 믿고 읽었던 작가님의 신작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이 소설집에는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각 작품은 컴퓨터 기술과 철학, 종교학 등 다른 학문과 융합해 작가님만의 독창적인 세계관 이야기를 다루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딸을 살리고자 하는 엄마, 종교 연구자와 기술직 사무관의 대화 등 어느 정도는 현실과 연결된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등장하는 세계는 가능성이 없는 아득한 미래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솔직하게 많이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언급했던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도 도전처럼 느껴졌던 작품이었는데 그 이상의 넓은 소재를 다루고 있어 읽는 내내 많은 힘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 책 좀 읽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에 스크래치가 생겼던 순간도 있었지만, 힘겹게 따라간 만큼 세계관 하나만큼은 참 흥미로웠다. 다차원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접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아마 상상 그 이상의 매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종교 역사를 다루는 학자와 송전탑을 관리하는 기술직 사무관으로, 이들의 전화 내용이 곧 줄거리다. 학자는 삼천 년 전에 온도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가정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의 영적인 시야 관념까지, 처음에는 뭐 이렇게까지 생각하나 싶지만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되는 이야기였다.

답이 나오지 않는 철학과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종교는 가볍게 생각하면 과학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비교적 과학은 명확한 답이 있고, 눈에 보이게끔 증명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관들을 접하면서 나름의 공식이 산산이 부서졌음을 체감하게 되었다. 철학도 어렵고, 종교도 어렵고, 과학은 더 어렵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 설명되지 않는 여운 하나가 남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붙든 시간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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