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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ㅣ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평점 :
이 책은 자살(suicide)에 관한 에밀 뒤르켐 식의 사회학적 성찰이 아니다. 인간의 죽음에 관한 작가들과 그네들의 작품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고 그것의 반영으로서 문학의 이해이다. 집단적, 사회적 현상으로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관점이 아닌, 결코 말 할 수 없는 개인의 복잡한 심리, 그 내면과 환경의 영향에 대한 특정한 관심의 표현이다. 또한 그 개별성이 투영된 시와 소설과 산문들을 통해 ‘왜 스스로를 살해하여야만 하는가’ 에 대한 응답의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자살을 사건화한 뉴스나 여타 들려오는 소문에 그 어떤 선악과 찬반의 의욕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에 관심을 지니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왜 이 책에 관심을 가졌는가는 실로 아이러니하지만, 문학, 특히 시(詩,Poem)는 이 자기 파괴적 죽음과 분리할 수 없는 본성 자체라는 생각의 연쇄반응이었거나, 아니면 무관심을 통해 혹시라도 알게 될 삶에 대한 고귀성이 밝혀지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살의 연구》는 느닷없이 내 마음을 강하게 끌었다.
“내가 자살을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원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8.9.-1948.3.)
저자인 앨 앨버레즈(Al Alvarez, 1929-2019)는 책의 마지막 장에 미수(未遂)에 그친 자신의 자살에 대한 회고를 통해 그 지점에 이르는 환경과 심리적 상황, 그리고 계획된 죽음의 방법선택, 자살을 통해 기대했던 자기 인생의 정당화나, 뒤엉킨 두뇌 회로의 말끔한 정리와 같은 구원이란 없었음을 이야기하듯, 자살이라는 주제와 멀지 않은 인물이며, 특히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을 가깝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비평가이자 시인이다. 그렇다고 누구와 가까웠다거나 실제의 경험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주제에 더 깊은 통찰이나 식견을 지녔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이라는 주제에 대해, 특히 그 개별의 죽음이 지니는 단독성에 대한 관심이란 애정을 지니지 않고서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진실성을 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책의 백미(白眉)는 제1장 〈프롤로그, 실비아 플라스〉라고 하겠는데, 실비아의 시가 품고 있는 그녀의 자발적 죽음으로의 행위를 의심할 바 없이 정확히 묘사하며, 자살이 그녀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숙의(熟議)한다. 쓰디쓴 초연함, 그 행위의 극적 상태나 그로 인한 고통 같은 건 조금도 드러나지 않은 자긍심과 연결된 자기 살해의 거스를 수 없는 귀결을 헤아린다. 하나의 주제로서 자살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 존재, 금기시 되었던 소재의 개인 정서 체험으로 탐구할 문을 연 시인의 시와 최종의 죽음으로의 날로 이어진다.
그녀의 자살이 지닌 그 복잡하고 특수한 함의들을 알지 못하면,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시의 의미 속으로 어렴풋 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이 된 도박, “막을 도리가 없는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자살. 「아침노래」, 「느릅나무」, 「가장자리」, 「온정」, 「아빠」, 「라자루스」, 「피니스테레」, 「죽음 주식회사」.....,앨의 앞에서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실비아, 자신이 소리높여 읽어야 하는 시라고 했던 시들에 대해서, 저자의 몰이해가 그녀를 아프게 했던 비평적 언어들의 후회의 목소리도 있다. 실비아는 결코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죽지 않았다. 가스를 틀어놓고, 누워 죽음의 행위를 하지만, 세 번째 자살 시도인 죽음의 도박은 치밀하게 계산된 이웃의 일어남과 보모가 집에 오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염두에 둔 모험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운 부엌에 메모를 붙여두었다. “의사를 불러 주세요”라고 의사의 전화번호까지 적힌 메모였다. 그러나 이 세 번 째 자살은 그녀가 계산한 의도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웃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주택의 출입구는 굳게 잠겼고, 보모는 제 시간에 도착했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실비아는 그렇게 마침내 죽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실패한 성공이었다. 실비아의 자살은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 도움, 그녀의 도박을 지체시키거나 유혹하는 죽음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줄 사람이 없었다. 《벨자》, 《에어리얼》, 《거상》..., 나는 이 매혹적 죽음충동에 도사린 도약과 도주의 에너지들, 그 섬뜩한 쾌감에 한동안 잠겨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옴짝하지 않는다.
서리가 꽃이 된다.
이슬이 별이 된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죽음의 종이 울린다.
누군가의 목숨이 끝났다. - 「죽음 주식회사, Death & Co.,」
「자살의 역사적 배경」과 「자살과 문학」 등 시대가 자살을 어떻게 수용했으며, 이 수용이 문학작품과 문인들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었는지, 아니 그들로부터 시대를 해독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살을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지적했듯 ‘영웅주의를 위한 극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습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이후의 태도이다. 자살을 범죄시하던 오랜 종교적 억압의 역사 시간이 지나고, 신으로부터, 제도의 흉측한 속임수로부터 풀려남으로써 자살은 순수한 개인의 문제가 된 이후로부터 말이다.

이제 자살은 그것이 최종의 궁극적 행위로 실행되도록 하는 무수한 개별성을 보도록 한다. 고대 스토아학파의 합리적인 명예의 존중으로서의 자기 살해나,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거시적 현상으로서의 사회적 자살, 혹은 신의 명령을 부정한 범죄로서의 자살과 같은 공허하고 조작된 몰이해로서가 아니라 개인이 겪어야하는 고통의 무수한 형태들과 그것의 내적 모습들을 비로소 심연까지 들여다 볼 용기를 가진 것이다. 18세기 낭만주의를 거쳐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문학은 죽음(자살)을 그 자신의 본질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자살자로 태어난 인간, 체사레 파베세, 능력의 과잉이 가져온 자존심을 파괴하는 세상에 대한 불가항력, 그 무기력에 좌절한 천재, 시인 체터턴 등 젊은 낭만파 영웅들의 때 이른 죽음에 내재된 죄의식과 상실감, 절망감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보게 되고, 돌연한 운명적 전환의 급경사로 치닫는 시인들에게서 나는 오히려 삶에 대한 고유의 가치를 더욱 확인하게 된다.
아마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말한 “궁극적 의미도, 그 어떤 형이상학적 근거도 없는 부조리라 말한 삶이야 말로 역설적으로 그것 자체로 향유되어야 함”, 그것으로서 말이다. “생이란 아무도 거절해서는 안 되는 선물이다.”는 이 선언적 문장이 의미하는 것일 게다. 실비아의 자기 살해 시도는 아마 사는 동안 한 번도 얻지 못했던 평정과 통제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실비아의 죽음은 《타임》紙의 대대적인 애도, 즉 영웅주의 극장으로 만듦으로써 그녀의 시와 죽음을 호도했지만, 어쨌거나 위대한 영감의 시인을 오늘에도 우리들이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는 문학과 시대가 자살의 금기로부터 해방되는 19세기에 이르자 성적 금기가 강화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죽음)은 낭만주의 전성기를 거치며 대중에게 심어놓은 내성 탓에 예술의 구조 일부가 되어 문학의 본질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 있지 않을 때면
삶의 총체가 줄어든다.” -82쪽, 프로이트, 《쾌락원리 너머》
아마 문학이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생명의 복수(複數)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동일시했던 주인공과 함께 죽지만, 여전히 살아있음으로서 안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나는 삶이라는 것의 빈약성을 한 차례도 불신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프로이트가 지적하듯 죽음충동은 불행보다 더 많은 기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삶에 의존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삶의 비탄 그 자체를 품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매일 수천에서 수만 명이 이 세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자살로 인한 사망자의 통계적 수치는 해당 공동체의 인간에 대한 관심의 지표로서 얼마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하지만 개별 인간의 자발적 죽음에 이르는 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인의 요절을 천재성으로 우상화하거나, 유명 정치인, 연예인의 죽음에 사회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도덕을 치장한 헛소리들로 짖어대지만 결코 그렇게 재단 될 수 없는 것일 게다.
자살에 내성을 가진 오늘의 우리들은 품위있는 놀이의 하나거나, 도피, 도주의 단순한 막다른 길 정도로 인식하는 게 고작이다. 자살은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사후적 삶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삶의 위대한 위로자로서 말이다. 숙명적 사멸, 이 부조리에 정면 대결하려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시도를 위한 극렬한 몸짓,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작업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저술은 실비아 플라스를 위한, 자신이 지닌 죽음과 취약함을 다름 아닌 자신에게 투여해 시험한 예술가들을 위한 진혹곡(Requiem)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자살의 역사와 예술사이며, 정신분석과 사회문화사의 통섭(統攝)을 통한 죽음과의 화해를 위한 치열한 예술론이기도 할 것이다. 유명한 자살의 주인공이 있는 문학작품들, 《젊은 베르터의 고뇌》, 《악령》을 비롯해 젊은 나이에 스스로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은 무수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모두의 죽음에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형언할 수 없는 죽음의 언어, 끝까지 밀어붙인 불가능한 언어, 죽어서야 할 수 있는 사후의 언어로써 생의 간절함 그것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