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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6호 : 권위 ㅣ 인문 잡지 한편 6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권위의 크기는 인정의 총량과도 같다. 그렇게 축적된 인정을 사유화 할 때 권력이 발생한다." - 정경담, 〈권위에서 탈출 하는 길〉, 107쪽
'권위(authority)'의 정당성에 균열이 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의 오랜 역사 내내 인정되고 존중되던 정당하다고 인정되던 권위를 지탱하던 많은 기준들이 더 이상 그 효력을 잃었거나 고유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세상의 가치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아버지가 지니던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는 이젠 격렬한 거부감과 혐오의 언어가 되었으며, 양반이라는 케케묵은 상전노릇은 천박함과 고루함를 일컫는 명사가 된지 오래다.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고위 관직에 붙어 다니던 권위는 지탄과 경멸의 언어와 다르지 않으며, 전문가에 인정되던 지적 권위도 온라인에 깔린 정보의 평등화에 따라 '너나 나나'와 같은 지식 폄하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보이고 드러난 권위의 상실 또는 해체 이외에도 굳이 관찰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작동되고 있는 무수한 권위에 대한 물음이 지속되고 있다.
펴낸이 김세영에 의하면 권위란 "설득되어 따르는 이의 인정과 자발적 복종을 야기하는 강제없이 작동되게 하는 힘(8쪽)"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 생활 속에는 지위에 따른 부당하거나 불편한 행위의 요구에 '아니오'라고 저항하기가 만만치 않은 순간들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권위를 "낡아빠진 질서의 자기 보존(13쪽)" 욕망이라고 새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쯤 되면 매일 매시간이 기존 권위의 부정을 향한 몸부림이 되고 만다. 어제는 오늘에서 낡음이다. 어제의 질서와 제도는 오늘 부인되어 새로운 것이 그것을 차지하고 그러자마자 다시금 부정되는 혼란이 계속 된다. 딱 지금의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가치의 상실과 정립 불능에 시달리는 정치적, 사회문화적 현실의 모습이다. 인문잡지 《한편》 제6호는 '권위' 를 주제로 10 개의 시선을 담고 있다. 이 감상의 글은 저항감을 야기한 몇 꼭지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비판은 길고 공감은 적은 글이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왕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제목의 조선조 예송(禮訟)사건을 빗댄 전(前) 서울특별시장 고(故) 박원순의 장례식장 일화에서 건져 올린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언어를 "정파적 권력 그 자체"로서 부정되어야 할 권위주의 산물이라 주장하고 있다. "권력의 정치 앞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망각된다.(37쪽)"며 여전히 한국 정치사회는 예송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전 대표가 "예의를 지키라"라고 쏘아댄 말은 고인의 성추행에 대한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그 무례함에 던진 충고의 변이다.
이것은 인간 개인에 대한 예의범절을 지칭한 것이지 서울시장 장례식 범주에 대해 한 말이 아니다. 이 왜곡된 비판의 시선에는 이미 고인에 대한 낙인이 찍혀있다. '성추행 범'이라는 낙인 말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저서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의 인격 전체를 부정적 속성으로 이끄는 '낙인'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사회구성원들의 "(1)눈길을 끌어서 그것을 지닌(낙인) 사람의 인격의 다른 측면들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고 관계의 불평등성을 만들어내는 이 편견을 비판하였다. 이해찬 전 대표의 말은 권위주의의 소산도 아니요, 인민에 대한 무례함도 아니다. 낙인찍은 인간에 대해서는 그 인격을 무시해도 된다는 여성주의자의 독단이야말로 시대 언어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권위의 발산은 아닌가 반성해 볼 일이다.
결혼 여성의 돌봄 노동에 씌워진 남성 권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로 돌보는 법을 알아가기〉의 '돌봄 일지 만들어가기'의 살벌한 가사 부담의 평등성에 대한 논의, 결혼 부부에 대한 "출산 지원책은 불안감만 증폭시킨다(56쪽)"는 변에 이르기까지 질서의 해체에 대한 주장은 즐비하다. 결국 주장의 논지는 "일부 사람들만이 작은 예외를 구현하며 만족하라는 메시지(57쪽)"에 대한 거절의 변이다.
돌보는 사람에 대한 특별정책(출산율 장려책)이 기혼자에게만 취해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혼자를 위한 형평성에 맞는 지원책을 마련하라는 '완전평등주의'의 요구이다. 그런데 출산 장려책은 사회적 약자나 국가미래를 위한 부양 정책 등의 형평성을 향한 시책의 하나이다. 예로서 저소득층에 지급하는 기초생활비를 모든 사람에게 지급해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분배정책을 왜곡하는 나쁜 제도가 된다. 하루 8시간 정신노동이 피곤하니 비혼 여성에게 이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외면적으론 평등 같지만 차별의 다른 논리이다. 세상을 같이 사는 동료로서 인민을 생각하자는 논자의 변이 궤변이 될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이 아닌가?
하나만 더해야 겠다. 〈중국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라는 글은 중국의 김치,한복 등 문화공정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을 '르샹티망'이라고 단정하는 주장이다. "근원적 열등감을 원한으로 바꾼 '노예의 심리'"이며, "국력신장으로 비대해진 자아의 공격성"(120쪽)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부활하여 인민 다중의 무의식에 중국에 대한 권위가 각인된 것으로 단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과연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중국에 대한 권위란 것을 갖기나 하고 있을까?
아마 대다수의 한국인은 중국을 문화적 후진국으로 인식된 앎 이외에 알고자 하는 의식조차 없을 것이다. 이 글은 한국인을 겨냥할 때부터 잘 못된 것같다. 마치 객관적 시점을 지닌 국외자의 위치에 서려할 때부터 글은 꼬이기 시작한 것 같다. 아Q의 정신승리는 오늘 중국인의 화법에서 무진장 발견 할 수 있다. 한국인의 반론이 친미로 비칠까봐 조심해야한다는 주장처럼 사대적인 발상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국의 태도가 친미적 성향이 짙어져 한국이 곧 미국의 대리인이라는 인식을 중국에 심어줄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 굳이 타자의 불안한 양가감정을 자극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926/pimg_7290341033128145.jpg)
"간병 없이는 치료도 없다.(...)질병 진단은 고통의 반향을 향해 기울어질 줄 아는 기예(art)를 요구한다." - 73쪽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권위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말하는 인류학자 서보경 교수의 〈살리는 일의 권위〉는 뉴노멀을 말해야 하는 오늘에 중대하고 긴요한 논지를 전해주고 있다. "타자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상태(64쪽)"가 바로 돌봄의 형태임을 알려준다. 우리의 몸은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몸은 대상을 향해 기운다. 간병 노동자의 하루를 관찰하며 "무릎을 굽히고, 등을 구부리며, 팔을 뻗고, 몸과 마음을, 눈과 귀를 기울이는(70쪽)" 돌봄의 철학을 헤아린다. 방치, 학대, 폭력은 이 기울임의 관계성이 결여 되는 순간에 오는 것임을 격하게 공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거꾸로 되었다. 의료를 돌봄과 관계없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의료 발전인 양 여기는 의료 상품화, 즉 물신화 과정만을 중시한다. 결국 간병의 영역은 별개의 하위영역으로 설정하여 지속적인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함에도 헐값의 하찮은 일이 되는 직업에 씌워진 가공의 권위를 이제 대전환시켜야 하는 시대에 있지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 볼 일이다. 그래 "치열한 상징투쟁과 전복"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터이다.
끝으로 지위와 연구능력이 부조화한 오늘의 한국 대학의 권위주의를 해부, 비평하는 김미덕 교수의 〈대학 조직과 연구의 원칙〉은 편집자가 정의한 권위의 정의를 재정의하게 돕는다. 사실 정당하다거나 인정되었다는 말에 이에 동의하는 타자의 선행이 있다. 그런데 대학이란 좁은 틀은 이들 타자가 하는 권위 부여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한다. 처세술 등 기회주의적 태도와 학연, 돈, 관계망이 만들어내는 한국 대학의 현실은 소위 "탁월한 연구"가 나오지 않는 가장 중대한 이유이다.
서구 지식의 어쭙잖은 소개로 권위를 지니고 지식인입네 행세하는 형국에서 무슨 창의성과 탁월성이 출현 할 수 있겠는가? 고작 대중적 지식의 재생산으로 추종세력을 거느리는 천박성이 휩쓸고, 속칭 우라까이에서부터 제자의 연구를 도둑질하는 현실의 권위는 그야말로 허위적 권세가 기승을 부리는 오늘 우리 사회의 형국을 대변한다. 권위에서 탈출하는 길을 사유하는 영상 비평가 정경담의 글이나 수평적 권위, 즉 안정과 존중의 가치에 방점을 둔 권위를 말하는 극작가 겸 연출가인 정진새의 글은 새로운 권위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일종의 방향등 역할을 해준다. 기존의 질서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찾는 길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이 작은 인문잡지가 그 어두운 강을 건너는 희미한 점멸등이 되어 줄 터이다.
註(1): 출처: 김현경 著, 「모욕의 의미」 122쪽, 『사람, 장소, 환대』, 2015. 3, 문학과지성사 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