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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 - 김명순 소설집
김명순 지음, 송명희 엮음 / 한국문화사 / 2011년 12월
평점 :
『탄실이와 주영이』와 『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の背後より)』에 대해서
1924년 6월 14일부터 같은 해 7월 15일까지 《조선일보(朝鮮日報)》에 27회 연재된 김명순의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는 당대 신여성이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과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또한 여성 대다수인 구여성은 물론 동료 신여성에게 조차 한 인격체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발설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한국문학사에 있어 최초의 여성 저항의 음성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또 다른 측면에선 당시 일본의 소설가로서 김명순을 모델로 쓰여졌다는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の背後より)』에 대한 비판적 위치에서 써진 김영순 자신과 조선인으로서의 변호의 소설이기도 하다.
카프(KAPF)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김기진은 김명순이 나카니시 소설의 모델(순결을 잃는 여성인물-주영이)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원색적 비하와 혐오 발언을 쏟아 부었다. 또한 방정환은 공개장을 통해 자신들의 공개장에 대한 김명순의 반박문 게재 지면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신문 지면을 통해 김명순의 명예를 더없이 추락시킨다. 김동인이 김명순을 모델로 한 소설을 발표하여 2차 가해를 가하며 가장 더러운 추행을 가하기까지 한다. 이들 당대 문단의 남성 작가들은 문란하고 더러운 여성의 이미지를 그녀에게 가두고 매체를 이용하여 방탕하고 오염된 여성으로서의 낙인을 찍는다. 자신들의 좌절된 욕망과 한계를 김명순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투사하여 공격하면서 그 비루한 감정을 배설했다.
공개장, 신문, 잡지 등 온갖 매체를 이용한 이들의 공격은 대중에게 학습되고 용해되어 광범위하게 김명순과 신여성에 대한 혐오감정으로 퍼져나갔다. 식민지조선의 남성들의 저열하고 무분별했던 당대의 사태를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서 일종의 못난 놈들의 비열한 시기심과 그 천박하고 무지한 욕망의 방향이 식민지 통치 권력인 일제로 향하지 않고 자신들의 동료인 잘난 여성에게 향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집을 읽게 된 배경에 대한 약술은 이쯤하기로 한다.
이 책 『외로운 사람들』은 김명순이 작가로 데뷔하게 되는 1917년 11월 잡지 《청춘(靑春)》 11호에 게재된 「의심의 소녀」에서부터 1921년 12월부터 1922년 1월 《개벽(開闢)》 18~19호에 연재된 「칠면조」를 비롯, 《신여성(新女性)》,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문단》 등에 연재되거나 게재된 총 15편의 소설 작품 모음이다. 표제가 된 「외로운 사람들」은 「탄실이와 주영이」가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직전인 1924년 4월 20일부터 같은 해 5월 31일까지 연재된 거의 장편 분량에 가까운 소설이다. 수록된 많은 작품들이 원본 결락과 부분 손상으로 인하여 완전성을 지니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탄실이와 주영이」가 어떠한 사유도 없이 돌연 연재 중단되었던 사정도 알길 없이 미완의 작품으로 수록될 수밖에 없었음에 애석함이 가득하다. 당대 문단은 물론 오랜 시간 김명순을 한국문학사에 지워버리려 했던 남성문인들의 작태가 거들었던 비열함의 흔적인 것만 같아 더욱 분노가 치민다.

단편 「탄실이와 주영이」에 대해서;
‘탄실’은 김명순의 아명(兒名)이자 필명(筆名)이다. ‘주영’은 일본 소설가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너희들의 등 뒤에서(汝等の背後より)』의 여성 주인공 이름이다.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가 두 명의 남성 문인(시인과 소설가)이 탄실이 의지처를 삼고 있는 이복오빠인 의사 김정택의 병원을 방문하여 『너희들의 등 뒤에서』가 탄실을 모델로 하였음을 화제로 하여 탄실의 정절 상실에 대한 당대 남성들의 시선에 도사리고 있는 이중의 모순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또한 나카니시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동정의 연민을 보내지만, 그의 소설적 상상력이란 자신의 욕망을 식민지 조선인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지배적 평가처럼 소설을 통해 일본인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우리(조선인)에게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는 반론이다. 탄실은 이러한 일본인 작가의 은폐된 욕망을 간파하고 있다. 이는 조선인 두 문학청년을 향해 탄실의 처지를 두둔하는 의사 김정택의 입을 통해 대변되고 있다.
소설의 시작 문장은 당대 식민지조선 서울 종로의 풍경과 그 안의 인간군상의 모습이 대비되어 기술되고 있다.
“6월 초승의 요사이 일기로는 아주 더운 어느 날 오후였다. 석양은 지금 황금빛같이 찬란함으로 조선 서울 종로 네거리에 뜨겁게 내리비친다....상점의 광고판들...,종로경찰서 지붕 위 독일병정 모자 같은 시계,...지루한 볕에 반짝이는 반(半)서양식 건물의 유리창들...마치 찬란한 심포니를 보는 것 같을 때, 흰옷을 입은 사람들의 얼굴의 구릿빛같이 무르익을 것을 저들의 약함으로써 받는 모든 학대 때문에, 기운이 쇠침해지고 행동이 느려져서 전체로 빈혈 된 그들의 얼굴에는 붉은빛이라고는 볼 수 없고, 누렇고 검어서 부질없이 의지 약한 힘없음을 보인다.“
일본 경제의 소비 도시화된 식민지 경제의 지루한 찬란함과 무력감과 무능함, 비루함으로 체화된 인간들을 이렇게 소설의 전면 배경으로 삼은 것은 김명순이 식민지 조선과 그 나라의 사람들에 지니는 비판적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이 성폭력의 피해자를 문란한 여성으로 매도하는 데 대한 단순한 변명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 병정처럼 뾰족하게 높이 치솟은 시계탑 같은 일제의 억압에 눌려 의지가 빈약해진 남성들은 자신들의 결여와 무능을 가부장적 남성의 권위의식을 통해 조선의 여성들을 이중으로 식민화했다.
남성들은 근대화와 함께 밀려든 서구 문명과 기독교로 대변되는 정신적 사랑의 물결에 대한 동경으로 지적이고 세련된 신여성을 욕망하면서 그런 여성들이 성적 사회적 욕망의 각성을 통한 주체로의 전환, 공동체적 자아로의 확장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발견을 향한 탐색에 나설 때는 방종하고 문란한 여성이라는 딱지를 붙여 여성 주체의 언어를 말하는 여성을 무참히 내몰아 매장해버렸다. 「탄실이와 주영이」는 바로 여성의 성적 운명, 즉 순결한가, 순결을 잃었는가에 따라 여성에 대한 평판이 좌우되었던 가부장제 식민지 조선의 남성중심사회에서 자기 존재를 새로이 증명하려는 깊은 투쟁이다.
김정택과 두 문인 청년의 대화에서 소비되고 있는 일본작가의 주영이는 남성들의 성적 뒷담화로 소비되는 탄실의 왜곡된 성으로 대상화된 소모품이다. 탄실은 이렇게 자신을 왜곡하여 소비하는 세계에 대항하여 스스로 말하는 주체로서 여성의 삶을 언어화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의 허영과 허위의식들인 그 무의미를 도처에서 들추어낸다. 한 문인청년은 말한다. “탄실이가 정조를 잃고 그 사나이에게 달려들던 생각을 하면 어찌 한낱 여자가 그다지 지독한지 치가 떨려집니다....그 남자를....사랑도 안 하면서 다시는 육체적 관계도 맺지 않으려면서 강제로 한 남자의 일평생 행복을 흐지부지 해주려 했던 것입니다.” 탄실을 겁탈했던 조선인 일본육사출신의 장교의 행위에 대한 탄실의 저항을 지독하다고, 그 남성의 일평생을 망가뜨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여성에 씌워진 순종과 무력감, 수치심으로의 절망과 침묵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발설이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꾸는 뒤넘스러운 언설인 것이다.
탄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이복오빠 김정택의 다음의 문장은 그녀의 자신의 목소리일 것이다. “탄실이는 그 반대로 조선 사람이면서 일본 사람의 생활 감정에 동화된 조선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았네.” 라거나, “분명한 짐승 같은 것에게 팔 힘으로 앗기었다 하면, 시방도 바로 듣지 않고 내 누이만을 불량성 가진 여자로”, 때문에 탄실은 “참 작은 한 여자의 10년 동안 걸어 온 길이 지독히도 무서워”라는 말처럼 문단은 물론 사회 대중으로부터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의 길이었음의 증언 일 것이다. 소설은 신문 연재소설이 지닌 한계를 화자의 전환으로 대치하고 있는 듯한데, 탄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연재일마다 번갈아 서술되면서 문자그대로의 한 여성의 성장과 과거의 삶을 여성 주체자로서의 목소리로 드러낸다.
어머니 산월이의 가문이 갑오경장 이후 몰락함에 따라 삶의 형편으로 기생으로 팔리게 되고, 평양의 거부 김형우의 첩실이 되는 일련의 이야기가 담담히 흐른다. 당대 일반 평민의 팍팍한 삶의 형편이란 것이 이러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한 개인에 그 어떤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그의 선악을 평가할 수 있냐는 항변일 것이다. 어머니 산월이를 이끌어 교회에 갔던 날의 기억을 술회할 때, 세상이 어린 탄실에게 손가락질하며 기생의 딸, 첩년의 딸이라는 차별의 호명으로 어머니를 멀리하려 했던, 다시 말해 자신의 출신과 관련한 어머니에 대한 불신과 부정의 의식의 전환을 보여주며, 당대 여성의 삶을 당당하게 진술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로서의 거듭남을 선언하는 것으로 읽힌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세상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가졌습니다.”라는 교회사목의 말에 산월은 이렇게 대답한다. “여러분이 아다시피 기생이라는 것은 남의 큰마누라가 되는 법이 없으니까 자연히 나도 남의 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지금은 내 한 몸도 아니고 이런 어린 것이 있고 보니 그 집에서 나올 수도 없지 않습니까....이 세상 사람이 죄다 죄악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느님이실지라도 그것을 일절 헤아리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기생이라 주눅들지 않으며 여성으로서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삶을 어떻게 당신들은 죄악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이제 좀 건너뛰어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 몰래 일본 유학길에 나선 열여덟 어린 여성 탄실의 사정이 술회된다. 그녀가 관찰한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인 남성들의 모습들이란 그야말로 비루하기 그지없다. “일본 유학생 군인들은 분풀인지 낙담인지를 향할 곳 없어서 되는 대로 방탕에 몸을 맡겼다. 입으로 한국을 근심하고 상관을 욕해서 그럴 듯이 인심을 사놓고....운동비를 무척 탐해서 소비해버리고 나라가 글러서 그렇다고 핑계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열성스러운 의의도 분명히 갖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잃겠다....그런 중에서도 서로 음모하고, 서로 욕하기는 잊지 않았다.” 며 이미 심리적 종이 된 식민지 조선 남성들의 방종과 다름없는 자유를 비판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요. 심한 경멸이라고.
탄실 김명순은 소설을 통해 자신에게 씌워진 성폭력피해자는 곧 문란한 신여성이라는 낙인, 망가진 정체성을 벗어나기 위한 고군분투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 낙인을 벗어나려는, 식민지 조선의 가부장제 질서가 근원적으로 봉쇄했던 여성의 삶에 대한 언어의 진술을 통해서 자신을 가둔 채색된 이미지로부터 탈주하여 여성이라는 제한적 이해가 아닌 보편성으로서의 인간으로 인식되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던 사회문화적 폭력에 맞서는 동시에 작품을 통해 새롭게 여성을 재정의 하려는 절박한 이 시도는 좌절되었다. 소설의 연재는 완료되지 못하고 중간에 소리 소문 없이 중단되어 끝내 그녀의 문학적 시도는 지배집단의 경계 바깥으로 내쳐지고 만다.
“나는 이 경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남이 겉으로 명예를 찾을 때 나는 속으로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한 마디의 모욕을 백 마디로 갚고 싶었다.”
남성중심 사회의 강고한 질서에 대항하여 여성으로서의 자기주장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김명순은 생생하게 입증했다. 그녀에게 가해진 그 거친 모욕들을 갚지 못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다 쓸쓸히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뇌병원(靑山腦病院)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 또한 그 어떤 지배질서 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비단 젠더 투쟁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변화를 향한 욕망의 실천에서의 그 처참한 곤경을 발견하게 한다.
멍투성이로 실패한 여성 전사를 만나는 우리 근대소설의 읽기는 오늘에도 여전한 전근대적 성역할 고정 관념에 충실한 불평등과 불의의 문제가 잔존하고 있다는 문제인식 때문이다. 이미 지나쳐 온 20세기 한국문학 읽기는 서구의 문학들과 달리 바로 오늘의 우리네 문제에 그대로 계승 또는 이전되고 있기에 소설 문학의 미적 양태 이상의 감상을 던져준다. 이제 막 시작했다, 김명순의 소설로 시작된 한국근대문학 읽기는 내게 어린 시절 수동적으로 수용되어야만 했던 그런 읽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시선과 감응으로서의 이야기들로 전해져온다. 이선희로 갈까, 백신애로 갈까, 인격적 소통과 외설적 가능성을 여는 사랑이라는 곤경 앞에선 이선희의 글쓰기로 갈까, 아니면 김명순의 처절한 배제를 본 백신애의 광기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