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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스탠딩 - 도덕적 허세는 어떻게 올바름을 오용하는가
저스틴 토시.브랜던 웜키 지음, 김미덕 옮김 / 오월의봄 / 2022년 6월
평점 :
“군중은 과도한 감정에서만 감명을 받는다. 과장하기, 기존의 것을 무조건 긍정하기, 반복에 기대기, 추론, 입증하지 않고 믿기. (..,) 군중이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가질 때 모두는 막대한 대가를 치른다.” - 귀스타브 르봉, 『군중 심리』에서, 본문 123쪽
아마 이 순간에도 소셜 미디어의 피드는 물론 정치적 활동을 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도덕적 형상을 한 이야기로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려는 말들과 행동이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항상 자신이 다른 인간들보다 더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자기 과신의 현상에 반성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자신감 과잉의 사람들이 넘쳐날 때 의견이 틀렸음을 확신시키는 것은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진다. 결국 그 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고스란히 그 사회적 손해가 구성원 개인들이 감수하여야 할 몫이 되어 돌아온다.
책은 바로 이러한 도덕적 이야기를 오용, 남발하는 우리 세상에서 이들 무책임한 도덕적 이야기의 가면을 뒤집어 쓴 이야기들을 줄여나가고 개선하려는 모색이다.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이란 이처럼 자기 과시를 위해서, 타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서, 자신이 저지를 나쁜 짓을 덜 의심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현상이나 문제사안을 도덕적 이야기로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포장하여 퍼뜨리는 행위이다.
하나의 당파에서 정치적 발언이나 행위가 있고나면 쇠파리처럼 달려들어 그 정치적 발언의 함의보다는 발언자와 행위에 대해 거친 욕설과 조롱의 언어에 도덕성을 입혀 마치 자신만은 높은 도덕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듯 악의적 공격을 해댄다. 왜 이 땅에는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고 만연한 것일까? 더구나 자신의 무례한 폭력적 언행에 일말의 죄책감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럴까? “자신의 도덕적 자질로 다른 사람들 - 자기편(당파), 자신의 내집단, 마음에 맞는 사람 등 - 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원하기 때문(41쪽)”이라는 것이다. 즉 일종의 인정욕구(recognition desire)의 발현이다. 도덕적 이야기에는 당위(當爲)라는 것이 있다. 즉, 도덕이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하고, 다른 사람을 마땅히 존중으로 대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랜드스탠딩, 도덕적 이야기의 오용은 정작 도덕적으로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훼손한다. 자기 과시와 위선을 가리기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덕적 이야기를 허영 프로젝트로 변질시켜 사회에 해악과 손실을 야기하는 매우 위험한 사회적 양태로 전락시키기에 나쁜 행위이다.
더구나 그랜드스탠딩은 정작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들의 보호 장치로서 도덕적 이야기가 사용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남용되어 도덕적 이야기들을 더 이상 실천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로 무시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정치 활동자들은 이러한 작태를 멈추지 못한다. 도덕적 이야기를 함으로써 명성과 지배력이라는 사회적 위상의 점유가 이루어지는 탓이다. 이를테면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끌어내 참담한 망언을 내뱉으며 자신은 도덕적 자질이 뛰어난 여성 정치인이라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이다. 자기 당파에서 좋은 위치를 자치하기 위해 당파 내 도덕적 우위를 점하여 지배력을 충족하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꾸며내고 마치 그것이 옳은 것인 양 내세우는 것이다. 이때 대중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저급하고 폭력적이며 비열한 언행을 마치 영웅적이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 칭송하는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와! 용감하고 존경스럽고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군.(25쪽)”
이것은 절대 도덕적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선을 가장한 자기과시의 도덕적 이야기라는 그랜드스탠딩이라는 개념어가 탄생한 것이다. 이들 그랜드스탠더들의 악의적 오용을 비판하는 것에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들먹이며 정당한 언행이라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다. 이는 터무니없는 항변이다. 어느 누가 거짓말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자유로운 발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거짓말, 폭력적 언행은 나쁜 것이어서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다. 원하는 무엇이든 다 말하고 아무 방식으로나 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의 폐해는 사회 전반에 대한 퇴행을 야기하며, 어렵게 쌓아 온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치경제적 윤리 토대를 망가뜨린다.
저자들은 말한다. 이 사악한 정치적 그랜드스탠딩에는 공통으로 사용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음을.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더욱 분명하게 과시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비단 기성 정치배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중 일반의 행위도 여기서 한 치의 다름이 없다. 누군가 최저임금 인상률이 높다고 기업의 경제적 성장을 방해하는 경영간섭 행위라며 비난을 퍼부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의 발언자는 자신의 도덕적 색채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여기에 ‘보태기’를 한다. 자신의 비난을 덧붙이는 것은 별다른 노력 없이 간단하고도 비용이 적게 드는 자기 과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으로 더욱 비난을 증폭하는 ‘치닫기’가 이어진다. 올바른 도덕적 주장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를 능가하려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비교 속에서 도덕적 모범의 지위를 지키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만이 넘실댈 뿐이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613/pimg_7290341033444632.jpg)
여기에 상대에게 거짓 도덕적 혐의를 씌우기 위해 엉뚱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날조하기까지 한다. 이 ‘날조하기’가 그랜드스탠딩의 핵심 요소가 되기 일쑤다. 왜 태연히 이런 짓이 만연되어 행해지는 것일까? 이것은 “도덕적 무지렁이인 대중이 대수롭지 않다거나 순수하다거나 심지어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지지하기 때문(97쪽)”이라는 것이다. 날조하기는 도덕적 고려의 불법 사용의 전형이다.
이것은 지난 5년간 ‘도덕 경찰’로 나선 인간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반대파의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몹시 규정하고 싶어 안달이 난 인간들은 일거수일투족에 도덕적 비판을 찾아낼 여지를 찾아내 날조한다. 우리는 세상 무엇에서든 도덕적 비판을 찾아낼 수 있는 동물이다. 아마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황색신문의 사설은 지난 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도덕적 비난거리를 찾아낼 동기를 찾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합리적 추정이나 증거 없이 일단은 날조하여 도덕적 이야기로 공개적 비난을 가한다. 상대의 신뢰를 추락시키면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저렴하고 용이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당파적 미디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표현한다. 이것은 정치를 게임으로 인식하는 신나는 즐거움이다. 마치 특별한 도덕적 열의와 열정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도록하는 데 ‘강렬한 감정’의 투사는 도덕적 신념을 전달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이면은 흉측하기 그지없다. 자신들과 자신들이 지지하는 당파가 도덕적 화신이라는 자아개념을 강화, 확산시키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는 독특한 특성을 보인다. 그 어느 사회보다 미디어의 이기적 동기가 대중의 신념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결국 대중의 깨어난 의식 정도에 비례하는 이유 때문이다. 대중의 무지를 양식으로 존속하려는 것이 곧 황색 미디어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랜드스탠딩의 마지막 방법적 요소인 ‘무시’하기는 이를 표현하는 인간들의 본질을 설명해준다. 대체로 이들은 자신만이 부정의에 싸워 온 사람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권위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데 내 세운다. 시민대중을 개, 쓰레기로 표현하며, 자신과 다른 일체의 의견은 조롱의 대상이며 묵살해도 된다고 확신한다. 검찰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검찰개혁을 추진하려는 권력에 맞선 것을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 권력을 손에 쥔 검찰 권력은 도덕적 이야기로 모든 반대 의견을 무시하는 방편으로 사용한다.
공적 정치 담론의 세계에서 그랜드스탠더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오직 시민 대중의 몫이다. 만일 그랜드스탠딩의 이 같은 만연으로 인해 야기되는 정치적 양극화, 냉소주의, 분노 피로를 방치할 경우 그것의 폐해는 오롯이 시민 대중이 치러야 할 대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대가는 사회의 단순한 정서적 분열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례로서 어떤 인간은 소셜 미디어에서 상대 세력을 지지하는 인간들이 다 죽어야 한다는 끔찍한 생각까지 발언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증오의 심화는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이 분열과 증오는 전체주의 권력 출현의 유용한 토양이 되어준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후퇴, 전체주의 권력의 부상, 정치경제의 도덕성 퇴락으로 인한 경쟁력 훼손, 냉소주의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의 확산으로 치안의 피폐성 초래,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소외와 무시의 확산으로 폭력의 증가 등 이루 열거 할 수 없는 사회 전반적 퇴행을 가속화한다. 아마 어렵게 올라선 선진국이라는 상표는 금세 벗겨질 것이다. 한 사회집단의 선진화는 그 사회의 윤리적 토대를 딛고 서있는 것이지 물질적 토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적 윤리 토대는 곧 정치 사회의 공고한 민주성이다. 이것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침몰하게 되어있다. 우경화된 보수 집단이 주류가 되었을 때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지 멀리 갈 것도 없다,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은 반면교사일 것이다.
“자기 과시를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하지 말라!” - 도덕적 대화를 위한 격률, 178쪽
그랜드스탠딩이 사용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은 넘쳐난다. 왜 상대방을 조롱하고 폭언을 가하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일까?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기에 나쁜 것이다. 인종차별이 왜 나쁜 것일까? 상대를 동등하게 존중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도덕적 이야기를 도구로 하는 그랜드스탠딩이 나쁜 이유는 도구의 오용 때문인 것이다.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이기적 사용이라는 자기 전시 욕구,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전략적 이용으로서 거짓말이라는 기만성, 도덕적 이야기라는 공동 자원의 오용으로 인한 사회적 신뢰의 훼손 및 공론장의 오염으로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이다. 철학자 ‘폴 그라이스’가 제시한 대화 일반 원칙이랄 수 있는 ‘대화 격률’은 훼손된 이 땅의 공적 담론장을 위해 필히 참조, 도입할 유용한 가치를 제공해준다.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말하지 말라, 연관성을 가져라, 표현의 모호함을 피하라, 질서를 지켜라, 상대를 조롱하는 등 인신공격을 하지 마라....” 우리의 공적 정치 담론장에는 이러한 대화의 원칙이 없다.
그랜드스탠딩은 당파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무엇이든 너무 많이 쓰면 그것의 힘은 약화된다. 특히 도덕적 이야기를 자기 편익을 위해 사용하기에 그랜드스탠딩은 특별히 너무도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낳는다. 이제 정의와 공정성과 같은 도덕적 언어는 신랄함이 퇴색되고 진부하여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치배들은 새로운 용어와 극한적 표현으로 치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혐오를 부추기고 냉소와 무감각을 촉진하는 증오의 언어가 온통 정치 담론의 장을 채운다. 철학자 ‘쿠르트 바이어’의 도덕적 이야기에 대한 일갈은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요구한다.
“도덕적 이야기는 보통 혐오스럽다. 도덕적 비난 쏟아내기, 도덕적 분개를 표현하기, 도덕적 판단을 퍼뜨리기, 비난 받을 자를 정하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 누가 이런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겠는가?” - 쿠르트 바이어, 141쪽
처절한 사회적 대가를 치루지 않기 위해, 분열된 정서적 분열을 끝내고 연대하기 위해 우리는 공적 도덕 담론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물론 인간의 케케묵은 자기 과신의 본성을 뛰쳐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논쟁이 팽배한 정치 기후에서는 그 어떤 충고나 제안도 정적을 향한 은밀한 공격이라고 보고 다시금 음해와 폭력을 가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뤄내야 한다. 공개적 비난을 할 유혹을 참아내야 한다.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그 어떤 발언에도 우리는 외면해야 한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그랜드스탠더가 원하는 자기 도덕 과시의 욕망을 통한 이기심은 사그라질 것이다.
당파적 뉴스를 피하고 그랜드스탠더의 소셜 미디어를 언팔로우하라. 우리의 인정 욕구는 재설정 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가 아닌, 진정한 도덕적 실현의 장은 즐비하다. 정말 선의가 필요한 곳에서 우리의 덕성을 실현하면 아마 삶이 즐거워 질 것이다. 우리는 교육에서 비판적 사고와 자기 믿음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제라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스스로의 편견에 맞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죄 추정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마 공적 정치 담론의 세계를 정화하고 이 세계에 진정한 믿음과 도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갈등과 혐오로 분열된 세계를 봉합하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다. 정치가 도덕성을 오용하는 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옹호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당위의 세계를 생각게 하는 오늘의 정치 윤리 정화를 위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역작(力作)이라 하는데 주저치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