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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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니까. 책에 있는 대로 안 하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려는 거야?  책에서 봤어.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해.“ - 톰 소여

 

마크 트웨인의 전설적인 이 소설이 그 알려진 명성만큼이나 읽혔을까? 톰 소여의 모험이 출간되고 8년 후인 1884년 영국과 캐나다에서 출간되었으니, 140년이란 시간을 지나온 작품이다. 몇몇 평자들은 톰 소여(Tom Sawyer)’란 인물을 자유와 절제를 잇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이라 말하고 있지만, 나는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의 반대쪽에 선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옹호하는 순응주의자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나의 판단은 수정된다. 이 소설은 톰 소여의 모험, 미시시피 강의 생활과 함께 미시시피 3부작을 완결하는 작품으로,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인 허클베리 핀(이하 허크로 표기함)’의 문명에 떼 묻지 않은 자기고유의 화법과 지배질서에 호응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유, 즉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통해 변화된 세계를 상상케 하는 세 작품 중 단연 으뜸이라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처럼 모험(adventure)'은 물리적 여정이기도 하지만, 소년 허크가 기성사회의 인식들을 돌파하며 사유의 성장에 이르는 여정으로써의 의미로 해독해도 될 것이다. 술주정뱅이며 난폭한 아버지로부터 방치된 허크는 왓슨 아줌마와 더글러스 과부댁, 두 여인에 의해 양육된다. 철저한 교조적 신앙인인 개신교 신자 왓슨 아줌마나 일상의 행위와 언어예절을 주입하는 더글러스 과부댁의 엄격한 훈육은 기성질서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다. 허크는 그녀들의 말과 행동이 현실에서 수시로 모순으로 충돌하며, 때론 거짓이자 위선임을 느낀다. 그렇다고 막무가내 식 반항으로 상대의 마음을 고의로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네들에게 상처나 손실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하는 인물이다.

 

허크에게는 6,000불이라는 큰 금액의 재산(富者로 불릴 만큼)이 있다. 새처 판사가 이를 맡아 막대한 이자놀이를 하고 있으나, 허크는 이 재화에 관심이 없다. 방탕하고 불성실하게 살아가던, 행방을 알 수 없던 아버지가 허크의 재산에 관한 소문을 알게 되자 돌연 나타나 아이를 위협하고는 마을 외곽 숲속 오두막에 납치하여 가둬두고 돈의 갈취를 위해 이용한다. 이제 그야말로 모험, 즉 위기와 온갖 장애를 뚫고 어떤 과업을 성취하는 활동이 시작된다. 불량한 폭력으로 아이를 구속하고 억압하지만 허크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로 숲속 생활은 퍽 즐거운 편이었다고. 과부댁한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 알량한 문명에 길들여지길 원치 않았으니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두 부인의 문명의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그러나 오두막에 감금된 채 폭력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활을 계속 버텨낼 수는 없다. 소년은 탈출을 위해 감쪽같은 방안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다.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듯한 죽음의 흔적들로 위장하고는 뗏목을 이용해 탈출한다. 그리고는 그의 시체를 찾기 위해 숲과 강을 수색하는 마을 사람들을 숨어 관망하며 어른들의 무력한 행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숨어 지내는 작은 잭슨 섬에서 왓슨 아줌마의 노예 검둥이 짐을 발견한다. 짐은 허크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게 된 사연을 말한다. 자신을 뉴올리언스에 800불을 받고 왓슨 아주머니가 노예 장사꾼에게 팔아버리기로 한 것을 듣고는 불가피하게 탈출했음을. 허크와 짐은 이곳을 벗어나야만 하는 각기 다른 동기에 의해 의기투합한다. 노예제도를 폐지한 마을을 향한 미시피강을 따라 흐르는 탈주의 여정, 모험은 이렇게 항해의 닻을 올린다.



이 모험의 여정에서 강과 마을과 숲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군상들, 그리고 무엇보다 백인 소년과 검둥이 노예라는 신분의 엄격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배려와 신뢰, 검둥이에 낙인찍혀있는 온갖 부정과 편견의 언어들과는 다른 동일한 인간임을,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라는 또 다른 사유의 언어를 배운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슬쩍 빌려오는 것과 훔치는 것의 차이에 관한 짐의 최종결론에 허크의 공감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이다. 훗날 갚겠다는 생각만 갖고 있으면 슬쩍 빌려와도 괜찮다는 허크 아버지의 말과, 그건 훔치는 짓을 좋게 표현 것에 불과하다는 과부댁의 말에 대해, 두 말 모두 맞는 구석이 있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다시는 빌리지 않는 것이라며, 그 둘은 오히려 자신들이 지닌 것에서 무엇을 뺄 건지, 포기할 것인지를 밤새워 얘기한다. 새로운 윤리의 감각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이들의 대화는 톰 소여의 교과서적 언어와 행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서 속 솔로몬의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판결의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짐은 대뜸 솔로몬의 행동은 분별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며, 그 말싸움은 애초에 반쪽짜리 어린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그릇된 것이라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솔로몬이 자란 배경과 관련된 것으로, 새끼가 한 500명쯤 되는 솔로몬에게 애새끼 하나쯤은 더 있거나 없거나 대수롭지 않았기에 할 수 있었던 무감각의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허크는 속으로 말한다. 이런 검둥이를 본 적이 없었다고. 허크가 이 일화를 쓰고 있다는 자체가 그에게 이 이야기가 또 다른 하나의 윤리적 감각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이러한 긍정적 상호교감으로부터의 배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의 소리, 내면의 응시를 통한 사유의 성장도 발견할 수 있다. 노예제가 폐지된 마을이라 알려진 장소에 가까이 이르자 불현 듯 허크의 내면에 상반되는 양심의 소리가 들려온다. 왓슨 아줌마의 노예인 짐의 탈주를 돕는 것은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이기에 짐의 도망을 밀고해서 아줌마에게 그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목소리와, 도련님이 없다면 전 자유의 몸이 될 리가 없었을 거라며 늙은 짐한테 하나밖에 없는 백인 신사이자 친구라는 의리의 목소리다. 결국 허크의 목소리에는 이런 물음이 남겨진다. 짐을 남의 손에 넘겨준다면 지금보다 내 마음이 더 편할까?” 결코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을 허크는 알았다.

 

두 사람은 도주의 여정에서 두 불한당을 만나게 되는데 자칭 공작과 프랑스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이다. 이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채 뗏목에 동행하게 되는데, 우연히 한 작은 마을의 모두에게 존경받는 피터 윌크스란 인물이 막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이때 두 사기꾼은 망자의 형제로 위장하여 고인의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너무도 그럴듯한 언변과 연민과 배려로 가장한 행위들에 마을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지만, 마을의 의사는 이 둘이 고인의 형제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이때 사기꾼들이 하는 말은 군중의 어리석음에 대한 정치적 일갈로 들린다. 그 망할 의사 놈! 그까짓 놈 신경 쓸 거 없어. 이 마을 바보 놈들이 전부 우리 편을 들어주잖아? 게다가 어떤 마을이든 잘 난 놈들보다 바보 놈들이 절대적으로 많거든.”, 사실의 진위에 대한 숙고 없이 그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맹목적으로 확신하는 우중의 경향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허크는 이 악당들의 군중에 대한 이해로부터 세태의 지성과 윤리의 몽매성을 체득했을 것이다.

 

이렇게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 유유한 자연과 자유로운 흐름 속에서 허크는 그만의 세상에 대한 통찰과 윤리의식, 사유의 방법을 체화시켜나간다. 비교적 어떤 에피소드보다 긴 묘사를 담고 있는, 몇 푼의 돈을 위한 악당들의 밀고로 짐이 한 마을 사람에게 붙잡혀 감금되자 짐을 탈출시켜 자유를 주기위한 마지막 모험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허크는 그곳이 펠프스 농장임을 알아내고, 과감하게 찾아간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있을까. 허크가 마주하게 된 사람들은 톰 소여의 이모 집이다. 마침 톰 소여가 오기로 되어있던 차에 허크가 도착한 것인데, 샐리 이모는 허크를 톰으로 알고 기쁨으로 맞이한다. 난처해진 허크는 톰 역할을 함으로써 위기에서 빠져나오지만, 톰은 어쨌든 조만간 도착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허크는 도래할 상황의 위기를 차단하기 위해 톰을 마중 나가 사연을 전해주고 진짜 톰을 톰의 동생 시드로 하기로 말을 맞춘다. 그리고는 짐이 갇혀있는 움막을 알아내고는 그를 구출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이 작업은 그야말로 지배질서인 권위와 실체적 실용의 언어와의 대결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의 장면을 보면 이렇다. 열쇠로 굳게 잠긴 움막으로부터 짐을 빼내기 위해 밖에서 구덩이를 파내 움막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것인데, 이때 허크는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파내자고 한다. 이에 톰이 하는 말은 걸작이다. 죄수가 땅을 파기위해 곡괭이니 삽이니 하는 최신식 장비를 옷장 속에 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니?”

 

소설 등 책에 쓰여진 것만이 권위를 지닌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톰의 말은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이 멍청한 소리에 허크가 항변하지만,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게 올바른 방법이니까. 그리고 그게 정석이야.”로 돌아온다. 결국 둘은 합의하여 작은 손칼로 파기 시작하는 데 그것이 하세월(何歲月)이다. 책 속의 지식만이 정석이라는 말. 그 텍스트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만이 올바르다는 생각, 이것은 권위에 대한 맹종의 표현일 것이다. 허크의 생각은 이렇다. 권위자들이 그걸 뭐라고 생각하든, 난 쥐똥만큼도 상관 안 해.”, 그러면서 톰은 언제나 원리원칙을 굉장히 중요시한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그런데 이 교조적이고 권위에 순응하는 태도와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행위는 그 결과에서 조금 다른 상황을 만들어낸다. 잘난 체 하는 지식인 양 구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쓴 도덕적이고 교화적인 글과는 상반된 비도덕적 행위를 얼마나 수없이 저지르는가는 구태여 예시할 필요도 없이 흔하디흔하다. ()가 읽은 소설 속 죄수의 탈출 야야기 속의 세세한 묘사들을 그 맥락과 어떠한 관련도 없이 그대로 현실에 답습했을 경우 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현실과 괴리된 자취들, 그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흔적에 당황하게 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톰 소여를 온전히 권위 순응적 인간으로 이해한 내 인식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는 텍스트, 즉 교양이라는 덕목을 거의 완전하게 실천함으로써 그것들의 진실을 신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거의라는 말은 허크의 실용적, 체험적 수정에 의해 핵심 구조를 잃지 않으면서 도구적 수정을 가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어쩌면 참된 지식이란, 하나의 양식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현실의 양식에 의해 가변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지만 지배질서에 대한 격변 또는 혁명을 얘기하는 것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불의와 모순들에 대한 시정, 피부색을 뛰어 넘는 인간 동류에 대한 연민과 양심과 윤리의 목소리에 대해 새로운 언어,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평의 확장을 제시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들의 세계는 온통 동일성의 기획에 매몰되어 있다. 온갖 좋아요가 난무하고, 매끈한 세계만이 흐른다. 소통 망에서는 이질적이고, 낯선 언술은 거부, 회피, 외면되고, 동일한 긍정의 목소리만 메아리친다. 오늘의 사회에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화법은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의 목소리가 제거된 곳에 전체주의 목소리만 맴돌고, 어느덧 지배적 권위에 복속된 동일자들의 지옥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야생의 소년, 자유를 항해하는 소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바로 이러한 동일자의 지옥으로부터 탈출의 이야기다. 마크 트웨인의 이 소설이 고전적 지위를 지닌 것은 인간과 인간사회를 끊임없이 자극할 새로움의 변주를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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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감상 글은 절판된 펭귄글래식 세계문학 판본, 그리고 민음 세계문학 및 문예출판 세계문학 판본을 저본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인용 문장은 세 권 모두에서 임의로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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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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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성향의 존재들일까?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이 우리들과 사회가 막 통과해온 산업사회, 즉 엄격한 규율로 통제되던, 산업노동에 적합하게,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몸짓으로 훈육되고, 규율에 의해 금지와 억압에 익숙해진 존재들이었다. 때문에 자본과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기에 속박된 자유를 더욱 극명하게 느껴야했고, 자유는 항시 인식되는 언어이자 개념이었다. 그런 까닭에 저항할 대상이 있었으며, 혁명의 언어가 존재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11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어떤가? 신자유주의가 거세게 세계를 장악하고, 산업사회는 디지털 정보사회로 전환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사람들에게 내면화시킨 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kt)로서 무한한 자기 생산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자유롭게 경쟁에 참여하는 성과(成果) 주체라는 것이다. 프로젝트 자아라는 것은 성과와 최적화를 강요하는 형식으로 작동하는 내적 강제와 자기 강제에의 예속을 의미한다.

 

1. 자유 없는 자유의 환상 - 자발적 착취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역할을 강요한다.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는까닭이다. 그 어떤 주인에도 묶여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지 않으면 성과경쟁에서 낙오하기에 끊임없는 자기 착취에 내몰린다. 자유라고 여겼던 것이 절대적 자기 노예화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외관은 타자에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이란 없음을 선언하지만, 모두를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다. 신자유주의란 바로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기이한 경영자의 고독이며, 이것을 생산양식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기괴한 변종이다.

 

공산주의를 실험하던 국가들의 붕괴 때문에 공산주의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독재가 불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적대하는 계급투쟁 시스템이기를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매우 영리한 시스템이다. 실패하면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착취적 지배질서이기에 사람들의 공격성은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자신을 착취한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되지 못하고 우울증 환자가 되고 만다. 이렇듯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욕구를 개인 자신의 욕구라고 착각하게 하여, 스스로 예속화되어 자기 착취를 강제하는 손 안 되고 코 푸는 시스템인 것이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고도의 자유에 의존한다.(...) 디지털 빅브라더는 자신의 일을 수용소 주민들에게 떠넘긴다.” -20

 

사람들은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 지배질서 하에서 무한한 자유 속에 있다고 여긴다. 여기에 사회의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서로 격렬하고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환경을 마련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수많은 개인 정보를 소셜네트워크에 흩뿌리며,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고 느끼며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먹은 것, 여행 한 것, 순간의 감정 상태, 취향과 소소한 사생활의 편린들에 이르기까지 까발리고, 좋아요와 팔로우를 누르며 자기 조명과 자기 노출을 드러낸다. 산업사회인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은 일일이 시각적으로 이러한 개인들을 감시했지만, 보이지 않는 디지털 파놉티콘인 웹과 앱의 세계는 그 어떤 시각적 제약도 없으며, 하물며 빅데이터에 의한 디지털 파놉티콘 주민들의 내적 욕구까지 파악한다. 빅테이터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기록된 사람들의 행동과 무의식적 행위까지 감시하고 관찰한다. 이제 디지털 정보사회는 별도의 감시자 없이도 참여자들의 자발적 감시에 의해 작동하게 된 것이다. 데이터는 그 어떤 강요도 없이 주민들 각자의 내면적 욕구에 따라 빅브라더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사회는 이렇게 투명해진다. 이곳에서는 폐쇄성과 내면성은 거부되고, 개방적 투명성만이 환영받는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과 생산성의 가속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기에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되고 배제, 제거된다. 이렇게 투명성의 경제는 불일치를 억압하고, 평준화를 촉진하며, 획일화한다. 이러한 지배기술을 가능하게 한 것은 피지배자를 예속시키기 위한 성물(聖物;Devotionalie)인 스마트폰의 광범위한 보급이다. 지배는 감시업무를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효율성을 제고하는데, 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도구이자 고해실로써 그 기능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 된 것이다!

 

2. 신자유주의 심리기술 - 자아 최적화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정보사회의 동력은 이렇듯 자유를 적극 긍정, 옹호하며, 점점 더 허용의 형식을 취한다. 너그럽고 친절하고, 부정성을 집어던지고 자유의 모습을 띤다. 오늘의 지배질서인 신자유주의는 이처럼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기에 사람들에게 그 어떤 권력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예속된 주체들은 자신들이 예속 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스마트 권력은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이며, 긍정적 감정을 일으켜 의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는 주체의 욕구에 부응하려 애써 바로 그것을 착취한다. 오늘날 자유의 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자유를 부정하기보다 자유를 착취하는 권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호감을 사고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작동하는 체제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래서 좋아요-자본주의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억압과 폭력의 규율권력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소비자본주의, 디지털정보 사회로 자본주의의 부정성을 긍정성과 투명성, 외형적 자유주의 사회로 탈바꿈했다. 긍정성, 투명성, 자유로움 등, 친근하고 유혹적인 모습은 사람들로부터 억압과 통제의 대상을 잊어버리게 했다. , 인간 내면을 장악하여 심리적이고 심리정치화 함으로써 그 동력을 개개인 스스로에게 떠넘기는 영리한 체계가 되었다. 이것을 작동케 하는 주요소를 심리기술과 자아기술이라 부른다.

 

사람들을 충동에 조종되는 미숙한 동물로 만들어 대중의 퇴행을 초래하는 원격지배적 프로그램을 심리기술이라 하며, 자신의 행동규칙을 공고히 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모시키고 자신의 특수한 존재에 수정을 가하여 삶을 일정한 미적 가치와 수준의 스타일을 갖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수행하는 의식적이고 의욕적 실천을 자아 기술이라 한다. 산업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권력기술이 심리적인 자아기술로 전환된 것이다. 이 매끈한 신자유주의 기술은 그 어떤 충돌의 지배권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자발적인 무한한 자유 속에서 활동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자기 경영자가 된 사람들은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를 위해 자기통제와 자기착취를 통해 성과주체로 활동한다. 신자유주의 지배질서는 바로 이 두 기술을 완전히 포섭한 체계이다. 개개인들은 이렇게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자유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자기착취는 하나의 동일 개념이 된 것이다. 너무도 세련된 신자유주의의 자기착취의 형식은 자아 최적화라는 이름으로 자기계발 - 자기관리 워크숍, 모티베이션 주말 워크숍, 인성세미나, 멘탈트레이닝 등 - 이라는 끝없는 자기 효율성 향상의 과실을 거의 아무런 자원도 들이지 않고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비교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켜 시장 논리에 종속시킨다. 인간조차 양화(量化) 가능한 사물화 함으로써, 철저히 상품화 한다. 나는 효율과 성과의 이름으로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를 주문하는 자기계발서들의 흉물스러움이 결국 인간 정신의 착취를 통해 인간들을 파괴하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자기검열, 자아를 대상으로 하는 이 끝없는 자기 최적화는 자기 자신을 적대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싸움을 강제한다. 마치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처럼 활동하면서 무한한 성과와 자아최적화의 복음을 설교하는 미국산() 개신교 목사들의 천박하고 사악한 설교와 닮아있다. 참으로 불쾌한 인류 악이다!

 


인간 인격을 긍정성의 경제에 완전히 묶어두려는 신자유주의의 자아최적화라는 긍정성 강제의 통치술은 인간을 파괴한다. 인간은 결코 긍정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아니요라고 말함으로써 삶의 생동(生動)력을 획득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인간에게 고통과 반항은 영혼에 긴장을 선사하는 삶이라는 경험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 긴장에서 강인함, 견뎌냄, 창의성과 용기, 위대함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긍정성을 지배교리로 하는 심리정치의 질서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는 싫어요가 없다. 오직 좋아요와 하트라는 영혼에 아첨하는 누름만 있다. 친절한 빅브라더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아낌없이 데이터와 정보를, 그리고 자신의 행동 자취를 넘겨준다. 사람들은 이 디지털 파놉티콘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 자유의 감정이 바로 이 시대의 심각한 문제이다. 존재하지 않는 빅브라더는 빅데이터라는 주체없는 존재로써 결코 종용하지 않은 파놉티콘 주민들의 자발적 자기 착취를 통해 거의 무제한의 재화를 얻는다.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통제장치는 가공할 만한 효율성을 자랑한다. 케케묵은 오웰식 감시사회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이체로서 심리에서 생산력을 발견하는 체제이다.” -41

 

신자유주의의 주요구성 성분인 소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산업자본주의의 상품을 팔지 않는다. 의미와 기분을 판매하고 소비한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성과 성과를 높이기 위해 기분이라는 자원, 즉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원한다. 이것이 오늘의 시대를 감성자본주의라 부르는 이유이다. 기분이라는 감성을 촉진하는 것은 소비 극대화에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인데, 사물이 인 기분을 소비하게 할 때, 그것은 무한히 소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감성 디자인이라는 이 영악한 감각도 소비극대화를 위한 표본적 기분을 모델링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도사린 문제는 이것이다. 기분이란 반성 이전의 층위, 다시 말해 행위 하는 인간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반()의식적 신체적 충동적 층위에서 비롯된 행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성이 개입하기 전에 빼앗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판매소비기술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심리 정치적 통치술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의 전형적 실례(實例)가 될 것이다.


3. 감성자본주의와 데이터주의((다타이즘,Dataismus)


감성자본주의는 기분을 자원화 하는 것 이외에 또 하나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노동의 게임화. 게임은 노동을 감성화하고 극화(劇化)하여 더 많은 모티베이션(동기,자극)을 생성한다. 신속한 성과와 신속한 보상 시스템으로 더 많은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거의 모든 상품, 서비스 주체가 노동을 게임화 하여 자발적 참여자를 끌어 모으고 즉각적 보상으로 유인한다. 이제 놀이의 고유한 정의인 노동과의 단절을 전제로하였던 놀이가 노동의 지배 메커니즘에 예속된 것이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도 좋아요, 팔로워의 숫자처럼 보상의 논리에 따라 게임화되고 있다. 인간적 커뮤니케이션은 이렇게 파괴되고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상업화의 시선을 피해가지 못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어떤 시체가 사회를 지배한다. 그것은 노동의 시체다.”라고.

 

인간의 의식조차 되지 않는 모종의 애착과 욕망들, 그냥 그럴 뿐인 것들, 의식적 자아에 잡히지 않는 무의식, 빅데이터는 이것들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이를 착취하는 심리정치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92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기술들, 이 모든 것은 빅 데이터로 귀결, 수렴된다, 이제 빅테이터는 인간 행동들을 감시, 통제하는 것을 넘어 심리정치적 조종의 대상으로까지 이용된다. 미국의 빅데이터기업 액시엄(Asxiom)의 광고문구는 우리는 당신의 고객에 대한 전방위 시선을 제공합니다.”라며 사각지대가 없는 모든 시야에서 인간 개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 행동양식을 제공한다고 선전하는 것은 그 예이다. 이른바 데이터주의(다타이즘,Dataismus)’의 대두이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측정해야하고, 이러한 데이터는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걸러내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로써 인간행동의 미래를 예언하는 놀라운 능력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장의 토대를 이루는 생각은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면 이론 따위는 불필요하고, 데이터만으로 명확한 지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숫자가 모든 걸 말해준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 세계의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막론하고 변증법이라는 치명성이 예기치 못한 돌발적 상황을 낳지 않았던가? 18세기 계몽주의가 출현하면서 직관과 주관성을 여지없이 깨부수며 객관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설레발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이성은 퇴조하고 감성의 시대이지 않은가. 나아가 이를 하나의 도구로 한 데이터 물신주의가 들어서 디지털 계몽주의를 부르짖으며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지 않은가.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육체성과 욕망을 억압하던 시대는 저물고, 그 어떤 이성도 지식도 불필요하다며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인간과 사회의 행동을 예언하고,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인 것은 인간 삶의 무수한 의미들과 인간적 인식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한다. 단지 수치(數値)와 계산을 통해서 아무 맥락도 없는, 의미가 공허한 삶의 계측자료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데이터에는 의미인 이야기가 부재하다. 다타이즘에는 그 어떤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셀프 트레킹(self-tracking)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반론은 어쩌면 궁핍에 내몰린 인간의 가느다란 마지막 하소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타이즘의 데이터 성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천한 야만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양화된 인간으로부터 그 어떤 자아도 발견할 수 없다. 온갖 데이터로 분해된 의미의 진공 상태일 뿐, 망상적인 또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이러한 항변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의 시대에 인간 모두가 디지털의 총체적 기억 속에 갇히고 있음은 분명한 현실이다. 인간의 인터넷이었던 웹 2.0의 시대는 저물고 사물의 인터넷인 웹 3.0으로 확장되어 디지털 통제사회는 완성되어가고 있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을 가능하게 만든 세계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일상 용품에 인터넷 주소가 주어지고, 사물들 자체가 능동적으로 정보 전송자가 되어 인간의 삶과 행위, 습성을 보고하고 있다. 빅데이터는 오웰의 빅브라더와 달리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끊임없이 덧붙여지는 데이터 기록으로 인간의 의식적 자아에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까지 파고들어 인간을 착취하는 심리정치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데이터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상품으로 전락하여 거래된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는 인간이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분류 제시되어 있다. 경제적 가치가 가장 낮은 등급은 쓰레기(waste)로 저장되어 있으며, 시장가치가 높은 등급은 슈팅스타(shooting star)로 기재되어 있다, 새로운 디지털 계급이 만들어진 것이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바놉티콘(banopticon)’이 되어 경제적으로 무가치한 인간들을 쓰레기로 낙인찍어 폐기처분하는 기구로 역할 하는 세계가 되었다. 이미 각종 금융시스템에는 불청객으로 낙인찍힌 인간 쓰레기등급들에게 그 어떤 신용대출도 허락되지 않는다. 빅데이터에는 개념도 없고 정신도 없다. 사물에 내재하는, 사물을 그 자신으로 만드는 근거인 개념이 없다는 것은 절대무지를 의미한다. 빅데이터, 데이터주의자들은 바로 이 절대무지를 절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빅데이터가 추종하는 믿음이 얼마나 공허한가는 통계학의 본성을 꿰뚫어보면 그 무지가 드러난다. 통계학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위대한 인물들 대신 엑스트라들만 고려하는 체계이다.” 다시 말해 거대한 군중의 움직임을 중요하고 주된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모든 역사 서술에 대한 몰개성적 해석을 씌우는 작업이며,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할 뿐이다. 통계수치란 인간이 점점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심리정치 세계의 특징인 투명한 정보사회의 특징적 현상이 획일화인 것에 완전히 일치한다. 빅데이터는 신자유주의가 도달할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불일치를 제거하여 매끈하게, 순응하는 동일한 것들로 만듦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가속화, 성과의 고효율화를 달성한다.

 

4. 결 어 - 이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신자유주의 디지털 정보사회가 내적 강제와 자발적 착취에 기초한 체계이며, 자유가 부재한 세계를 자유로 생각게 하는 심리사회라는 것, 또한 인간을 비롯한 유무형의 모든 존재가 거래대상이 되어, 존재 의지와 앎이 말살된 절대무지를 지향하는 종교화된 다타이즘의 세계임을 알아보았다. ,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지금 이러한 실상임을, 나아가 이것이 더욱 완벽하고 공고화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사회의 완성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저자 한병철은 자아기술, 심리기술에서 벗어나 삶의 기술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기존의 언어 사용자의 의지에 반하는 언어의 사용과 언어 기능의 변환을 마련해야 하고, 이를 통해 세력관계를 역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세력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며, 언어 기능의 변환인가?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보 노릇하기는 언제나 철학의 기능.”이었다며, 새로운 표현 방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철학은 본래 바보였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이 구체적이고 실천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묘사한 허클베리핀만한 인물이 없을 것 같다. 허크는 기성의 언어, 어른들이 사용하는 사유와 언어화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허클베리핀)는 개신교(종교)의 허위, 흑인(검둥이)의 상품거래, 양심의 문제, 선택의 윤리에 있어 오직 그만의 창조적 방식으로 사유한다. 그럼으로써 완전히 다른 결론에 이르고, 그 백치 상태 속의 사유가 기성의 지배질서에 예속되지 않는, 전에 없던 유일무이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아마 한병철과 들뢰즈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바보의 어리숙함, 어떠한 명증성도 원하지 않으면서 부조리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치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 조종 가능한 심리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테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디지털정보사회는 아마 이러한 바보를 결코 용납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다른 화법의 언어사용은 강력한 면역적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억제 대상이 증가할수록 그 실효성은 점차 감소할 것이다.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에 반응할 때 최대속도에 도달하는 것을 바보들이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자의 지옥 속에서 최고 속도에 도달하는신자유주의 시스템은 더 이상 순응하지 않는 이단자들로 인해 작동이 멈출지도 모른다. 네트워크에 낚이지 않는 자,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는 자가 바로 바보들이다. 합의의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자들, ‘아니요를 힘차게 외치는 자들, 지혜로운 바보들만이 이 세계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탈 예속화, 탈 심리화, 측량할 수 없는 부정성의 세계를 기획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프로젝트 자아, 진짜 자유의 인간들로 들끓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책,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 통치술은 신자유주의, 디지털 정보사회가 오늘날 우리 인간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그것의 특질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압축되고 간결한 언어로 펼쳐 보이는 책이다. 알지도 못한 채 자본의 하수인, 자본의 팔루스(phallus)로 전락한 오늘의 우리들을 잠에서 깨워댄다. 그만 잠자고 빨리 일어나라고. 곧 살아있는 죽은 자가 될 수 있다고. 벌써 출간된 지 10여년이 지났건만 후려치는 저자의 채찍질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혹독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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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 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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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권력관계의 본성과 정치 동역학에 관한 적합한 인식의 구축을 위한 저술로써,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상을 조금은 더 밀도있게, 또한 여러 범주의 국지적 사회현상들로까지 생각을 넓혀나갈 수 있도록 그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하의 글은 책의 리뷰가 아니다. 다만 헤게모니 관계라는 언어의 정의에 멈춰 서서, 순간 내게 스친 느낌을 기억의 방편으로 기록해두고자 함이다.

 

헤게모니는 결정 불가능한 지형에서 이루어진 결정에 관한 이론이다.”

 

헤게모니 관계란 여러 실체적 세력 사이의 관계, 근본적으로는 저마다의 특수한 담론을 지닌 세력들이 집합을 이룰 때, 공동체 총체성의 대표를 자임하는 어떤 헤게모니적 보편성과의 접합적 관계이다. 이를테면 이익과 추구하는 목표 또는 목적이 다른 여러 집단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어떤 뚜렷한 하나의 적대, 즉 그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적대화 할 이유가 있는 세력에 대항하여 뭉치기로 했다고 하자. 그것 -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내건 집단내() 보편성을 획득한 담론 - 이 천박하건, 저열하건, 매국적이건 비민주적이건 반()법치주의건 아무튼 그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내란 옹호라고 하자. 이것을 이들 공동체가 하나의 보편적인 대표 담론이라고 설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세력들 간에는 자신들 고유의 특수성이 있다.

 

극우의 헤게모니 관계, 그 한계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기초한 종일(從日)세력,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하는 기업과 자본 등 경제세력, 중국,북한 등을 적대화 함으로써 안보를 인질로 하여 정치적 이익을 취하는 세력,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일군의 엘리트 집단화한 사법, 검찰 등 법검 카르텔, 종교를 표면에 걸고 사적 이익에 골몰하는 사이비종교 세력들은 고유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대표 담론화한 헤게모니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헤게모니는 사실 매우 불안정한 것이고, 각 세력의 특수성에 비해 비항구적이며 비 결정적이다. 이질적 군집이 보편적이라고 내건 내란 옹호의 기치는 언제든 폐기 될 수 있으며, 붕괴될 수 있는 것이다. 헤게모니가 결정 불가능한 지형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왕 예를 들었으니 이 예를 사용해 이어가보기로 하자. 이 기이한 공동체를, 이 사회는 극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극우의 통상 개념과는 전혀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 바로 극우로 퉁 친 이 집단이 오합지졸의 잡동사니가 모인 것이기에, 그것들의 특수성이 모두 다르고, 그 다름에서 터무니없는, 즉 극우가 하는 행위와는 동떨어진 행위가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을 조금 고상하게 정리하면 결절점(주인 기표)은 일정한 담론 영역 내에서 보편적 구조화 기능을 떠맡는 특수한 요소에 대한 통념을, 그와 같은 기능을 사전에 결정하는 요소 그 자체의 특수성 없이 수반한다.”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사실 지금 극우로 불리는 이합집산은 애초에 내란 옹호라는 주인 기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에는 각 잡다한 세력들의 특수이익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들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담론으로 헤게모니를 취득한 것이다. 모든 세력들은 이 헤게모니와 접점을 이루며 어느 순간만큼 행동한다. 즉 내란 옹호에 자신들을 동일시하여 그 범주의 중심성을 확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의 특수성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내뱉는 언어의 중심성 없는 기괴한 담론들 자체가 스스로 입증한다.

 

영토주권을 부정하는가 하면, 헌법전문의 정신과 기본권 조항조차도 부인하고, 국민주권마저도 부정한다. 특권과 권위의식을 내세우고. 기득권의 공고화와 사적 이익의 극대화 및 영속화를 위해서는 국가를 팔아먹고, 국민을 노예화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 집단외() 국민 성원 일반을 적대화하고 협박과 폭력도 당연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들은 그것들이 주장하는 우파 또는 보수적 가치와는 단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 극우나 극보수라는 표현은 결코 타당한 명칭이 아니다. 그저 내란 획책 세력일 뿐이다. 상업언론, 일컬어 종편(채널A, TV조선, YTN, 매경TV )채널로 불리는 미디어들과 조중동을 비롯 종교를 배후로 한 언론(국민일보, 세계일보, CBS ), 대기업자본가를 배후로 한 언론(한국경제 etc.)등 현재의 한국 언론세력은 그것들의 성분이 애초에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기에 사적 이익추구가 우선인 일종의 마케팅 또는 광고 선전 도구일 뿐이기에 내란 옹호세력이란 딱지를 붙이기보다는 우호적, 중립적인 극우를 자신들의 언어로 대표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 있다. 내란 옹호가 헤게모니 중심이 된 것은 바로 헤게모니의 조건인 구조적 결정 불가능성에 의존하기 때문인 것을. 그런데 이를 상세히 들여다 볼 이유가 있다. ‘내란 옹호라는 헤게모니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특수성, 영구집권 획책이라는 특수성, 경제적 이익추구라는 특수성, 종교의 영역확장을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처럼 이 특수성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보충적이다. 어제까지 사회적 적대자로써 저마다의 내적 경계를 예리하게 하던 것들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등가관계를 수립하는데 내란 옹호에 헤게모니를 잠정적으로 내어 준 것이다. 이익이 합치된 것이다.

 


하지만 이 등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관계 속에도 전선(적대의 경계)은 잠복하고 있기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은 이것을 결코 놓을 수 없다. 수구를 표방하던 정당이 극단적 우경화로 선회하여 내란 옹호를 외치는 것은 이러한 권력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목소리를 줄이거나 철회할 경우 헤게모니를 잃을 뿐 아니라, 오합지졸 군집의 분열과 해체가 너무도 분명히 보이는 까닭이다. 하나의 집단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서로의 변절주의적 특수성을 넘어 사슬(chain)의 총체성을 대표할 하나의 무엇인 주인기표를 내란옹호, 계엄옹호, 대북, 대중 적대화 선전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기호로 인해 자신들 본체의 특수성을 변형시킨 세력들도 있을 것이다. 내란 옹호의 기치아래 결집한 이 세력들의 특수성은 서로 이질적이며, 아주 다르다. 상호 통약 불가능한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뭉쳐있다. 이것이 헤게모니-관계의 투명한 본질적 모습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내세운 보편성을 오염된 보편성이라고 부른다. 보편성이 애초에 오염된 것이니 관계들 간에는 해소할 수 없는 긴장이 존속한다. 다시 말해 헤게모니 관계의 기능은 항시 불안정하고, 저마다의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가역적이다.

 

여기서 그것들의 필연적 분리와 해체는 오염된 보편성의 내용을 처단하는 것임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내란 획책의 법 절차적 처벌선언, 외란 즉 대북자극을 통한 전쟁 획책 규명,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들의 사슬을 잘라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자신들의 특수성을 후퇴하면서까지 연결하게 자극된 요소, 즉 사적 재화, 권력의 자리, 국부(國富,정책의 자의적 변경을 통한)의 접근이 주요한 헤게모니 접점일 것이다. 이것의 신속한 처리의 책임이 바로 특검이다. 만일 이조차 오염되어있다면, 극우는 당분간 더욱 극성을 떨어댈 것이다. 그러나 헤게모니 관계의 본질상 취약하고, 붕괴되기 쉽다.

 

진보, 좌파 진영의 책임 - 민주주의는 적대의 명료화에 기초한다!

 

그런데 오늘, 수구 정치집단이 극단적으로 우경화되고 기형적 색깔을 띠게 된 것은 좌파 진보진영의 안일함이 일정부분 기여한 바가 있다. 그 안일함이란 신자유주의의 승리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이 휘발된 것인데, 소련의 소멸, 지구화과정이 가져온 사회경제적 전환과 정보사회의 출현을 적대들이 사라졌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1990년대 이후 민주화 승리의 도취가 정체성 상실을 가속화 했다. 그래서 상생의 정치니, 중도(온건)좌파니 하며 자신들을 재정의하면서 좌파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이러함으로써 놓친 것이 수구기득권 집단, 즉 신자유주의 소비자본주의 집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오랜 시간을 경과하게 된 것이다. 진보, 좌파 정당이 수구 헤게모니 질서를 전환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잘못된 신념(적대가 사라졌다는) 때문에 합의가 신성시 되고, 좌우경계가 흐릿해짐으로써 수구의 극단적 우경화를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의 선명한 예가 오늘의 담론 속에서 반()자본주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현 경제 질서만이 유일하게 신봉해야 할 절대불가침인 것처럼 간주하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에 어떤 비판을 가하려고만 하면 경색된 머리들은 무슨 엄청난 혁명을 획책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고, 빨갱이 놀음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수구의 프레임에 안주했던 좌파는 따라서 시장 논리에 대한 그 어떤 대안 마련의 노력이 없었기에, 사실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이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 그리고 90년대 이후에 성장한 20,30대의 청년들이 우경화된 것은 이러한 좌파의 안일한 이해에서 자란 것이다. 이제 지구화된 신자유주의에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지구촌 기득권자들의 극렬한 공격으로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것도 동일한 이유에 기초한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이데올로기 지형을 장악하면서 그에 순응하는 것만이 마치 당연한 순리이자 숙명인 듯 되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안일함이 가져온 극명한 귀결이 지금 한국 사회에 나타난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맹목과 무지의 발호이다.

 

죄종적인 화해, 일종의 합리적 합의, 모두를 포괄하는 우리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합리적 논쟁이 이루어지는 배타적이지 않은 공적 영역이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배경이 중요한 것은 현재 이재명 정권이 내건 실용주의 정책노선이 출현한 토대인 까닭이다. 그는 말한다.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인 경제 정책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직 좋은 정책과 나쁜 정책만 있다고. 이 말의 표면은 갈등으로 극심하게 분열된 사회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마치 분열을 봉합하고 모두에게 편익이 두루 미치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말로 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껍질을 한 겹 벗기고 들여다보자,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토대 하에 소비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에 어떤 수정도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신자유주의 대안에 대한 아무런 강구도 하지 않겠다는 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현 정세가 자연스럽고 가능한 유일한 사회질서라는 것이고, 권력관계의 일정한 배치를 변화 없이 이어나가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결국 수구집단이, 유지해 온 프레임의 변경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대단히 우려스러운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체와 소멸되어야 할 집단이 그대로 유지되어서는 그 어떤 개혁도 변화도 없을 것이다. 아마 국지적인 현안 문제들을 능숙하게 해결함으로써 유능한 행정수완가라는 이미지는 부각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대를 부인하는 한 언제든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토대라는 것은 거대한 사슬로 연결된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이러한 실용성의 부상으로만 선의로 저절로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정말 순진한 것이다. 단순히 신자유주의를 좀 더 인간적 방식으로 관리한다고 해서 잠자고 있는 (우파의) 적대가 사라지겠는가? 이는 적대(敵對)의 제거가 불가능한 것대적자(對敵者)의 경계를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발생한 신념으로 보인다. 대적자가 선명하게 설정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문제 해결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갈등과 분할이 없다면 다원적인 민주주의 정치도 불가능할 것이다.

조화는 애초에 달성 될 수 없는 것이다.”

 

적대의 제거는 인간과 인간사회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내란 옹호를 내걸고 뭉쳐있는 일군의 무리들 그것들조차도 서로 적대하는 전선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지금의 여당 또한 서로의 전선을 지닌 파당이 존재한다. 하물며 내란 옹호 세력을 우리라는 모두를 포괄하는 일종의 합리적 합의나 최종적 화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애초의 몰지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대는 인간사회에 상존하는 것이지 결코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재의 정체 역시 적대가 인간사회에 상존하는 것임을 전제하기에 운용되는 제도인 것이다. 만일 적대가 없다면 민주주의 또한 의미를 잃는다. 민주주의란 바로 우리를 부정하고, ‘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를 강요할 경우 바로 윤씨와 같은 계엄과 내란획책을 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것이다. 모두 우리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가짜 모습이며,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상이한 목소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투쟁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정체 제도이다. 이를 부정할 때 독재무리들, 매판, 파쇼 세력들이 발호하고 설쳐대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권력이론이다. 헤게모니 관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통찰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일 이의 작동 상황을 눈여겨 볼 지혜만 있다면 이 혼란한 사회의 탈출구를 찾는데 중대한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정치를 작동케 하는 그 역학적 관계와 권력관계의 본성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등가 사슬을 이루는 그 어떤 세력과의 동행 또는 투쟁이건 반드시 적대의 경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 선명성의 경계로부터 대체 무슨 나라, 무슨 사회를 건설할지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따라서 바로 지금 한국 정치사회에서 긴급하고도 중대한 이해의 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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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 - 가브리엘 르페브르의 그림과 함께 읽는 시
자크 프레베르 지음, 가브리엘 르페브르 그림, 오생근 옮김 / 문학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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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의 가치와 질서에 대한 전복과 위반의 시인으로서, ‘아니요를 말하는 또 다른 유형의 작가에 닿았다. 필경사 바틀비들의 목록을 따라가는 중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화가이며, 시나리오 극작가였던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ert; 1900-1977)’의 이름은 낯설다. 그런데 이미 이 시인의 시()인 가사의 노래를 적어도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알려진 샹송들, 영화 주제가의 시적 가사들이 그의 작품들이었으니 사실 친근하게 우리들과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1946년 작 영화 밤의 문 Les portes de la nuit의 주제가로 무명의 배우 이브 몽땅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줬던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이 소설 매디슨 카운티좁은 부엌 라디오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올 때, 사랑하는 연인을 헤어지게 하는 인생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엽은 말한다. ‘헤어지게 만든 인생보다 그들이 만나 사랑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인생에 감사하다. 이 시인의 시들이 기존의 질서와 규범들에 반기를 들고 거부하는 것은, 자유와 사랑과 생동하는 목소리들이자 감동의 소리이고, 절박한 간절함의 소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세상을 향해 아니요라고 강하게 부정을 외치는 것은 진정한 삶으로의 복귀이며, 생의 환희와 감사의 목소리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시의 작가로 불리듯, 그의 시 작품들은 전통적인 관념적 시에 반기를 든, 평범한 우리네들이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로 씌어 있다. 따라서 시들은 권위에 토대를 둔 모든 고정된 가치들에 반기를 들고 의식의 변화와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이 되려고 노력한 적도, 시인이나 작가 행세를 한 적도 없는 작가로 알려졌듯, 그의 시들은 꿈과 상상과 마음 속 깊이 원하는 것들을 표현할 따름이다. 때문에 모든 시들에 흐르는 정서는 친근하고, 더욱 공감의 깊이를 더하게 해준다. 아마 그의 시작들이 대중들의 노래인 샹송의 가사가 된 것은 이러한 요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선집을 엮을 때 번역자는 시에 표현하고자 한 시인의 마음을 읽기를 원했던 것 같다. 처음 대면하는 시가 마음의 소리이다. 생동하는 목소리, 마음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절대적 소명같은 절실한 소리를 느낄 수 있는 노래하는 건 내 목소리만이 아니지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시의 정의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우리를 넘어서는 보다 강력한 어떤 것을 나타내는 소리로서 일반적 언어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표현이 시임을 노래한다. 시의 세 번째 연을 옮기면 이렇다. 울적한 마음과 더불어 그 마음에 그 어떤 연대감이 아릿하게 저미듯 밀려들어온다.

 

저 새는 나와 함께 노래하지

언제나 언제나 살아 있는

저 불쌍한 소리는 나를 보고 떨고 있지

저 새가 노래하는 모든 것

내가 본 모든 것 내가 아는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말한다면

그건 수다스런 말이거나 불충분한 말이 되겠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지 -마음의 소리3연에서, P24

 

그러나 이런 아픔 또는 슬픔의 정서 속에서도 어떤 밝은 전망, 기쁨의 가능성 같은 것이 함께 느껴지는데, 한 배관공 노동자의 어느 월요일 아침의 전경을 그린 그리고 축제는 계속된다는 딱 이런 느낌이다. 월요일 아침 10시인데 배관공은 정장 차림으로 카페 카운터 앞에서 비틀거리며 자신만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는 술값 계산도 하지 않고 햇빛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다. 나라면 슬픈 축제의 하루라고 제목을 붙이고 싶은 작품이다.

 

나는 작가의 성장기인 어린 시절에 대한 지식이 없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이 그다지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음을 그저 유추해본다. 그는 어린 아이에 대한 보호와 사랑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그러한 따뜻한 관심 속에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불우한 아이들에 대한 이해의 산물일까? 어린 시절이라는 시에는 어린 시절의 시간에 지구는 돌지 않고/ 새들은 더 이상 노래 부르지 않고/ 태양은 빛나지 않으며/ 모든 풍경은 얼어붙은 슬픈 시간들뿐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가하면 깨어진 겨울에서 청춘의 키 작은 남자의 구두끈도 끊어지고, 축제의 모든 가건물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닫히는 그 어느 시점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는 순진하고 비통한 목소리가 / 멀리서 나를 부르며 다가왔네 / 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네 / 가슴에는 별이 반짝이는 그대의 웃음이/ 일곱조각으로 깨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흔들리고 있었네라고 그 시절의 영원히 깨져 돌아오지 못할 시간과 이별했던 기억을 회상한다. 내 어린 시절은 언제, 어떤 장소에서 끝났을까? 그 순수한 생명의 시간이 그저 아득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사랑의 노래가 부쩍 많아 보이는데, 실연의 절망에서부터, 만남의 인연의 소중함, 사랑은 소유가 아닌 자유여야 함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남자의 노래가 그렇고, 나를 만든 건 사랑이지 , 그 사랑에 이르는 시들에서 사랑은 이 세계의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줄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랑을 의인화한 시 그 사랑에서 노래한다.

 

우리는 너를 잊었어도

너는 우리를 잊지 말라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밖에 없다고

부디 우리가 냉정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아주 먼 곳에서도

그 어느 곳일지라도

....... 中略 ......

기억의 큰 숲에서

갑자기 나타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 그 사랑, 마지막 연, P210

 

, 색다른 문장을 보았는데, 사랑의 달콤하고 위험한 얼굴이라는 시에서 사랑의 상처는/ 뜨겁다는 것 너무나 뜨겁다는 것이지요라고 하는 것이다. 역자는 고통마저 뜨겁다고 하는 것은 기쁨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상처의 고통이 너무도 생생해서 인식의 과도함이 불러일으킨 화끈거림으로 느껴졌다. 사랑의 상처가 깊을 때 그것은 불길처럼 뜨거운 것이 아닐까?

 

조금 충격적으로 느껴졌던 몇 작품이 있는데,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답게 그의 시들에는 영상적 묘사처럼 보이는 시각적 작품들이 제법 눈에 띈다. 꽃집에서에는 한 남자가 꽃집에 들어와 쓰러지고 꽃들과 그가 치르려던 돈이 동시에 구르는 정지된 화면같은 순간이 그려진다.

 

그가 쓰러지자 동시에

돈은 땅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쓰러진다

돈이 굴러가고

꽃들이 망가지고

남자가 죽어가는 데

꽃집 아가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 꽃집에서, 2, P299

 

남자와 꽃과 돈, 꽃집 아가씨, 모든 사물과 인간이 정지된 듯한 동시적 어떤 순간에도 굴러가는 멈추지 않는 돈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부조리함의 극치, 돈으로 상징되는 자본위력의 불쾌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인의 예리한 순간 포착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유사한 감정을 야기한 작품으로 혼전에 임신한 딸의 배를 밟는 한 부르주아 가족의 모습을 그린 빨래라는 시는, 피 얼룩을 지우기 위해 오직 빨래하는 일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을 보게 한다. 생명을 죽인다는 죄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물질자본주의가 가져온 문명적 질병인, 체하는 것, 비교하고 경쟁의 대상인 타인에게는 은폐된 내부의 거짓, 위선을 거침없이 발가벗겨 드러낸다.

 

오오 죽은 고기의 끔찍하고 놀라운 냄새여

여름이지만 정원의 나뭇잎들은

가을인 것처럼 떨어져 죽어가네

저 냄새는 에드몽씨가 사는

빌라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는 가장이고

국장이라네

그날은 빨래하는 날

그건 그 집에서 나오는 냄새라네

국장이고 가장인 그는

........ 中略 ......

그가 좋아하는 속담을 수없이 되풀이한다네

집안의 수치를 밖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온 가족이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시시덕거리고 -빨래, P365

 

쫓기듯 살아가는 인생을 마치 자유로운 여행의 여정인 듯 말하는 세상에 대한 항변인 통제관, 거대한 피웅덩이를 지니고 결코 돌기를 멈추지 않는 지구의 은유를 통해 비인간적 폭력의 세계를 고발한 피 속의 노래등 반폭력, 반전의 목소리에서부터, 세계에 범람하는 권위적 목소리들에 대한 냉정한 비난의 목소리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 목소리들을 격렬하게 부르짖지 않으며, 자신의 담담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술한다. 자신에 대한 비뚤어진 공격에도 그저 헛되다고 말하며, 문단, 정치, 세계의 모든 곳은 그것에 애정을 지닌 모든 이에게 열린 공간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이 그 어떤 악착같은 말보다 울림이 크다. 물론 들으려 하는 자에게만 그렇겠지만.

 

그는 세계의 모든 속박, 억압에 저항했던 것 같다. 학교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열등생이라는 시는 학교의 부정적 형상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프랑스 초등학교에서 교사들에 의해 이 시가 읽히도록 권장되고 있다고 한다. 깊이있는 사유에 대한 교육의 방편일 것이다. 시는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선생님에게 아이는 쏟아지는 질문에 폭소를 터뜨리며, 불행의 검은 색 칠판 위에 온갖 색깔의 분필로 행복의 그림을 그리는 아이를 묘사하고 있다. 생각의 다양성,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 무수한 답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이것은 바로 아니요를 외칠 수 있는 인간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사회일 것이다.

 

자크 프레베르는 초현실주의 그룹 일원이기도 했으나, 브루통과의 갈등으로 이탈하였으며

피카소와의 깊은 우정을 나누기도 하였던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회화 작품, <나비>


사랑도 돈의 지배 앞에서 길을 잃고, 아이들에 대한 보호와 관심도 학원의 기능적 시험훈련이 대체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 또한 소유와 지배라는 억압의 권력이 차지한 세계이고 보니 시인의 모든 시들이 새삼스레 오늘의 우리들이 잃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 시인은 화가 피카소와 가까운 친구처럼 지냈던 모양이다. 그들의 교우는 아마도 그 어떤 속물적 가치 세계의 것들과는 다른 참된 우정이었을 것만 같다. 시집을 읽고 나면 시인의 말처럼 인생에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된다. 그의 사랑의 언어들에 물든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어느 맑은 날 장례식에 가기 위해 가을 저녁에 출발한 두 마리의 달팽이가 슬프게 도착했을 때, 이미 봄이 되었다고 노래하는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처럼, 음울한 겨울을 눈치채지 못하고 통과해, 죽었던 나뭇잎들도 모두 부활한 생명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나만의 아니오의 목록에 이 작품을 기입하면서 그의 시 외출 허가증으로 맺음을 갈음하련다.  자크 프레베르 귀하를 바틀비 연합체의 일원으로 임명합니다! 그가 과연 수긍할지 모르겠다.

 

새장 속에 군모를 넣어두었네 그리고

머리 위에 새를 올려놓고 외출했네

그러자

지휘관이 왜

경례를 하지 않는가 물었네

안 합니다

경례를 하지 않습니다

새가 대답했네

아 그런가

..... 後略 ..... - 외출 허가증,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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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뤼드 쏜살 문고
앙드레 지드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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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들마저 갈색 고인 물에 잠긴 채 아직도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내 쓸모없는 결심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생각들이 마침내는 거의 사라져 버리는 곳.”

- 대안, 121

 

책의 헌사에 친구 외젠 루아를 위해, 이 풍자문을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소설을 의미 그대로, 빗대어 비웃고 폭로함으로써 무엇에 대해 공격하기 위한 글로 받아들여도 곡해는 아닐 것이다. 그 무엇은 소설을 쓴다는 것이기도 하고, 삶 그 자체를 말하려 한다는 것이기도 하며, 당대 문학과 철학 등 지성의 기술(記述)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작가 자신을 포함한 삶과 글쓰기와 당대 문예조류에 대한 부정과 모순에 대한 냉소적 비판일 것이다.

 

이렇게 작품에 진입하기도 전에 한 작품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경솔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신중치 못한 가벼움에 기대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어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종의 서문 또는 경고의 글에서 한 권의 책은 언제나 공동 작업이다. 쓰는 이의 몫이 더 작아지고, 신이 받아들일 몫이 더 커질수록, 책의 가치도 커진다.”,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집어넣었을 무언가를 독자대중이 밝혀내리라고 말하듯, 그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冒頭)의 인용 문장은 소설 속 팔뤼드를 쓰는 화자이기도 하며, 팔뤼드속 주인공인 티튀루스가 바라보는 늪의 전경일 것이다. 한편 그 늪이라는 상징적 장소, 인간의 삶과 자연의 총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공간, 바로 팔뤼드라는 이 의미가 모호한 책이 이미 담지(擔持)하고 있는, 결코 써 낼 수 없는 총합으로서의 삶 자체일 것이다. 소설 팔뤼드는 이 제목의 책을 쓰는 화자의 6일 간의 지독하게 평범한 일상의 기록이고, 그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내용은 소설 속 화자가 쓰고 있다는 팔뤼드의 맥락 없어 보이는 부분적 내용들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얽혀 이들을 포괄하는 바로 이 책 팔뤼드를 구성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텍스트, ‘둘러싸고 있는 글과 그 안에 있는 글이 서로 반영(反映)하며 영향을 미치는 형식을 미장-아빔(mise-enabyme)’이라 지칭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작가 앙드레 지드는 이미 말할 수 없는, 하나의 완결된 의미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가장 근접하게 표현하는데, 이 일종의 상호 반영 기법으로 모호성과 복잡성을 통해 본래의 텍스트를 뛰어넘는 예상 외(), 즉 신의 몫이 드러나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 책은 해석이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책이다. 이러한 점(말하지 않은 것까지 말할 수 있다는)에서 작가의 야심찬 욕망의 산물임을 엿보게 된다. 이로써 지드는 자신만의 독자적 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여겼을 법 하다. 어쨌든 소설의 전체적 성격에 대한 소감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하게 연출되고 있는데, 그것은 뭐야 작업하는 거야?”라는 물음과 함께 팔뤼드를 쓰고 있어...”라는 답으로 시작하고, 뭐야 작업하는 거야?”매립지를 쓰고 있어...”라고 종료된다. 이 동일 형식에서 삶이라는 것이 지극히 변화없는 동일유사성의 반복임을, 지리멸렬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만 같다. 사실 팔뤼드(paludes;)’나 매립지나 그것이 그리 전혀 다른 것이 아니듯 변화무쌍하다고 말하는 삶이라고들 말하지만 삶이란 게 사용 단어가 지닌 미묘한 의미의 차이, 혹은 사람마다 다른 이해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지?’라는 친구의 물음에 팔뤼드를 설명하는 최초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떠날 수 없는 자에 대한 이야기야. (...) 나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밭에 만족하며 사는 티튀루스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야라고 답한다. 나는 이 설명을 팔뤼드에 대한 서론 격으로 읽었는데, 존재의 변화를 도모하는 어떤 행위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저항 없는 그 삶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늪으로 싸인 망루에 사는 독신자 티튀루스는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으며, 늪을 바라보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에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늪을 떠난 삶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의 감수(感受)일 뿐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화자가 팔뤼드를 쓰는 것은 이러한 순응적 삶, 권태와 무료함의 삶을 이탈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래서 화자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겠지.”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이미 팔뤼드는 거기에 무엇인가 더 써야 될 것, 또는 무언가를 끼워 넣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팔뤼드는 그저 계속 작업되고 있는 것일 뿐일 게다. 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도무지 진척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시적 산문이 한 문장 흐르는데, 이렇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물 위의 가느다란 풀들은 벌레가 내려앉은 까닭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물이 조금 흘러나와 식물의 뿌리를 적셨다.....시상(詩想)을 더 붙들고만 있을 수 없었으므로,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티튀루스가 웃는다.”

 

티튀루스의 조용한 웃음은 마치 만물의 조화를 깨달은 자의 미소 같다. 거기에 이미 모두 있는 것을, 아마 그래서 화자는 팔뤼드가 대체 무얼 얘기하는 거냐는 물음에 한 권의 책은 알처럼 닫혀있고, 가득 차 있고, 매끈한 거야. (...) 알은 채워지는 게 아니야. 가득 찬 채로 나오는 거지. (...) 게다가 그 얘기는 이미 팔뤼드안에 있어. 더 나은 것 따위, 나는 바라지도 않았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 소위 글을 쓴다는 이들, 아마 1895년 당대의 문학, 철학자들과 그네들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일 것 같은데, 플라톤의 대화편을 연상시키는 향연이라는 소제목을 한 어느 목요일의 여사친 앙젤의 집에 모인 문인과 철학자들이 화자의 팔뤼드에 관해 각자의 이해에 기초한 물음과 판단, 이의 등이 어우러지는 대화는 어쩌면 이 한 마디로 포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팔뤼드라고? 그게 대체 뭔가요? 설명했는데, 모두 어정쩡한 투였다.”


사실 화자가 설명하는 팔뤼드는 늪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이야기이고. 특징 없는 땅의 이야기이며, 오로지 구멍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매일 똑같이 형편없는 일만을 하는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어느 한 부분의 이야기만을 들은 이들이 전체를 말하는 데는 당연히 역부족이고, 몰이해이기 십상이다. 다들 제대로 보지 않고 밖에 있다고 믿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는 말처럼, 자신들은 마치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가소로운 것이다. 끝날 수 없는 이야기, 한 마디의 문장으로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팔뤼드에는 이미 그 모든 것이 있는 데.

 

화자의 얘기를 듣다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을 강요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결국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처럼, 다시 말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처럼, 그래서 혁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법도 하다. 이봐요, 당신은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 “제가 원하는 것은요,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팔뤼드를 마저 쓰는 겁니다.” 과연 이미 거기 있는 것, 스스로 가득한 것을 마저 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그저 살아 갈 뿐인 것을, 마치 삶의 여백, 또는 가능성이라는 것에 무얼 채워 넣으려는 가당치 않은 생각, 이미 존재하는 삶 자체에 대체 무얼 더 기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처럼 들린다.

 

그렇기에 화자는 어떤 결실도 볼 수 없음에도, 난 언제나 팔뤼드를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아요라고 단지 떨치기 힘든 느낌을 말한다. 달리 보면 팔뤼드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원죄(?)이거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짐 덩어리인, 삶과 뗄 수 없는 삶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매번 편히 쉬기 위해 쌓아올린 지붕처럼, 비를 피하게 해주지만 태양을 감추기도 하는, 그럼에도 떨쳐낼 수 없는 지붕을, 그것을 만들겠다고 자재를 모으며 싣고 돌아다니느라 구부러진 어깨를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때문에 화자가 쓴다는 팔뤼드의 주인공 티튀루스의 지루함과 권태로 이루어진 삶보다 우리네 삶이 장담하건대 훨씬 음울하고 시시해요.”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화자가 여사친 앙젤에게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하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늪 망루의 독신자의 삶을 허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고.

 

사실 작중 화자가 쓰는 팔뤼드는 결코 끝을 맺을 수 없을 게다. 실제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들을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했으니까. (...) 게다가 내가 고수하는 미학적 원칙은 소설의 구상과도 대립한다.”. 삶의 총체, 그 자체를 어찌 글로 옮겨 한 권의 책으로 써낼 수 있겠는가? 또는 한 권의 책으로 감히 진실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팔뤼드에 이어 쓰일 작품의 제목이 매립지인 것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리멸렬해 보이는 나날의 일상적 모음, 아무런 변화도 없는, 때론 괴어 썩은 늪지의 물표면 같은 그런 삶에 찬란한 광채가 펼쳐지는 순간이 있듯, 늪이여! 대체 그대의 매력을 말하는 자 누구인가! 티튀루스!”와 같이, 삶이라는 늪, 자신의 영혼에 맞추어져 만들어진 것이 아주 타당하게 여겨지는 감수(甘受)의 덕목이 또한 팔뤼드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의 해석은 이미 언급했 듯 무궁무진할 것이다. 주관주의적 정신주의라 할 수 있는 당대 상징주의 사조에 대한 비아냥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향연에서 문인과 철학자들이 팔뤼드를 저마다의 이해로 단정 짓거나, 모호해하는 말들은 화자가 쓰고 있다는 팔뤼드에 대한 사실의 진술일 것이다. 바로 그 진술들이 사실인 만큼, 상징주의는 틀렸다는 주장을 비꼬아 풍자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는 작품의 하나의 소주제일 뿐이고, 이들을 모두 싸 안는 것은 바로 삶의 총체적 진술의 불가능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이 무모한 글쓰기에 도전한 것이다. 애초에 삶이 지닌 불편과 불쾌를 탈주하기 위한 몸부림으로써 작업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몇 차례 더 반복하여 읽게 되면 또 다른 해석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경이롭다기보다는 기이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는 미묘하다는 여운을 주는 소설이다.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쓰기의 부정에 얽힌 한 인용글이 여기에 이르게 했듯, 또 어떤 인연이 닿아 읽게 될 때, 새로운 이해를 내게 던질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 작품은 그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화자의 여사친 앙젤이 그에게 던지는 말이 일말의 진실을 품고 있을지도.

 

불행한 친구여, 왜 당신은 팔뤼드를 시작했나요?

그토록 많은 다른 주제들이, 더 시적인 것들이 있을 텐데.” - 일요일,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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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31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쓰는 이의 몫이 더 작아지고, 신이 받아들일 몫이 더 커질수록, 책의 가치도 커진다˝ 라는 문구처럼 이 소설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네요. 흥미롭습니다.

필리아 2025-08-31 11:54   좋아요 0 | URL
굳이 미장-아빔의 형식을 띠지 않더라도 모든 문학작품, 또는 써진 글은 단어들, 무수한 의미를 담고 있어 독자들 고유의 이해에 따라 각양의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팔뤼드라는 단어 또한 늪에서부터 질병 등등 그 함유하는 여러 의미 탓에 모호하기 그지없는 제목이기도 하답니다. 결코 쓰일 수 없는 것을 쓰려는 작가들의 고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의 작가와 작품의 목록에 추가될 소설이라 말하고 싶네요. 잉크냄새님, 댓글 감사합니다. 유쾌한 주말시간 되시기를~~

젤소민아 2025-09-03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왓! 표지도 엄청 멋지네요! 이 책, 몰랐는데,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필리아님

필리아 2025-09-03 08:04   좋아요 0 | URL
표지 그림의 색감이 시선을 끌지요. 스물여섯의 지드가 쓴 야심찬 작품이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젤소민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