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셔기 베인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1년 12월
평점 :
자신의 열망이 지향하는 것과 현실적 삶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과의 간극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곤 한다. 오늘의 세계는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이 욕구를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취급하며, 그 책임은 오직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에 돌린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그야말로 효율성과 합리성을 토대로 한 신자유주의의 약육강식 생존 논리가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시대이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산업 구조 조정이 무참하게 감행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직자가 되어 길거리로 내쫓기고 가족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던 시기이기도 하다.
탄광을 비롯한 오래된 제조업 기반의 도시 글래스고는 마거릿 대처의 이러한 경제정책에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 도시이다. 이 소설을 마냥 등장인물들의 사적 삶이라는 인간 내적 욕망의 갈등이 빚는 비극이라는 시선만으로 읽을 수 없게 한다. 소년 '셔기(휴)'가 알코올에 중독된 엄마 '애그니스'의 열망을 "새로운 물건에 둘러싸여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502쪽)"하는 것이라고 감지하듯, 마치 물질만이 사람을 갱신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희망이 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한 사회가 그 책임을 외면할 때 빚어지는, 닿지 않는 욕망으로 자멸해가는 인간들의 초상이 바로 이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소설은 직접적으로 자의식 강한 세 아이의 어머니인 애그니스가 겪는 도달되지 못하는 욕망을 오직 강자가 구축한 환경 탓이라고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계층구분의 확고화와 일자리를 잃고 무력감으로 뒹구는 남자들, 실직과 장애 수당에 기대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억척스러워진 여인들처럼 사람들에 스며든 삶의 배경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계층화와 인간 구별 짓기는 도처에서 명료하게 드러나 배제된 인간들에게 '수치의 낙인'을 찍는 장면이 반복되어 등장한다. "실눈을 뜨고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들의 시선(341쪽)" , 억양과 사투리처럼 언어습관에 배어있는 말투로도 인간을 차별하는 "억양의 굴레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521쪽)."라는 절망에 지배되고, "서로를 보기에 꺼리는 두 세계의 잔인한 대조(410쪽)"로서 외딴 공영주택단지와 기막히게 고급스러운 회원제 골프클럽은 그야말로 그 어느 누구도 새사람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세계,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가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셔기 베인'이라는 소년이다. 그의 관점에서 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비가(悲歌)이다. 세 아이, 릭, 캐서린, 셔기(휴)의 엄마인 애그니스는 소비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전형적 여인으로, 세련된 표준어를 사용하는 자의식 강한 여성이다. 종일 앞치마를 두르고 가부장적 남편을 위해 집에 노예처럼 묶여있는 삶을 원했던 첫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와 결합하지만 결코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둥이에 가족을 돌보려는 의지조차 없는 쓰레기다. 물질적 욕망이 곧 자존감인 여자는 이 현실적 상태가 빚어내는 괴리를 회피하지 못하고 술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셔기의 아빠인 둘째 남편 빅 셕은 아내와 세 아이를 정부의 폐광조치로 죽어가는 동네, 핏헤드의 공용주택에 버리듯 밀어 넣고는 다른 여자와 결합하기 위해 떠나버린다. 여자의 물질적 욕망이란 고작 카탈로그에서 아이들에게 입힐 옷과 집안을 꾸밀 소박한 가구이며, 물질문명이 이룩한 도시의 화려함에 참여하는 작은 이벤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곰팡이가 피어난 주방 벽, 이탄 가루를 뒤집어 쓴 동네 여자들과 아이들의 꾀죄죄한 추레함처럼 가난과 절망의 분위기에 잔뜩 눌려있는, 도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탄광동네는 애그니스를 치욕과 좌절의 수치심과 슬픔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애그니스는 알코올의 지배력에 점점 빠져들고 취기는 남자들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 그녀의 주장처럼 "슬픔에서 벗어나려고"마셨거나 "힘든 날에 맞서 싸울 투지를 불어 넣(416쪽)"기 위해 마셨거나 아이들과 주변사람들을 더불어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아이들은 이 끔찍한 터전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위한 탈출만을 모색하고, 딸 캐서린은 오직 이 목적만을 위해 결혼하여 애그니스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큰 아들 릭조차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느끼게"하는 이 지옥같은 가정이라는 공간을 떠나기 위한 자립을 준비한다.
소설의 시점(視点)인 어린 아이 '셔기 베인'은 형제들의 떠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적 정체성을 지닌 연약한 아이는 어머니 애그니스에 삿갓조개처럼 찰싹 붙어산다. 망가져 가는 여인, 그녀를 성적으로 이용하려 만드는 추악한 남자들과 애그니스의 미모를 이용하여 술턱을 보려는 잡년들로부터, 알코올에 젖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으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위해 어린 아이는 자신의 욕구와 분노를 참아내며 어머니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꾼다. 애그니스의 "넌 커서 어떤 남자가 될 거"냐는 물음에 셔기는 대답한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 걱정 좀 안 하고. (...) 모르겠어요. 난 그냥 엄마랑 있고 싶어요.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엄마를 데려가고 싶어." -366쪽
그럼에도 애그니스란 인물을 묘사하는 다음의 문장은 그녀가 얼마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온 몸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린 다음날에도 그녀는 가장 좋은 모피 코트를 입고 세상을 마주했다. 자신과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머리에 힘을 주고 사람들이 달리 생각하게 했다." -372쪽
어쩌면 세상의 관점을 지극히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타인 앞에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연출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자의식이 버텨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희망이 결핍된 병색이 도는 동네의 여인네들에게는 그녀의 우아한 말과 차려입은 옷차림, 하이힐의 또깍 거리는 소리는 외설과 천박한 몸부림으로 비칠 뿐이다. 동네의 모든 인간들 역시 세상의 계층화, 서열화를 체화하고 이들 모자에게 혐오와 멸시의 폭력을 무시로 행사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닮은 애그니스, 그녀의 미모는 또 다른 남자의 시선을 끌고 여자는 알코올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란 기대를 갖게 하지만, 택시 운전이라는 그나마 일자리를 붙들고 있는 운 좋은 사내는 "당신은 정상으로 보이거든.(409쪽)"이라며, 인간을 범주화된 사고의 틀로 들이민다. 그의 세계는 이 차별이라는 분리 의식에서 한 치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사실 이 한 마디의 언어에서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는 것임을 예견케 했을 것이다.
음울한 실패자들의 외딴 동네인 핏헤드를 떠나 삶의 다양성이 반짝이는 도시로 이사한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물질이 있는 곳이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이 자기기만적 실행은 철저한 거짓 환영으로 드러난다. 셔기에게도 이 같은 희망은 물거품처럼, 엉겅퀴의 솜털처럼 날아가 버린다. 이사 가면 절대 마시지 않겠다던 약속을 애그니스는 당일부터 어기기 시작한다. 분노한 셔기의 실망의 소리에 애그니스는 셔기를 쫓아내기까지 한다. 형 릭의 작은 거처를 찾아들었을 때 그는 셔기에게 말한다. 너도 떠날 수 있다고.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 자신뿐이라고. 셔기는 반박한다. 엄마를 누가 보살피냐고, 엄마는 그럼 어떻게 낫겠냐고.
"이제껏 자신들이 '수건돌리기'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규칙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확신이 가슴에 와 박혔다." -555쪽
엄마의 생명을 빼앗아갈 만큼 술은 강력한 것이었다는 셔기의 회한은 그와 같은 환경의 소녀 리앤의 깨달음의 언어가 되어 들려진다.
"내 생각엔 알코올중독자들이 원하는 게 결국 그것 같아. (....) 죽는 거 말야. 단지 어떤 사람들은 한참 멀리 돌아가는 것뿐이야." -536쪽
사랑한다는 말을 유령에게 속삭이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어머니에게 날려 보내는 소년의 몸짓, 셔기와 애그니스 모자를 끈끈이에 붙은 파리처럼 달라붙게 하고 무(無)로 둘러막았던 고달펐던 탄광촌의 삶조차도 어머니를 잃어버릴 일 없던 곳이었다고 회한에 애타게 하는 연민과 그리움은 읽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하지만 이러한 감상적 느낌에 마냥 빠져있기에는 이 세상이 뿜어내는 인간에 대한 적대적이고 탐욕스런 시선들이 더욱더 위협스럽게 여겨진다.
빈곤이 초래하는 비참은 이 빈곤과 떨어지지 못하게 연관된 도덕적 곤경과 폭력을 항시 수반한다. 이를 버텨내기 위한 여인의 분투는 스스로 붕괴되는 수순을 밟지만 그 애달픈 와해에 저항하기 위해, 어머니를 향한 한 소년의 애끓는 사랑의 노래가 전면에 흐르며 우리네 마음을 마냥 젖어들게 한다.
근심 없는 평화로운 마음을 지니는 것조차 그렇게도 힘겨운 우리들의 이웃이 있다. 약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더 취약한 약자에게 보내는 비틀린 부도덕의 관점 또한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계, 꿈의 가능성을 기대치 못하게 좌절시키는 세계는 자신이 강요하여 만들어낸 희생자를 외면하는 무책임이요 책임 회피 아닌가? 애그니스와 그녀의 자식들, 셔기, 릭, 캐서린과 같은 이 세계의 모든 자식들이 정말 희망에 부푼 삶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감히 꿈꾸어 본다. "빛나는 구두 축으로 빙그르" 도는 셔기 베인의 춤을 미소와 함께 그리며, 축복의 입맞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