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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 ㅣ 안전가옥 FIC-PICK 4
이경희.전삼혜.임태운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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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레이어였다. / p. 39
학교 다닐 때에는 사이버 세상에 참 관심이 많았다. 현실의 방은 돼지우리일지 몰라도 사이버 세상에 있는 나의 방은 빔 프로젝터와 쇼파가 있는 안락한 공간으로, 현실의 나는 교복을 걸치고 있지만 가상의 나는 비싼 명품을 두르고 있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심지어 당시에 나왔던 노래 가사는 사이버 세상에서 만난 사랑을 다룬 내용을 다루고 있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공감이 되어서 자주 듣기도 했었다. 어쩌면 현실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만난 이들에게 더욱 잘 보이고 싶었던 모양인 듯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은 사이버로 물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그만큼 자주 들리는 단어가 메타버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조금만 어렸더라면 학교에서 메타버스와 관련된 과목을 배우지 않았을까. 지금은 머리도 굳고, 호기심도 없는 지극히 현실에 찌든 성인이 되어 메타버스가 그저 복잡하게만 느껴진다. 사이버를 처음 들었던 그 시절의 어른들이 딱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 책은 안전가옥 출판사의 앤솔로지 단편 소설집이다. 입이 아프게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안전가옥 출판사의 책에 대한 신뢰이다. 쇼트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고, 오리지널 시리즈도 시간이 될 때마다 조금씩 읽고 있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접한 시리즈가 바로 이 FIC-PICK이다. 작년에 도시와 청년을 주제로 했던 공포 장르와 고전 문학을 현대로 재해석한 책이 참 인상적이었기에 이번 신작도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다.
이번 주제는 메타버스이다. 이경희 작가님, 전삼혜 작가님, 임태운 작가님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기대와 함께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메타버스라는 단어 자체가 익숙하지만 정보 측면으로 보았을 때에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SF 소설에서 과학 지식이 튀어나올 때의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상상력이 큰 약점이었던 나에게는 이 소설집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첫 번째 작품은 <멀티 레이어>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정민은 메타버스 세컨드 서울의 사전 테스터로 참여했으며, 그곳의 고인물이다. 세컨드 서울의 개발자는 100 년 뒤에 현실로 보내 준다는 조건을 걸고 이들을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서울이 안정이 되고 100 년이 지난 이후에도 다시 돌려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10 년을 더 기다려 달라는 요구까지 하게 된다. 로그아웃해서 현실로 가려는 자와 그저 지켜보는 자, 이들이 나가지 못하게 막는 자 등 각각의 의견이 뒤얽혀 그야말로 세컨드 서울은 쑥대밭이다. 그러던 중 정민에게 의뢰를 부탁하는 인물과 더불어 로그아웃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정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레이어를 마치 포토샵의 화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었던 것 같다. 레이어 1에 정민이 있고, 레이어 2에 건물 배경이 있고, 레이어 3에 베르테르가 고민하는 장면이 있는 등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했다. 그 중에서도 메타버스에 익숙한 세계에 있는 이들이 현실 서울로 돌아간다면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묘하게 공감이 되었다. 현실 서울만큼이나 세컨드 서울도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싸우기 바빴고,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이익을 쫓아 테스터들을 이용했다. 정민과 이들이 살고 있는 세컨드 서울과 인구의 25%가 살고 있는 현실 서울이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배경 자체는 새로웠지만 인물들의 이야기는 익숙했다. 읽으면서 혁명단들과 개발자가 싸우는 액션이 돋보였는데 이는 활자로 읽는 것보다는 영상으로 구현이 되었을 때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작품은 <구여친 연대>이다. 대학교 같은 동아리 후배 유리로부터 손 사진이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알고 보니 구 남자 친구인 현준이 돈에 눈이 멀어 회사에 동의도 없이 손 사진들을 팔아 치웠던 것이다. 그렇게 유리, 경윤과 모이게 된 주인공 미현, 소리의 손 사진이 전시가 되었다는데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현준이 작업을 걸었던 또는 현준과 만났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구 여친 연대는 현준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복수와 함께 소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세 작품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인상적이었다. 회사가 사진들을 조합해 새로운 사진이나 그림을 창조한다는 측면에서 소설집의 주제인 메타버스와 연관이 있겠지만 구 여자 친구들이 모여 구 남자 친구에게 복수한다는 게 너무 현실 그 자체로 느껴졌다. 아마 연애의 참견이나 썰 관련 사연을 자주 보는 사람으로서 느꼈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등장할 법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결말이 다소 의외이기는 했지만 인물들의 실행력과 결과에 나름 통쾌하기도 했다. 특히, 인물인 유리와 경윤의 말투가 독특했는데 이 지점이 나름의 웃음 포인트이다. 이 지점 또한 사이버와 연관이 된 느낌이 들었다. 메타버스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상상력이 형편없어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읽었다.
세 번째 작품은 <바람과 함께 로그아웃>이다. 주인공인 도깨비는 메타 월드에서 요굴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요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렇게 요원으로서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반된 감정을 가진다. 현실에서의 돈과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사실 사이에서 고민을 하지만 결국은 현실에 타협하려고 노력하는 도깨비의 심리와 요굴에서 받는 또 다른 제안과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읽는 내내 좋아하는 게임들이 뒤섞여 떠올랐던 작품이었다. 도깨비가 새로운 무기로 꺼낼 때마다 자연스럽게 메이플 스토리의 장비창에서 새로운 무기를 장착해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또한, 서든어택의 요원이 되어 저격 포인트를 삼고 있었다. 요굴에서 보스의 존재를 찾고, 뭔가 퀘스트를 깨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는 점에서 실제로 도깨비를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메타버스 세계관 자체가 뚜렷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또한 존재했다. 첫 번째 작품이 영화로 표현이 된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 작품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실제 게임처럼 표현이 된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감이 와닿았던 두 번째 작품을 제외하면 부족한 상상력의 한계를 너무나 명확하게 느껴졌던 소설집이었다. 아무래도 메타버스라는 단어 자체의 무게감이 꽤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들이 구현한 세계관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자 2D 수준의 만화책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지점은 두고두고 개인적인 아쉬움으로 자리 잡게 될 듯하다. 그러나 마치 게임의 유저가 되어 스토리를 읽는 것에 새로운 매력을 느꼈다. 제목과 다르게 먼 세계처럼 느껴졌지만 인물들의 이야기만큼은 가까웠던 이야기들이어서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