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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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 세계에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수시로 망각하고 동료 인간을 무심히 타자화(他者化)한다. 그리곤 그 타자들을 마치 인격 없는 비인간의 망령된 기표로 명명하곤 한다. 통계화된 수치로, 생존자로, 증언자라 부르며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자로 구분하거나, 거기에 온갖 형용사로 수식하여 신성한 무엇으로 포장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하며, 관음증적 호기심의 충족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들만은 짐짓 대단한 연민을 지닌 존재라도 되는 양 형식화된 애도의 흉내를 내거나, 높은 도덕성을 과시하는 언어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5.18 광주나 제주 4.3사건의 희생자의 추도와 같은 아픈 역사의 환기에 있어서조차 이러한 양상은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출현하여 고인과 그 유족들을 모욕하거나, 어설픈 연민에 동참했다는 거짓 위안의 도구가 되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스스로 경계해야할 것들이지만, 어떤 이름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이러한 반역사적 돌발 사건들을 표현한다는 것은 실로 조심스럽고 진중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소설이나 여타 글이 이들을 소재로 삼을 때, 자칫 사건을 하나의 지식이나 사회적 방편의 사례를 위한 수단화하여 망각이나 주류사회의 동일성의 관념으로 통일하거나하여 사회 내부의 도덕적 변화 동력을 훼손할 수도 있다. 예술 또는 학문이거나 정책이거나 그 무슨 명분을 앞세우더라도 그것이 대상 사건 관련자들의 인간 조건을 도외시하는 것일 때, 우리는 우리들이 인간성이라 부르는 것에 의심을 초래하게 된다.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불리는 신시아 오직’(Cynthia Ozick;1928~ )로사, 두 편의 소설은 홀로코스트의 악행이 저질러지는 공간에 있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장황한 사설을 앞세웠다. 이 소설 속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 ‘히틀러’, ‘폭력’, ‘유대인 학살과 같은 단어를 발견할 수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상황의 간결하고 농축된 언어만으로 그 참담함과 사라진 인간성으로 우리를 이끈다. 거대한 폭력의 힘에 의해 지워지고 숨겨진 것들의 역사화를 둘러싼 그 어떤 상기(想起)도 이 작품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다.

 


단편 (The shawl)

 

스텔라는 추웠다. 뼛속까지 추웠다. 지옥인가 싶은 추위였다. 그들은 함께 걷고 있었다. 로사는 젖가슴 사이 숄에 둘둘 싸인 마그다를 웅크려 안고 있었다.” -11

 

소설의 첫 문단이다. 세 명의 등장인물이 모두 드러나 있으며, 그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짐작이 가능한 문장들이다. 이 소설은 무척 짧다. 이 첫 문단처럼 압축된 언어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어지간한 장편소설을 능가하는 이야기와 의미를 품고 있다.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의 강렬함은 가히 압도적이다. 로사는 아기 마그다의 엄마이고 조카인 스텔라는 열다섯 소녀다. 그들은 사흘 밤낮을 굶주린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아기는 로사의 숄을 요람삼아 그 속에서 이미 메마른 젖꼭지를 빨고 있다. 이미 말라버린 로사의 젖꼭지에서는 젖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고, 죽은화산처럼 싸늘한 구멍 뿐이다.

 

마그다는 이제 숄 모서리를 대신 붙잡고 빨아댄다. 리넨 젖이었다. 마그다에게 숄은 안전한 둥지이고 작은 집이며, 양분인 마법의 숄이 되었다. 로사는 그렇게 아기를 숄에 담아 가슴에 숨긴 채 수용소에 들어간다. 밀집된 지옥같은 수용소는 너무 춥다. 스텔라는 너무 추워 숄을 빼앗아 자신의 몸을 감싼다. 막사 밖 광장 점호 구역으로 뛰어나간 어느 날, 숄을 감싸 벽 뒤에 숨겨 세워두면 소리없이 숄 모퉁이를 빨고 있던 마그다가 점호구역의 햇빛 속에서 몸을 흔들며 움마아--를 부르짖고 있다. 들키면 아이는 죽을 것이다. 로사는 주저하다 막사로 뛰어들어 숄을 찾아내지만 이미 늦었다. 마그다는 누군가의 어깨위에 들려 저 멀리 가고 있다. 이윽고 마그다는 전기 철책위로 던져진다. 로사는 뛰어가 아기를 안아들어야 하지만 그들이 총을 쏠까봐 감히 달려가지 못한다.

 

그녀의 뼈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늑대의 울부짖음을 토해냈다가는 그들이 총을 쏠 테니까, 로사는 마그다의 숄을 쥐고 입에 쑤셔넣는다. 울부짖음을 삼키게 될 때까지. 이 참혹한 광경이 소설이라는 예술적 장치에 의해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 이 관능적 장면을 단지 이야기의 재미로 소비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작가의 경고였는지 모르겠다. 인간의 역사에는 이렇게 인간존엄과 생명윤리가 부정되고 수시로 파괴되곤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를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우리 안일한 내부의 이탈을 촉구하는, 그래서 우리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는 이야기들을 멈 출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단편 로사

 

의 속편이 랄 수 있겠다. 자신의 아기, 마그다의 죽음에 달려가지 못했던, 어떠한 애도조차 하지 못했던 어머니, 로사는 해방되어 미국으로 조카 스텔라와 건너왔다. 시간적 배경은 30년이 지난 어느 시점인 듯하다. 스텔라가 마흔 아홉이고, 로사의 말로 자신의 나이는 쉰여덟이라는 말로 추정하면 대략 그럴 것이다. 로사는 꾸려가던 가게를 자기 손으로 때려 부수고 가게를 접었다. 그리고는 뉴욕을 떠나 태양에 튀겨져 껍데기처럼 살아가는 노인들이 득실거리는 마이애미의 컴컴한 구멍이나 다름없는 방에서 살고 있다.

 

로사는 과거의 쓰레기로 살아가는 미친 여자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최악은 그야말로 최악이니, 그 후로는 최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더 많은 최악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텔라는 고모인 로사에게 이제 그만 과거를 잊을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삶을 찾아야 한다고. 더 이상 마그다의 강보, 마그다의 수의, 일어버린 아기의 거룩한 향기, 살해당한 아기에 입 맞추고 눈물 흘리는 일을 멈추라고.

 

그러나 로사는 스텔라를 심장이 없는 죽음의 천사, 얼마 전에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환자라 부른다. 로사는 이 세계가 진실을 도둑질하고, 거짓말에 보상을 주는 천박하고 혐오스런 곳으로만 보인다. 과거를 모두 두려워하고 예전 존재의 모든 흔적을 모욕으로 아는 스텔라를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로사를 이렇게 묘사한다.

 

감금, 노출, 영양실조로 인한 스트레스가 오랜 기간 지속된 환자이며, 인도주의 맥락에서 수집하는 생존자 데이터이고, 억눌린 활기를 가진 조사 대상자일 뿐이다. 로사는 이에 대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흥분”, “평범한 무리와 따로 셈해지는 존재, 더구나 한 여성으로 보지 않고 생존자라 부르는 비인간화를 비난한다. 누가 이런 단어를 지어냈을까?, 고통의 목구멍에 붙은 기생충같은 단어를!”

 

로사는 죽은 아기 마그다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그녀만의 애도 방식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겐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마그다에게 보내는 두 편지가 기록되고 있는데, 이 편지는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유대인인 친절한 노신사의 자기와의 화해, 세상과의 화해를 향한 노력과 함께 마그다를 그녀의 세계로부터 떠나보내는 과정으로, 로사가 결코 세계를 비난하기만 하는 인간이 아님을 발견케 한다. 오늘 우리들은 역사의 이성이 무능력한 영역에 대해 알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안주에서 결코 밖을, 가려진 곳을 보려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순수성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로사에게 푹 빠져 읽었다.

 

우월한 위치에 선 방관자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들은 빈번하게 터무니없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무례하고 천박한 말들로 존재를 무시하며, 잔인성을 내보이기까지 한다. 신시아 오직의 이 소설들을 지나치게 재미있게 몰입하여 읽었는데, 어쩌면 작가의 예술적 역량의 탁월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겁기만 한 의제를 가볍게 조탁해낸 작가의 솜씨에 빠져든 것은 결단코 무지의 연민 때문은 아니라고 변명하련다. 내겐 새로운 작가의 발견이고 입문이다. 이 대가의 황홀한 픽션들이 거듭 소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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