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나의 병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7
하비에르 세르카스 지음, 김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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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카탈로니아 찬가로 촉발된 읽기로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두 번째 독서이다. 이 저작은 공화주의 정부의 출범과 함께 기득권 세력인 귀족 계층을 비롯한 교회권력, 군국주의자들은 새로운 정부체제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평등, 자유, 그리고 노동계급의 부상(浮上)에 계급적 위기를 느끼고 이들 체제를 파괴하기 위한 폭력과 내란을 획책하여 야기된 것이 1936~1939년의 내전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단순하게 기득권 세력의 복고(復古)를 위한 기획된 폭력으로 스페인 내전을 정의해버리면 오웰이 정의한 사회주의 혁명 전쟁의 의의가 희석되어버릴 수 있다. 노동자, 농민 등 인민 대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야말로 자기 계급을 위한 세력들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탐욕스런 계급 갈등의 저열한 폭력전쟁(暴力戰爭)으로 규정되고 만다. 따라서 전쟁 촉발의 동기를 무엇으로 이해하는 가의 문제는 정의(正義)에 대한 논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다른 관점,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로 옮기면 전쟁의 진정한 주체가 누구였는가의 물음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후자의 물음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그래,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이 저작은 전쟁의 실제 주체, 또는 기억되어야 할 존재자들에 대한 물음이다. 책은 장편소설이라고 장르를 규정하고 있는 듯하지만, 기술된 방법은 역사르포, 추적 기사에 가깝다. 즉 역사적 사건에 참여했던 생존하는 실존 인물들과 그네들과 관련된 자들의 인터뷰를 통한 증언의 기록물이며, 이것이 문학적 표현 방식에 의해 기술된 것이라 하는 것이 어쩌면 타당한 이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다시 대두되는 것이 기억과 기록의 진실 공방이다. 진정 사실은 무엇인가? 권력에 의해 조작 날조된 기록이 넘쳐나고, 기억은 왜곡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현재를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찾아내야 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좋은 공동체의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의 내부 분열과 자멸적인 폭력적 파괴를 보았으며, 이로인해 프랑코 등 이념적 잡종들의 연합인 파시스트로 집단화하는 우매한 대중적 무관심에 넌덜머리를 냈다면, 하비에르 세르카스는 팔랑헤로 지칭되는 파시스트 세력의 창설자이자 정치위원회 의장이었던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의 생존에 얽힌 비화의 진실성을 추적하며, 전쟁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는지, 역사가 망각한 사실은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려 한다.

 

마사스의 생존 비화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39130, 공화군에 의해 체포된 파시스트들은 처형되기 위해 스페인 국경지대 쿨옐의 한 수도원에 무리지어 대열을 짓고 있었다. 산체스 마사스는 무차별로 난사되는 총살로 쓰러지는 대열에서 도주하고, 비 내리는 진흙탕 속에 엎드려 수색하던 공화군의 시선을 피하다 총을 겨눈 한 명의 군인과 마주한다. 군인은 한동안 마사스를 바라보다 여긴 아무것도 없다며 그를 살려둔 채 돌아선다. 이후 마사스는 인적을 피해 도주하다 한 마을에 도착하여 보호를 요청하며, 그의 아들인 전후 스페인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불리는 라파엘 산체스 페를로시오가 전하는 숲 속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프랑코군의 승리와 함께 영웅이 되어 정치무대에 복귀했다는 이야기다.

 

사실 그저 그런 뻔한 영웅담의 한 토막이다. 그러나 이 전언의 진위 여부는 파악되어야 한다. 산체스 마사스 스스로가 조작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실제를 사실대로 진술한 얘기인지, 생존담은 사실일지라도 그 세부인 시선이 마주친 공화군 병사의 행위는 정말 있었던 일인지, 도주 중 그를 보호하며 함께했던 숲속의 친구들은 실존하는 사람들인지, 이 이야기가 왜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져 있는지,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생존비화가 역사적 사실로 전해지고 있는지를 그 의미를 밝혀내야 한다. 역사는 전후(戰後) 산체스 마사스를 진영에 대한 차별없는 정의로운 정치 귀족으로 기술하고 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책은 이에 대한 지난한 추적기다. 폭력과 군사주의에 대한 신비로운 찬양, 천박한 근본주의, 조국과 카톨릭의 영원성을 주장하며, 공화주의 정부 이전의 엄격한 귀족적 우아함을 누리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팔랑헤의 핵심 이론가였던 파시스트 창설 인물의 추함을 가린 일화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작업이다. 옛 체제의 확고한 계급 제도에 대한 향수, 즉 자기 계급의 편익을 영구화하기 위해 국가를 폭력의 상태로 내몬 주역에게 덧칠해진 심미적이기까지한 일화와 이후의 행적에 담긴 실체를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면죄부가 주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영웅이 되어 역사의 무대에 서는 것이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팔랑헤의 주역인 이 인물은 오늘날 수구 정치집단이 사용하는 음모성 공작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의도적인 이데올로기적 혼선을 야기함으로써 폭력을 체계적으로 조장하는 술책. 실제 오웰이 지적하였듯이 온건한 좌파가 다수였던 공화주의 정부의 두 주축 세력이었던 통일사회당과 통일노동당은 팔랑헤의 바로 이 이념적 혼선을 책동한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극단적이고 참담한 적대자로 분열하여 자멸하고 만다. 사회당에 의해 프랑코의 제5열로 불린 노동당의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오웰이 간신히 국경을 넘어 스페인을 탈출하는 것도 이러한 전술의 결과였을 것이다.


진실 추적 과정에 대한 소설적 구성과 내용은 건너뛰어도 될 것 같다. 그 과정에 밝혀지는 산체스 마사스의 정치와 작가로서 글쓰기 행위에 걸친 국민에 대한 정치적 책임의 희석화 행보, 귀족 계급으로서의 무기력과 퇴폐적 삶의 모습이 교차하며, 실제로 자신은 믿지도 않았던 구시대 가치를 찬양하며 배신과 비겁함을 행했으며, 국민을 야만적 대학살로 몰았으나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 채 세상으로부터 잊힌 존재가 됨으로써 야만적 책임을 졌던 인간을 확인한다.

 

나라를 미친듯한 피의 축제에 내몰리도록 유도한 인간이 영웅이 되는 시대는 정말 불의하다. 책은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당초 구상대로 진행되지 못하며 집필 의욕이 꺾인다. 아마 책의 3스톡턴에서의 만남에 이르러 다분히 소설적 분위기가 살아나는데, 이러한 집필 좌절의 곤혹감에 몰려 있을 때 우연하게 스페인 해안 마을에 살고 있던 칠레 출신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를 인터뷰하는 기회를 얻는다. 아옌데 시절 칠레 혁명에 동참했고, 피노체트 시설에는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볼라뇨에게 하비에르는 아옌데의 몰락과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묻게 되고, 아옌데는 영웅이었다는 답변을 듣게 된다.

 

볼라뇨는 영웅은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죽이지 않는 자,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자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영웅을 정의한다. 그리고 영웅의 행동에는 거의 언제나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있으며, 이것은 지속적일 수 없으며, 단지 예외적으로 어느 한 순간만 영웅일 수 있다고 답변한다. 이 대화는 집필이 좌절된 하비에르의 구상에 전환을 가져온다. 나라를 내전에 몰아넣은 자의 역사적 무책임성에 대한 물음에서 좌초되었던 글쓰기는 맹목적 본능에 압도되어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름없이 사라진 청년들의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진정 역사의 영웅은 누구인가? 무명용사들, 고통에 신음하다 세상에 외면당한 채 사라져 간 그들의 얘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음이다.

 

이미 죽은 친구들, 패배가 뻔한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 마치 전혀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밤새 옛 동료의 넋과 두런거리며 잠자리를 설치는 외진 요양원에 누워 여생을 보내는 생존자들의 역사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볼라뇨는 스페인에서의 삶을 이어가기위해 캠핑카 공원의 경비원을 하던 일화를 소개한다. 그곳에서 만났던 미라예스라는 노인의 삶의 이야기를. 헷갈리는 사상이나 혁명적 열정이 아니라 단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동정을 느껴 파시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싸웠던 당시 청년의 이야기를.

 

나는 이 3부의 볼라뇨로부터 시작된 미라예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는데, 아마 르포 기사 같았던 역사적 시간의 거슬러 올라가기라는 무거움에서 해방되어 인간적이고 심미적 향취가 물씬나는 서사의 등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주 슬프고 오래된 파소 도블레 가락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며 그 가락을 입 속에서 흥얼거리는 미라예스를 관찰했던 일화는 산체스 마사스의 생존담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마사스가 총살처형장에 가기 전에 그들을 감시하던 공화군 한 병사의 흥얼거리던 파소 도블레와의 막연한 일치의 놀람이다. 혹시 볼라뇨가 말하는 미라예스가 산체스 마사스를 못 본 척 해주었던 그 공화군 아닐까하는 기만적인 추정에 이른다. 그가 동일인물이 아니란 법이 어디 있는가?

 

야만을 물리치고 문명이 자기 손에 달려있음을 상상은 물론 어떤 자각도 없이 참전했던 젊은 무명용사를 찾아 하비에르는 조국도 아닌 다른 나라(프랑스)의 쓸쓸한 도시에 있는 빈민 복지 시설의 방 하나에 잊힌 채 살고 있는 미라예스를 찾아낸다. 하비에르는 미라예스에게 산체스 마사스의 얘기를 들려준다. 전쟁을 단지 이야기로 전하는 사람들에게만 소설처럼 들릴 거라는 하비에르의 얘기에 미라예스는 헤밍웨이를 예로 들며 철딱서니 없는 놈!“이라며 전쟁을 심미적 취향으로 변질시킨 문학을 비아냥댄다. 아마 하비에르가 미라예스의 입을 빌어 미국작가를 향해 뒤틀린 심사를 대변시킨 것인 것만 같아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여기서 다시금 영웅론이 나오는데, 미라예스는 영웅들은 죽거나 살해될 때 영웅이 되는 것이라고, 진정한 영웅들은 전쟁터에서 죽는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영웅이란 없다고. 젊은 양반 모두 다 죽었어요, 모두 죽었어요, 죽었어, 죽었다고.” 이 대화는 내게 아주 오래 기억될 것 같은 감전과 같은 충격적 언어였다고 해야겠다. 나는 친구들 꿈을 꿉니다. 그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요, 모두들 그때 모습 그대로 내게 인사를 건네요. 그때처럼 여전히 젊지요.”

 

그들이 왜 죽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진정 영웅들이었는데, 새로운 가치를 위해, 인간적 삶의 자유를 위해 본능적으로 뛰쳐나갔던 참된 존재들이었는데, 자기 이익을 위해 세상을 전쟁으로 내 몬 인간만을 기억한다. 진정 문명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인간은 누구인가? 라고 소설은 내내 묻는다. 무명용사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는, 역사 기술(記述)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반정치적이며 반역사적이고 비인간적 권력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역사로부터 배움에 대한 사유는 그치지 않고 우리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음에도 여전히 눈 감고 외면하는 무관심을 생각하게 된다. 이제 하비에르가 폄훼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로 세 번째 스페인 내전 소재의 문학 작품읽기로 이어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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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1-15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탈로니아 찬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는 읽었습니다. 스페인내전도 읽었구요 이 책은 못 읽어봤네요. 가져갑니다.~♡

필리아 2023-01-16 09:18   좋아요 1 | URL
즐거운 독서와 함께 따뜻한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