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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책장을 펼치고 이야기들이 스스로 기어들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방법이라며 거장 '존 스타인벡'은 캘리포니아의 작은 해안 마을 '캐너리 로'의 "창녀, 뚜쟁이, 도박꾼, 개자식들(7쪽)"이자, "성자와 천사와 거룩한 사람들(8쪽)"인 어차피 뜻은 마찬가지인 인물들 속으로 들어간다.
소설을 시작하는 첫 쪽의 문장부터 이 마을의 인상을 아주 쿨(cool)한 시선으로 써내려가며 배배틀린 독자의 마음을 붙들어 맨다. "시(詩)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탤지어이고, 꿈"이며, "골함석으로 지은 통조림공장이고, 초라한 극장이고, 식당과 매음굴이고, 북적이는 작은 식료품점이고, 연구소와 싸구려 여인숙"인 마을이다. 첫 장을 이렇게 장황하게 옮겨 쓰는 이유는 이보다 소설의 배경을 잘 묘사할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규정하는 것들의 경계에 아슬하게 걸쳐있는 인간들, 도둑, 악당, 부랑자라는 낙인이 찍힌 인간들은 세상이 놓은 덫과 독을 피해 걸어 다녀야 하며 올가미를 건너 뛸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세상의 광기가 풀어놓은 이것들로 인해 자연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 소설은 바로 이들에게, 이 쓸데없는 잡년놈들에게 사랑의 자비로운 시선을 듬뿍 안긴다. 잡놈의 우두머리인 맥과 그의 패거리인 헤이즐, 에디, 휴이, 존스, 그리고 게이, 그리고 매음굴 '도라 플러드'이자 식당 '베어 플래그'의 사장인 잡년 도라와 그녀의 여자들에게.
어느날 '리청식료품점' 외상 최고 기록자인 어분(漁粉) 창고의 소유자인 호러스는 자신의 빚 탕감 조건으로 창고를 리청에게 넘긴 후 자살한다. "악하게 균형 잡힌, 그러나 선에 의해 허공에 매달린 상태를 유지(22쪽)"할 줄 아는 중국인 리청의 속셈이 이룬 성과다. 낡아빠진 허름한 창고 인수의 소문은 득달같이 맥 패거리에게 전달되고 맥은 리청에게 자신들이 그곳에 들어가 살아야겠음을 요구한다.
거절했을 경우에 닥칠 막대한 손해를 방지하고 이 거친 부랑자들의 요구를 승낙할 명분을 만들어 제시한다. 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 월 5달러의 임대료를 제시하고 양 당사자의 체면을 지키는 명목상의 계약을 체결한다. 맥은 정당한 계약을 하여 창고 사용 권리를 얻고 리청은 무상이 아닌 유상 계약이라는 대외적 체면을 지킨다. 이 현명한 거래는 두 사람에게 만족을 선사한다. 이제 무대는 어분 창고, 명명의 유래가 모호한 일명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그릴'은 맥 패거리의 거점이 된다.
캐너리 로라는 우주 중심을 공전하며, 저마다의 궤도를 자전하는 거점들의 지도를 그려봐야 할 것 같다. 각종 육상, 해양 동물들, 방부처리된 보존 생물들을 판매하는 '웨스턴 생물학 연구소'에서 도로 건너 대각선에 리청 식료품점이 있으며, 그 우측에 도라 플러드가, 좌측에 공터로 불리지만 공터 아닌 곳(버려진 보일러, 파이프에 인간들이 살고 있기에)이 있으며, 맥 패거리의 거주 창고가 있다.
웨스턴생물학 연구소의 유일한 연구원인 '닥'은 이들 경계인들의 "허무맹랑한 소리도 귀 기울여 듣고 지혜로 바꾸어 주는" 인물이다. 이 우주의 '철학과 예술의 원천'인 셈이다. 통조림공장에서 낡아 공터에 버린 거대한 보일러는 옆에 놓인 또 다른 거대한 파이프를 부랑자들의 침소로 세놓아 살아가는 부부의 옹색한 살림집이다.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보일러 석탄 투입구 속의 넓은 공간이 그네들의 거소다. 창문 없는 이 녹슨 쇠떵어리 공간에 예쁜 커튼을 꿈꾸는 아내의 이룰 수 없는 환상에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남자가 있다.
한편 법에 어긋나게 살기에 법을 두 배로 지켜야 하는, 때문에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도라는 그녀의 뻔뻔스럽고 더러운 죄의 값으로 몬터레이 기부금 가운데 최고액을 부담한다. 이런 연유로 경계 내 추악한 세계에 비하면 도라 플러드는 오히려 "견실하고 고결한 클럽"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자전하는 주요 행성이 얼추 소개된 것 같다.
"정말이지 닥에게 뭔가 좋은 일을 좀 해줘야 하는데." -42쪽
소설은 이들 행성이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인력에 의해 돌아 갈 수밖에 없는 궤도 탓에 발생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엉뚱함이 빚어내는 존재의 무력감과 고통 속에서 인간의 보잘것없는 만족감과 행복한 웃음을 길어낸다. 그것은 아주 짙은 향수(鄕愁)와 연민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깃든 시선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발단은 캐너리 로의 행성 모두가 연구소 닥에 대해 지니고 있는 부채감에서 비롯된 은혜 갚음의 의식이랄 수 있다.
"사회적으로 맥 패거리는 경계를 넘어버렸다." - 190쪽
닥을 위한 파티를 구상한 맥 패거리는 파티비용 마련을 위해 닥으로부터 개구리 마리당 5센트를 받기로 하고 개구리 잡이를 나선다. 사실 이 구실이 진정 누구를 위한 여정인지는 이 거래 관계의 해괴함에서 이미 드러난다. 이것은 의인화된 개구리들의 심리를 공포의 에피소드로 묘사한, 다분히 비유적 의미를 지닌 개구리 포획작업 장면과 오버랩된다. "이성을 잃고 버둥거리는 개구리들, 겁먹고 환멸에 빠진 개구리들, 개구리 역사상 최대의 참극(131쪽)"...이 벌어진다. 잡은 개구리는 리청의 재빠른 셈과 어울려 술과 햄과 샌드위치로 바뀌고, 닥이 없는 연구소에 진입한 맥 패거리는 난장판으로 파손된 연구소를 닥에게 남겨놓을 뿐이다. 드디어 맥 패거리는 세상이 깔아놓은 덫과 독을 밟았다. 이들에게 돌아 올 것은 사회적 낙인, 사회적 추방, 분노다. 몬터레이는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은 고립과 철저한 소외에 젖어든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다 병자야. 속이 안 좋고 영혼이 안 좋아. 하지만 맥 패거리는 건강하고 또 묘하게 깨끗해. (...) 자기들 욕구에 굳이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마음대로 충족시키지." -192쪽
머리를 숙이고 팰리스 플롭하우스에 나란히 앉아 연구소를 바라보고 있는 맥 패거리들을 정의하는 닥의 목소리다. 아마 소설이 독자에게 발설하고자 하는 이 세계의 비의(秘義)일 것이다. 우리들의 세계가 존경하는 미덕들(친절, 관용, 이해와 공감 등등)은 실패에 따르는 언어이며, 정작 혐오하는 것들(탐욕, 비열, 자기중심, 이기심 등등)은 성공의 특징들이다. 표면으로는 미덕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것들은 혐오의 결과물들이다. 닥의 믿음에 화답하듯이 맥 패거리는 몬터레이의 모든 것을 난도질해버릴 것 같은 광기 속에서 "덕이고 자비이며 미"의 존재자로 나선다.
닥이 무심하게 뱉은 가짜 생일은 캐너리 로라는 우주의 묵시적인 화합의 파티, 이 작은 우주의 성인인 '닥'을 위한 보은의 행사로 준비된다. 그러나 정작 파티의 진행이나 구성 등 본질에 대한 계획은 전무한 파티다. 파티는 어차피 계획과 의도에 따르지 않음을 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드디어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타 오르고〉,〈사랑〉이 울려 퍼지고, 손님들은 조용히 앉아 각자 자신의 내부를 향할 때, 닥은 "황금빛 기쁜 슬픔"을 느끼며 맑은 저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사랑을, 하나의 영혼을 얘기하는 'E.파위스 매서스'가 옮긴 「검은 금잔화」가 낭독된다. 도라 플러드의 그녀들, 리청, 맥 패거리들, 몬터레이의 경계인들에게 달콤한 슬픔의 유대가 전달되고 이들에게 기쁨의 미소가 빛나고 있을 때, 창녀를 찾는 이 세계의 규정 속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이 들이닥친다. 성자와 천사와 창녀와 개자식들이란 인간의 동일한 속성이 아니겠는가. 초라하고 소외되어 작아진 이들이 발산하는 지혜와 재치 속에서 시린 인간적 본질을 캐내어 정말 오래된 감수성을 깨워대는 작품이다. 파티가 끝나고 침구에 누워 닥이 읽는 책 속의 이 마지막 시 구절들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알지 못할 아릿한 슬픔으로 마음을 가라앉힌다. 내가 아끼게 될 문학 작품으로 오래도록 함께 하게 될 것 같다.
큰 잔치에서 녹색 잔과 금색 잔을 들어올리며
삶의 뜨거운 맛을 보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네.
사라져버린 짧은 순간이지만 그래도
나의 여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희디흰 영원의 빛을 내 눈 가득 담았었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