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우선 우리말 번역서의 제목이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적하여야겠다. 원제목은‘The Rhetoric of Reaction (반동의 修辭法)’이다. 즉 저술의 논지는 인류역사, 문명의 진보를 언제나 방해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인간의 희생과 불행을 만들어낸 반동파(逆推進;reaction)들의 전형적인 수사학적 주장의 형식과 유형을 밝혀내어 오늘날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두 세계로 나뉘어져있는 진보와 보수의 단절된 소통의 근인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비록 험난하고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노정이 되겠지만 “민주주의 친화적”종류의 대화를 조성하여 민주적이고 다원적 체제의 평화로운 정착과 인류의 공영을 모색하자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결국 200여년을 지속하여 반복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반동의 수사학적 전략을 드러내는 것이 저술의 취지라 할 수 있으니, 특정 이데올로기의 일방적인 지배방식을 연상시키는 표제는 정당한 표제라 할 수 없다 하겠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의 완전한 소통의 단절, 즉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질적 인간집단으로 심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로 석학들의 다양한 연구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버클리大교수‘조지 레이코프’가 사람들의 믿음, 세계관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판단을 하게하는‘개념시스템’을 엄한아버지와 자애로운 아버지모델을 통해 규명한 적이 있다. 이는 왜 진보와 보수로 세계가 나뉘고 서로 다른 가치관과 언어습관을 지니게 되는지를 우리들이 이해함으로서 소통의 융화를 모색해보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이코프로부터 이렇게 두 세계(진보와 보수)의 도덕적 패러다임을 알게 되었다면, ‘앨버트 허시먼’의 이 저술은 그네들이 수사학적으로 반복 구사하는 신화와 해석공식을 규명함으로써 특히, 반동의 논리적 의문점과 남용되는 기계적 주장의 거짓을 밝힘으로서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는 두 세계의 내전을 한 차원 높은 체제로 올려보자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관심사, 주장만을 강요하며 평행을 달리는 여와 야, 진보와 보수, 좌와 우식의 토론프로그램의 방송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극단의 의견만을 뱉어낸 채 아무런 합의나 결과의 도출도 견인하지 못하는 전형적인‘귀머거리 대화’인 오늘의 논쟁은 사실 교활한 언어게임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며, 그 내용이란 것도 이미 수없이 사용되어 닳아빠질 대로 닳아 너덜너덜해진 뻔한 전략을 멍청하게도 자기최면에 걸려 자기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짜증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는 복지관련 이슈들로 극한적 갈등을 보이고 있다. 초등학교 무상급식에 대한 보수집단의 반대, 국가복지예산은 늘렸다는데, 정작 최저생계비에 의존해야하는 노인들의 생계비지원액과 같은 필요예산은 오히려 30%이상 감액하는 집권보수정당의 안하무인의 극성은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더해‘복지’라는 말이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회피하기위해‘친 서민 정책’이라는 희한한 조어까지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라는 물질중심의 세계관에 경도된 사람들의 탐욕이 정말 무서운 공포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의 진보에 대한 반동기제에는 무엇인가 반복되는 기계적 전략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을 함께해가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당연한 의문일 것이다. 바로 이 저술은 개인의 평등과 자유, 그리고 보통선거권의 획득이라는 민주주의의 성취, 이어서 복지국가에 이르는 시민권의 시민적, 정치적, 사회경제적 차원으로의 진전에 반동파들이“공통적이고 전형적인 반동”명제들을 가지고 진보를 방해하고 좌절시키려 한 그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역 추진(reaction)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저자는 이 반동들이 사용하는 명제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행동이 의도하지 않은 여러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다”는‘역효과의 명제’이며, 둘째는“고도로 조직화 되어 있고 내재하는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것인 인간 행위는 세계를 고쳐나가기에는 너무나 무력하기”에 해봤자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는‘무용 명제’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선(善)의 정책에 직접 반대하기 어려울 때“제안된 변화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거나 이런저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위험 명제’이다.
 

일례로 역효과론의 경우 반동들은 실업급여나 복지기금의 도입, 일자리창출, 염가주택 정책은 장기적으로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나태와 게으름을 부추기고 경제적으로 해가된다고 주장하거나, 산재보험도입에는 노동자들이 손발을 잘라 천문학적 재정부담을 야기할 것이며, 관개프로젝트의 시행은 침수우려와 수자원 접근을 놓고 사회적 갈등만을 야기하여 사회발전을 후퇴시킬 것이라고 반대한다. 또한 최저 임금제는 의도와는 달리 고용축소와 총임금 감소라는 정확히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이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무용론의 경우, 역사학자‘알렉시 토크빌’처럼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권, 즉 시민적 시민권을 비로소 획득한 프랑스혁명을“괜한 짓을 한 것이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이 구체제(앙시앙 레짐)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고 거대한 투쟁과 격변을 기묘하게 그 의미를 잃게 하며 희화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이 그 예이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얘기인데, 이런 수사학적 공격은 시간이 흐르면 그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나 비웃음을 면치 못한다. 그럼에도 반동들은 이러한 명제의 사용에 대다수의 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들이 설득되고 세뇌당하기에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활용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여기에 더해 위험론은 통상 새로운 정책이 제안되거나 공식적으로 채택되자마자 다른 어떤 명제보다 먼저 사용되는데 초등학생 무상급식이라는 정책에 서울시장이 사용하는 반동명제이다. 즉 서울시 예산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권리와 자유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보통 선거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투표권이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확대되면 강탈적인 과세를 통해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는 다수파와 정부를 만들어 내 부자들의 재산권과 의회의 안정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거품을 물던 19세기 반동파들의“이것이 저것을 죽일 것이다!”라는 제로섬 방식의 해석공식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을 실현할 때에도, 선거권과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할 때에도, 복지국가를 이룩하기까지 200 여 년 동안 반동의 전략은 이들 세 가지 명제를 반복하며 답습해왔다. 이 저술은 이와 같이 인류의 진보를 방해하고 좌절시켜 자신들의 이익 수호에만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들이 그들의 수사나 주장이 어떤 형식을 가지는지 그 유형을 묘사하고 진보적 정책이나 사상을 뒤집거나 비난하려는 사람들의 논쟁태도나 전략을 사용하는지 강조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반동적 조류들이 명백하게 만들어낸 몇 가지 공통적이고 전형적인 주장을 집중 조명하여 그네들의 수사학적 논리의 이해를 제공하여 사실상 논의가 불가능한 설계된 논쟁 같은 위험신호를 우리가 조기에 알아차리게 하여 경계를 삼도록 도와주고 있다. 200 년 동안 똑같은 애기만 하는 역 추진의 논리에 시민들이 더는 속아 넘어가지 말았으면 싶다. 끝으로 가장 대중적이고 효과적 무기로 사용되는 반동의 레토릭(Rhetoric)과 어떻게 진보의 시도를 방해하는지 규명한 가히 명백하고 탁월한 분석과 통찰이 빛나는 이 역작(力作)에 진심의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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