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 소설 전집 5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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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끝나버리면 생의 갈등도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느끼며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그것이 아마 행복인지도 모른다

, 우리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감정 말이다.

- 안과 겉,긍정과 부정의 사이, 책세상, 200912, 개정15, 52


소설 행복한 죽음(La mort heureuse)은 카뮈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이방인에 앞서 써진, 작가가 생전에 결코 발표하지 않으려했던 작품이다. 구성의 미숙함과 산만하게 열거된 에피소드들, 한 청년의 방황과 일상의 실체가 그대로 투영된 글이기에 전기적 이해에 귀중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내적 고백에 가까운 이 글은 그대로 묻어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살아있는 자들의 그 무한한 호기심이 작가의 사후 10년이 지나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문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란 것이 한 인간 존재의 의지보다 과연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아무튼 이 작품은 이러한 상념 속에서 읽게 되었다.

 

모두(冒頭)에 카뮈의 첫 출간작인 에세이 안과 겉의 한 문단을 인용한 것은 이 소설이 1937년 동일한 시기에 쓰여진 글이기도 하거니와, 주제의 동일성 때문이다.  당신의 유일한 의무는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입니다.”라는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전하는 한 문장이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을 완수한 죽음, 그것을 명징하게 의식하며 죽음에 이르는 것이 곧 행복한 죽음에 대한 내 조악한 이해가 될 것 같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자연적인 죽음의식적인 죽음이라는 부제가 달려있고, 읽어나가며 이 제목들이 아주 역설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적인 죽음은 메르소가 하반신을 잃고 타인의 도움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그뢰스란 인물을 살해한 그날의 행위와 그에 이르는 두 인물의 대화와 회상들이다. 삶의 의지와 행복의 의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변적 이야기들을 따라가며 세계와의 합일, 인간들로부터의 해방에 이르는, 추구되는 행복한 죽음의 완성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에 사로잡혀있는 인물에서 오히려 나는 카뮈의 현실, 스물다섯 무렵의 프랑스 식민지 지중해 연안 알제의 청년을 생각했다.

 

소설에는 그의 현실 경험 속 인물들이 역할을 달리하여 등장하고, 그의 일기와 작가노트에 기록되었던 실제의 역사가 도처에서 허구와 현실을 넘나들며 달리고 있다. 그의 기억, 그의 삶의 실체를 잡아매고 있던 어린 시절, 리옹가()의 하층민들이 거주하는 벨쿠르에서의 지독히 가난한 냄새에 대한 애착, 적어도 자신과 접할 수 있었던 그 너저분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대결의 슬픔과 회한 속에서 되돌아오는 자신의 발견으로서의 장소에 대한 정경들이 있으며, 프라하 골목길에서 그의 마음속에 잠겨있던 모든 고통의 힘을 깨어나게 했던 냄새의 정체, 식초에 절인 오이가 불러내는 어머니와 둘만이 느꼈던 광대한 기억이 있고, 어머니의 침묵, 그 기이한 어머니의 무관심!에 깃들어있는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의 의미 연결을 발견할 수 있다.


나에게로 올라오는 것은 보다 나은 날들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차분하고 원초적인 무관심이다.”라고 메르소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명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모든 것은 단순함이라는 명징성임을 확신한다. 그 명징성과 단순성은 사형 받은 자를 가리켜 말할 때,   그는 사회에 대하여 죄 값을 치르려 하고 있다.“는 불분명한 말이 아니라 그의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가 되어야 함이라 말하듯, 그는 세상에는 자기 운명을 똑바로 마주 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 문장으로부터 그의 생 혹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치밀한 의지와 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운명을 마주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내 흥미를 끄는 경험은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되어가는 경험들이거든요.”라고, 의사 베르나르에게 재단해 놓은 운명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급기야   한 인간의 문명이란 열정적으로 걸머지는 경우에는 언제나 흥미진진한 법이죠. 한데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흥미진진한 운명이란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이죠.”라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무언가 훅 하고 명치를 들이미는 당혹감을 느꼈다.

 


메르소가 살해하게 되는 자그뢰스는 메르소가 사귀고 있는 마르트의 한때의 연인이었기에 만나게 된 인물이다. 메르소는 마르트와 영화 관람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메르소는 마르트의 분방한 남자관계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며 망상에 빠진다. 그리고는 불쾌한 망상에서 문득 깨어나 스크린 속에서 자동차가 전복되면서 고요한 가운데 오직 바퀴 하나만이 계속해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장면을 바라본다. 고집스럽게 허전하면서 사나운 마음속에서 생긴 수치와 모욕감을 함께 이끌고 돌았다고 심정을 묘사한다. 이 문장을 미리 재단해 놓은 운명과 연결 짓게 되면, 카뮈가 그의 문학적, 정치적 반대진영에 의해 무참한 시련에 놓여있던 고뇌와 불의의 자동차 사고를 왠지 우연한 불운의 사건으로만 보여지지 않게 된다. 자신의 작품 집필 순서나 체계는 물론, 행복함이라는 생의 완수를 끝낸 한 인간의 의지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2부 의식적인 죽음은 자그뢰스의 살해와 관념적인 연결고리는 맺을 수 있을지언정, 긴밀한 연속선상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그 구성상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 그의(카뮈) 에세이 결혼을 구성하는 제밀라의 바람이나 사막등에서 느껴지던 고독과 운명의 정념들, 대지와 인간에 공통된 어떤 울림들이 소설적 구성으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는 제밀라의 바람에서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쓰고 있다.

 

내팽개쳐진 상태로 고독과 마주 대하고 있자니 불쾌한 감미로움이 입 안에 고였다.”라고 소설의 주인공 메르소가 말하듯, 프라하의 골목길을 걷고, 알제의 언덕 꼭대기에 매달린 듯 있던 세 여학생의 집에서의 일상이나, 슈누아에서 마주하는 고독한 삶에서 길어올리는 것은, 당시 카뮈의 경험 세계와 거의 동일한 모습들이다. 가난과 사랑, 여자와 꽃과 미소에 대한 욕망, 이러한 것들은 그의 성장을 이루는 빈곤의 장소, 즉 가장 혐오스러운 세상과 끊을 수 없는 유대의 긍정이며, 바로 그러한 삶과 자신이 공범자임을 소리쳐 말하는 충동으로 터져 나온다.

 

그는 자그뢰스의 살해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마침내 자신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인간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당성의 입증, 메르소는 바다에 뛰어들어 비겁해지지 않은 채 자신과 일 대 일로 자기 육체와 대면하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죽음을 바라보는 실행에 착수한다. 거기에는 오직 행복과 고독의 끝없는 사막이 있을 뿐이라고 되뇐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은 세계의 진실로 돌아간다.

 

어쩌면 이 소설은 청년 카뮈가  문학예술 행로의 설계를 마쳤음에 대한 자신을 향한 선언이 아니었을까? 가난과 절망, 자신의 병(결핵)이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삶의 방해에 대해 끝없이 반항하는 삶에 대해, 그리고 그 반항을 형성하는 것들이 바로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벨쿠르의 그 어두운 방에서의 절망적이고 슬픈 기억들에 대한 사랑이고, 여인들과 친구들, 그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이후 발표되는 이방인을 비롯한 그의 소설들이 어떤 단계를, 방향을 내딛게 될 지에 대한 예술적 지표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보여주는 그 무관심과 단순성이 무얼 의미하는지, 또한 인간 삶의 구체적 실체, 즉 인간적 숨결만을 묵묵히 추구하며, 기한이 정해진 미래라는 부조리는 단지 관념 덩어리로서 반항의 대상이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페스트의 리외에 가 닿는다.

 

메르소는 말한다. 어떠한 정열이 온통 나를 흥분케 할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 지금은 행동하는 것, 사랑하는 것, 괴로워하는 것, 그게 바로 산다는 겁니다. 투명해지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그것은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요.”라고, 아마 이때 이미 반항 상태라는 삶의 여정을 출발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카뮈의 문학 세계를 거니는데 이 작품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이해의 토대를 얻게 되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무심한 어조로 별 뜻 없이 말을 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그처럼 세계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언제나 감동시키는 것은 이 세계의 단순함이다.”

- 안과 겉책세상, 200912, 개정15, 6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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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이 소설을 단순 명쾌하게 읽는 법?

 

삶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참고 견디는 이 여덟 시간의 사무실 근무가 그걸 못하게 막아요. 메르소는 격한 어조로 말했다.” -58


다만 행복해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돈을 버느라 삶을 허비해요. 돈으로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말예요. 바로 이게 내 관심을 끌었던 유일한 문제였습니다.” - 61, 자그뢰스가 메르소에게 하는 말

 

아마 메르소와 자그뢰스가 나눈 위의 두 대화 문장에 소설의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가 될까? 메르소는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자그뢰스의 지적에 따라 그를 살해함으로써 자그뢰스가 모아 둔 돈 200만 프랑을 지니게 된다


"그 이튿날, 메르소는 자그뢰스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와 오후 내내 잠을 잤다." -74

 

메르소는 존재적 무용함인 여덟 시간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이후 중부 유럽의 여행과 알제로부터 떨어진 교외지역인 슈누아에서 고독이라는 시간을 만끽한다. 바다에서의 수영, 태양과 꽃과 여자들, 완벽한 시간의 누림, 인생의 유일한 의무인 행복의 완성, 삶의 완성을 이룬 자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다? 라는 것.

 

사실 이러한 도식적인 해석으로 읽게 되면 물론 단순 명쾌함이 있지만, 과연 이 소설을 제목에 매여 읽을 필요가 있을까싶다. 오히려 이 작품은 가난한 청년이 자신의 삶과 세계와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내적 투쟁의 이야기로 읽을 때 더 풍부한 의미들로 살아 날 것 같다. 작가의 문학 여정이 시발점에 놓이기까지의 탐색, 그의 삶에 대한 의지와 문학적 청사진, 작가 경험의 실체와 그것의 문학적 연결 고리들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훨씬 쏠쏠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특히 이방인의 뫼르소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또 다른 독서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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