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의 역사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김하현 옮김 / 현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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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완전하게 예측,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있다면 살아가는 것에 어떤 의미, 어떤 세상이 펼쳐 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삶을 선택 과정의 연속이라 말하곤 한다. 그런데 미래를 남김없이 안다면 그저 예정된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미래를 미리 알고자 안달하지만 정작 알게 되었을 경우 목표도 희망도 성취도 어떠한 의욕도 쓸모 없어지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세상을 예견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또한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기에 이 예측의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무수한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역사학자 '마틴 반 크레벨드'는 이처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예측하고 그에따라 행동하려는 것은 "생명 현상의 본질"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역사 내내 예측을 위해 사용된 방법들과 추론의 과정은 당대 인간들의 신념을 드러내 주리라는 것이며, 이 것은 곧 인간성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작업이라 주장한다. 인간의 예측 방식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과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고대 샤먼에서 현대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하는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인간 능력의 본질을 추적한다. 이 역사적 탐사에서 어쩌면 우리들은 기존의 관점을 수정해야 하는 망설임의 지점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1. 변성 의식 상태를 요구하는 예측



'변성 의식'이라 함은 "중독, 희열, 가수 상태, 꿈"과 같이 정신 기능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의식이 명확히 깨어있을 때의 일반적 기준을 현저히 벗어난 상태(28쪽)"를 일컫는다. 고대 사회의 예측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샤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했다. 평상시와 다른 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 샤먼의 예측 능력, 마술적 힘을 지니게 된다고 믿었다. 이 샤먼이 21세기라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발생 초기부터 '어처구니없는 사기꾼, 위험한 악령을 불러들이는 악마, 어린아이의 정신적 산물'과 같이 샤먼에 대한 의구심은 항시 따라다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기이하고 불길한 꿍꿍이를 지닌 존재에 대해 불신을 보내며 이성적 판단을 요구한다.


『구약』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에게 영감을 받아 미리 이야기 하는 자" 로서  예언자(prophet)라 하여 샤먼과는 구분하지만 그 본래의 특성은 결코 샤먼이 하는 영(靈)의 교류와 다르지 않다. 에레미야, 이사야, 엘리야 등등 이들이 예언을 하려 할 때면 "아이고 배야! 아이고 가슴이야...(「에레미야」4:19)",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포도주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되었으니(23:9)"와 같이 변성 의식 상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신탁을 내리는 피티아 또는 시빌라로 불리던 예언자 역시 섬망의 발생을 자극하는 가스를 흡입하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불분명한 내용을 주절거렸으며, 이것을 신관들이 해석한 것이 소위 신탁이라는 것이었다. 꿈 또한 해몽가가 달라붙어 자신들의 꿈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욕망을 들어줬다. 아침에 깨어 꿈으로 뒤숭숭해하는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정치적, 군사적, 왕의 신변에 대한 미래를 예측하는 해몽가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죽은 자와 상담한다는 심령술사는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더욱 번창했던 예언 행위의 일면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나 단테의『신곡』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미래를 알고 있는 자들로 등장하여 예언적 말들을 들려준다. 오늘 현대 합리주의 이성을 지닌 우리들은 심령술에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과 혼란의 징표라고 여기기도 한다. 더구나 1326년 교황 요한 22세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한 심령술사 처단이라는 강력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심령술사는 어디에나 있었다는 당대 역사의 증언처럼 중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190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는 심령연구협회장을 맡기도 했다니 입증 불가능한 영매에 대한 사람의 오묘한 마음에 대한 주소를 가늠케 한다. 이러한 영적 믿음에 대한 심리학적 규명을 떠나서 인간의 문화적 신념 그 자체로 이해 될 필요가 있다.



2.  합리적 예측의 형식을 지닌 것들



샤먼,구약의 예언자, 신탁 예언가 시빌라, 꿈 해몽가. 심령술사 등 이들은 한결같이 변성 의식 상태에 기초한 예측 행위들이다. 근대 사회 이전의 모든 예측이 이처럼 이성과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 예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세히 관찰하고 규칙을 만들어 적정한 추론에 의한 미래 예측을 하기도 했다. 점성술(astrology)은 그 대표적인 예측 방식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그 주기적 질서를 인간의 삶과의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이 방식이 합리성을 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황도대의 12궁과 인간의 네 가지 기질(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사이의 관련성(133쪽)"으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그 유사적 유추는 조잡해 보이기까지 한다. 한편 징조나 전조와 같이 일상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새롭고 드문 현상의 목격은 인간에게 정신적 경각심을 야기하고, 이는 곧 명백한 미래의 현상을 암시하는 예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혜성의 다가옴이나 태양 흑점의 증가나 감소는 다가올 재앙으로 해석되거나 인 간 영혼에 대한 유리와 불리함으로 유추하곤 했다. 이에대해 '성 아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징조는 해로운 호기심과 마음을 괴롭히는 불안, 지독한 예속으로 가득 차있다. 

징조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고 기록을 하기 때문에 

징조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147쪽





이러한 믿음들의 역할이 사라지게 된 것은 과학 혁명이다.  혜성은 재앙이 아니라 단지 주기적인 운동일 뿐임을 증명한 '에드먼드 헬리'의 정확한 관측에 의한 과학적 예측의 정확성에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번개 또한 신의 징벌이 아니라 구름의 전기 방전 현상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발견처럼 '세계의 탈주술화'에 밀려난 것이다.  기원전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 역시 점술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의 증거라고 힐난했음에도 주술 세계에서 벗어난 오늘에도 이들 전근대적 예측 방식은 여전히 그 믿음을 따르는 인간을 없애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비이성적 예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이들 예측의 모호함에 의존한 자의적 해석이 주는 자기 위안적 예언의 가능성과 유치하기까지 한 유아적 유추가 주는 수월함이라는 무사유의 편리함이며, 과학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직접적인 강렬함의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바이블 코드(Bible code)'라는 성경의 문장을 낱개의 알파벳으로 열거한 후 그것을 종과 횡, 대각선으로, 혹은 한 자 건너 한 자를 읽으며 마치 예언적 문구가 있었다며 예수의 예지력을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것에 대한 믿음도 여전히 횡행한다. 이 방법들은 "『성경』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책에도 적용 가능(193쪽)"하다. 개개의 인간마다 그들이 성장하고 활동하는 문화적 공간에 다소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이들 미래 예측 방식은 이러한 문화적 태도와 믿음이 결합되어 특정 개인들에게 주입된 문화의 영역에 좌우되곤 하는 듯하다. 이렇듯 터무니없는 헛소리이지만 바로 그것에 은닉된 인간 본성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도 하다.



3. 현대적 예측 방식



현대적 예측 방식은 분명 다음과 같은 클리셰를 기초로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미래는 과거의 앎을 양분으로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거나 주기적으로 순환한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과거의 관찰,  역사적 교훈을 발견하면 미래를 보다 근접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속성들이 있다. 권력의 속성이나 이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누천년간 변하지 않은 것들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불변하지 않는 세계의 패턴을 주장하는 목소리지만 오늘 이러한 논리로는 아무런 예측도 내 놓을 수 없다.


이 역사적 패턴의 순환이나 반복이라는 생각은 오늘에도 건재한데, 특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의 주기 이론이다. 쿠즈네츠 사이클이나 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은 불황과 호황 설명의 주류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기라는 것은 본디 고저를 오르내리는 것이고 이들의 주기 년한이란 것이 항상 들어 맞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들이 중요 변수로 사용하는 물질의 중요성은 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여 실제 경제를 반영하지도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무수한 자료들 중에서 어떤 자료(변수)가 유의미한 지를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지만 의미의 유효성과 무효성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특정 변수를 이용하는 것은 예측의 정확성을 심하게 왜곡시키곤 한다. 저자 크레벨드는 인간 예측의 역사 이래 "지속적이고 확실한 하나의 '마스터 키'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213쪽)."고 단정하기까지 한다. 1965년 인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고든 무어'는 집적 회로의 트랜지스터 수가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할 것이라 선언했으나 이 예측은 오늘에는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못하는 무용한 예측이 되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 관계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드디어 오늘을 휩쓰는 예측의 기술인 변증법적 역사 방식에 기초한 '트렌드', 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적 변화의 개념을 반영한 예측 방식이다. 사실 오늘날 기업의 경영계획을 비롯한 국가의 예산 계획은 모두 이 트렌드에 외삽법을 가미한 예측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추세를 전제로 하여 이 연장선 위에 미래의 일정 시점에서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이다. 세계의 위대한 석학들인 스티븐 핑거, 유발 하라리, 레이 커즈와일 등의 저술 상의 예언들은 이 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방식 또한 우리의 인지 편향을 배제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트렌드(추이)란 여기에서 나올지 모르는 이익을 얻고자 하는 트렌드가 가세하여 스스로 가속화, 증가한다. 또한 외삽법 역시 주로 발전 중인 분야에 촛점을 맞추기에 이것은 예측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방향을 심화시키는 일종의 방향 제시가 될 우려를 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결코 자연 과학의 법칙을 따른 적이 없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항상 물이 되듯이 인간 세계는 불변의 동일한 상황을 낳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늘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왔다. 즉 변증법적인  "더 높고 새로운 수준으로의 고양"을 향해 걸어왔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강력한 예측 도구로서 통계학을 토대로 하는 모델, 그 알고리즘을 통한 예측에 나섰다. 이것은 점성술이나 역사 주기론과 같은 자의성이 개입된 단순 합리론도 아니며, 변성 의식 상태에 의존하는 영적 예측도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중대한 특이점이 있다. 이 모델 예측 방식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예측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집단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251쪽)"는 것이다. 보험업자는 특정 인간이 교통사고를 낸다고 예측하지 못하지만 나이, 성별, 년간 주행거리와 같은 범주에 따른 사고율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곤 막대한 수익을 얻는다. 이 통계적 확률 모델은 리스크 관리와 추정 이익 등을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모델 역시 수시로 중요 변수를 변화시켜 주어야 하며, 변수들의 배제와 포함 여부라는 선택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들 또한 인간과 환경의 복잡다단한 요소들의 빈틈없는 반영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한창인 선거 결과 예측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여론 조사 역시 통계적 모델 방식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표본집단 선택과 편향 배제를 위한 임의적인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여론 조사 발표는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끼쳐 예측이라기 보다는 미래 결과의 강화를 조장하기도 한다. 더구나 언제나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동요는 반영할 수 도 없으며 반영되지도 않는다. 다분히 정치적 이익 집단에 의한 조작과 왜곡이 개입하는 근대 이전의 샤먼이나 점성가의 예측보다 나을 것이 없는 방식이라 할 수도 있다. 외형은 과학적 도구인 통계를 이용하지만 여타의 섬망이나 직관적 유추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현대 과학의 엄청난 진보의 역량에 기대 막강한 컴퓨터 및 예측 장비 동원한 오늘의 기후 예측은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보는 별로 진전된 것이 없기도 하다. 다리가 쑤셔오니 비가 올 것 같다는 징후에 의한 예측이나 60% 비 올 확률의 예보가 무엇이 그리 다른가? 비는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이다. 60% 비가 내린다는 이 애매모호한 예보는 항상 옳거나 틀린 예측이다. 사실 이 표현은 외형적으로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예측 가능한 미래' 라는 표현처럼 역량 부족을 눈가림 하는 언어처럼 꼴 사나운 말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책 288쪽 부분 발췌】 


4. 결 어


인간의 예측을 향한 관심은 모두에서 말했듯이 생명 현상의 본질이다. 이 책의 여정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역사를 탐사하며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미친 인간의 헛소리이거나 터무니 없는 소리이고 음험하고 교활한 술책을 숨긴 조작된 말이지만 그것들은 당대의 나름대로 인간의 문화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과학화, 관료주의적 통제 방식이 휩쓰는 오늘날의 일관성, 규칙성, 신뢰성을 축으로 하는 과학적 예측이라 하여 그리 나을 것도 없다. 


아마 파우스트가 예측 불가능성을 토로하는 구절이 진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내 가슴 속에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구나,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무엇이 현실이 될 지 예측하는 것은 순전히 운 또는 기껏해야 직감이라 알려진 모호한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294쪽;파우스트1-1112,)"  



정말 중요한 예측의 누락이 있다. 결코 예측에 반영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무엇인가 관찰하려는 시도가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고, 아원자 수준에서 두 개를 동시에 측정 할 수 없다(295쪽)"는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나 복잡계의 카오스 이론처럼 인간에게는 완벽한 예측을 가능케 할 충분한 지적 능력 없음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인간의 '찬란한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기표가 기의에 정확히 일치하여 아무런 간극도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세계, 남김없이 명확한 미래의 예측이 가능하다면 과연 인간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까? 냉혹하고 모든 것이 그저 의미없이 거닐어야 하는 무의미, 아마 무(無)의 공간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예측 역사라는 지대를 탐사하며 예측이란 인간에게 삶의 고유한 향취를 더해주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개인의 예측이 배제된 현대의 세련된 과학적 예측 방식은 호기심 가득한 인간 본성으로부터 결코  점 술과 샤먼(무당)의 예언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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