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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 - 가장 민주적인 나라의 위선적 신분제
이저벨 윌커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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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중 누구도 본래의 우리가 아니다. / p.80
유독 경계하거나 검열하는 것들이 많지만 그 중 하나가 차별과 편견에 대한 인식이다. 혹시나 나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차별 또는 편견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에 깊이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사람이면서 비주류의 차별과 편견을 정면으로 느끼는 현장에서 근무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열린 사고를 하려는 노력 중 하나로 성인이 되어서 독서를 취미로 삼게 되었다.
상대방이 하는 편견과 차별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이기도 하다. 편견과 차별은 주류의 누군가가 비주류에게 가지고 있는 권력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평등하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이를 행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은연 중에 '이 사람이 나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일 거야.' 라는 인식을 미리 깔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내가 받는 편견과 차별이 아닌 내 주변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어도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 때가 있다. 누군가는 피해의식이라면서 이 또한 조롱할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 차별과 편견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언론인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인 이저벨 윌커슨의 논픽션 사회학 책이다.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카스트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들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카스트는 인도의 계급이었다. 미국에서의 카스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다. 또한, 내가 늘 경계하고 있는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여서 더욱 눈길이 갔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의 카스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색 인종의 차별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인종차별의 문제가 카스트 제도 하에서 나온 하나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백인우월주의와 종교적 신화와 맞물려 카스트라는 제도가 생겨났다. 결국 카스트라는 피라미드에서 지배 계층은 유럽계, 중간 계층의 아시아계와 라틴계, 피지배 계층에는 아프리카계로 서열이 나누어졌다. 이 책에서는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사이에서의 권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총 여섯 파트로 나누어졌으나,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읽었다. 카스트 제도의 시작부터 문제, 백인들이 행한 비인륜적인 범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설움과 카스트 제도의 현재와 미래까지 카스트 제도라는 틀을 가진 하나의 역사를 보는듯했다. 아무래도 저자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여기에서 말하는 피지배 계층이기 때문에 백인들의 무자비하면서도 무지한 폭력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인상 깊게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히틀러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책을 통해 히틀러가 미국의 카스트 제도를 표방해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히틀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백인들의 폭력을 부러워하면서 하나의 희생양으로서 유대인을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내용처럼 누구보다 잔인하게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러한 내용은 2 장에서부터 시작해 수시로 등장하는 내용이다. 히틀러의 충격적인 이야기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백인들의 인종 차별 문제들은 피부로 실감할 일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이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또한, 백인들이 카스트라는 이름 하에 저질렀던 폭력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 내용 또한 비교하는 내용으로 자주 언급이 되기도 한다. 두 카스트의 차이점은 제도의 분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의 카스트는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피부색으로 구분이 가능하며, 인도의 카스트는 직업과 이름의 성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 신화로부터 비롯된 자연의 법칙이라는 점을 들어서 이를 정당화시킨다거나 피지배 계층의 사람들은 열등하다는 낙인, 그들을 인간보다 더 낮은 계급으로서 인간성 자체의 부정, 대대손손 계급의 대물림 등 인도와 미국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카스트 제도는 놀라울 만큼 공통점이 많았다.
백인들의 폭력적인 이야기들과 더불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내용들도 기술이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4 장의 <세상의 죄를 짊어진 희생양>과 5 장의 <스톡홀름 생존법>이라는 파트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전자는 미국 사회 내의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들의 원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돌린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취업 일자리가 별로 없다거나 경제 상황이 나빠지는 등의 이유는 사회 내부의 문제임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집단의 원활한 기능과 견고함을 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후자는 백인으로부터 사회적 폭력을 받고 있음에도 지배 카스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차별 역시도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이해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말하고 있다. 불완전한 제도 안에서 체념과 수용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맞아도 자비를 베풀라는 것.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되는 현상을 일컫는 스톨홀름 증후군의 이야기를 들어 카스트 제도 안에서의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사이의 동조를 다루고 있는데 보면서 화가 났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불합리함을 깨닫고 권리를 쟁취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자리에 선출이 되었던 적도 있다. 분명히 겉으로 보기에는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쟁취한 정책들은 백인의 피지배 계층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과 피지배계층에게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차라리 치료를 못 받아 죽고 말겠다는 말을 보니 단전에서 답답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내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백인우월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전 미국 대통령을 뽑은 이유 역시도 지배 계층들의 권력에서 나온 선택이라는 사실도 씁쓸했다.
지금은 백인이 조금 더 우세하나 2042 년에는 미국의 인구 비율이 역전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피부색이 조금이라도 흑색에 가깝다면 피지배 계층의 낙인을 찍고 있지만 그 시점이 되면 조금 더 완화시켜서 동양과 라틴계의 피부색을 비교해 지배 계층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제도를 견고하게 유지시킬 것이라는 내용이 뭔가 머리에 박혔다. 어떻게 해도 백인이 미국에 남아 있는 한 카스트 제도는 불멸할 것이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항상 편견과 차별, 갈등에 얽매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대한민국의 모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특히, 두 가지 부분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하나는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문화 차별, 또 하나는 대한민국 사람들끼리 벌어지는 차별 문제였다. 둘 다 저자가 말하는 미국의 카스트 제도에 비하면 새발의 피로 느껴질 정도로 사소할 수도 있겠지만 바다 건너 동양의 이 나라에도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갈등과 차별이 존재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겹쳐서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는 현실에서 우리 역시도 동남아 국가의 사람들에게는 차별과 멸시를 하고 있으나,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대하는 태도들과 누군가에게는 지배 계층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피지배 계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했었던, 또한 겪었던 많은 차별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우리 또한 그런 부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는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부끄러운 단면이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희생과 상처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이나 내용 자체는 술술 읽혔지만 보는 내내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힘들었지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문외한이었던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조금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카스트가 없는 세상은 모두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내용이 곧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자의 바람처럼 말도 안 되는 이념들로 정해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휴지조각이 되는 일이 쓸데없는 공상으로 느껴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