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
보에티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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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욕망의 바람들이 불 때마다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근심도

측량할 수 없도록 무한히 커져가는 도다." - P 39 중에서

 

 

올바름, 타인에 대한 동정과 배려, 탐욕의 배제, 후학과 동료 시민을 위한 진실한 학문의 추구, 권력의 오만함을 잊지 않는 태도와 같이 신을 향해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도록 정진했던 인간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배신으로 유배되어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그 고통과 비탄을 형언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서기 475년에 로마 근방 명문 가문의 자식으로 출생하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테오도리쿠스''마기스테르 오피기오룸'(오늘날 비서실장)이었으나 일순간 역적이 되어 526년 유배지인 파비아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집필한 참된 선(), 운명과 의지에 대한 치열한 자기 물음의 사유가 이 책이다. 역자의 해제에서 설명 되듯이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책이 아니라, 운명의 파란에도 불구하고 신 안에서 위안을 받고자 했던 철인이자 정치가이며 신학자였던 한 인간의 간절한 철학적, 종교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과연 정의로 다스려지고 있는가?'하는 물음이 그의 첫 의심이었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는 신의 피조물로서의 동일한 질문일 것이다. 이전에 누렸던 영화, 그 행복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어찌 쉬이 떨쳐낼 수 있으며, 악이 세상을 장악하는 그 불의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잠재울 수 있겠는가.

 

저술은 그의 감정에 공감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들을 내치는 철학의 은유로 등장하는 여인(철학의 여신인 아테나 이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에 나오는 필로소피아를 모델로 했다는 견해들이 있음)과 보에티우스의 대화로,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운 활용을 위해 시와 산문을 번갈아 쓰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5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보에티우스의 유배된 상황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 배경에 대한 진술로 이후의 물음들이 제기되는 바탕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2장과 3장의 '참된 행복'에 대한 논의와, 4장과 5장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와 운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철학과 보에티우스의 질문과 답변은 삶의 진리에 대한 간절한 앎이 더더욱 절절하게 울려온다고 할 수 있다.

 

 

1. 참된 행복에 대해서

 

과거를 그리워하며 운명의 여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슬퍼하는 일에 힘을 소진하는 것은 범인(凡人)인 우리네에게 으례 먼저 다가오는 사념이다. 여인은 말한다. "부귀, 명성, 권력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진정으로 인간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네가 다시찾고자 하는 것들이 너의 소유였음을 인정 할 것이다."라고. 사실 붙들고 싶어도 붙들어둘 수 없고 떠날때면 불행만 남기는 행운이라면 그런 덧없는 행운은 단지 다가올 불행의 전조 이외에 무엇이며, 단 한순간에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생사에 어떤 변함없는 것이 존재하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음 또한 무엇이겠는가!

 

 

"행복이 이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좋은 '최고선'이라면 행복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 93에서

 

 

우리는 재물을 ''라 부르고, 권력을 ''이라 부르며, 관직을 '영예'라 부른다. 그리곤 이러한 것들과 멀어질 때면 행복이 사라졌다고 슬퍼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원래 그것들에 속하지 않은 거짓된 이름들로 부르기 좋아하는 인간의 자기무지에서 오는 탐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 명예, 권력, 영광, 쾌락은 인간의 정신에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다시말해서 그 어떤 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이끌어준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얻게 될 때 행복해진다.

 

결국 이 다섯 가지가 동시에 완전하게 충족될 때 그것을 선이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완전한 것도 존재해야 한다.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완전한 행복이 참된 선이라면 그 완전한 것은 최고신 이외에 그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논리는 보에티우스가 위로를 구할 대상인 단일성, 근원적 존재인 ''으로 향하게 한다. 그것이 종교의 유일신이든, 어떤 범신론적 대상이든,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근원성이든 말이다. 그런데 오직 선만을 갈구하는 신의 나라에서 악은 번성하고 미덕은 짓밟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 신의 섭리란 무엇이며, 운명이란 무엇인가? 완전성, 선의 총체라는 신이라며 어찌 이러한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2.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에 대해서

 

책 바깥으로 잠시 뛰쳐나가야 겠다. 선거에서 낙선한 한 인간이 충혈된 눈자위와 온갖 혐오의 표정을 짓고서는 부정선거라 악을 써댄다. 그에게서 '()'의 현현을 보게된다. 미덕을 버리고 악을 추구하는 것은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니 무지로 인한 맹목이다. 이보다 악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제력을 잃은 것이라면 결핍의 악이다. 그런데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가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힘이 없다는 것이니 존재하기를 멈추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극악을 향한다. 그렇다면 신의 섭리에 내재된 완전성, 선의 총체는 대체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만물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든 방식을 포괄하는 불변의 단일한 형태인 '신의 섭리''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충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는 욕망이 그들의 심장을 비틀어

독기어린 탐욕을 분출시키고,

회오리바람이 바다 물결을 채찍질하듯

분노가 그들의 정신을 채찍질하니

고통과 비탄에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붙잡고 몸부림친다네." - P 199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밭을 갈다가 금덩이를 발견한 경우가 우연인가 묻는 일화가 있다. 이것이 무()에서 생겨난 것인가? 일련의 원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느닷없이 제멋대로 생겨난 어떤 움직임에 의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연이라 정의한다면, 이런 '우연'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일은 분명 여러 원인들(누군가 금덩이를 밭에 묻어놓았으며, 밭을 갈기 위해 땅을 파는 행위 등등)이 결합되어 일어난 긴밀하게 연결된 연쇄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신의 단일한 정신이 작성한 것이 시간 속에 안배된 만물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 질서가 우연이며 운명"이라면, 인간 의지의 자유는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보에티우스와 철학이 우연과 신의섭리의 문제를 논하다 - P 221삽화 부분발췌】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과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되고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사유의 깊은 심연을 지나가야 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경유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버려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며, 미래는 아직 소유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단지 신속하게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따라서 삶 전체를 동시적으로 완전히 향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은 자신이 존재해 온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의 본성의 단일성에 비추어 모든 피조물에 선행한다. 결코 지나가지 않는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을 알며, 미리 앞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한 눈에 다 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은 미래에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게 될 일들을 현재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기에 이 일들은 신의 인식이라는 조건으로 필연적인 일들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그 일들의 본성과 관련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결코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단일성에 의거해서 모든 것들을 자신의 현재 안에서 즉자(卽自)적으로 본다는 이 의미를 심상에 담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어떤 위안이라도 매달려야 할 사람에게는 간절함에 맞닿았을 것이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명성, 그리고 쾌락에서 자유로워지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다고 악인의 현현이 되야 하겠는가. 자기를 살피는 일이란 지고한 자기물음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더구나 물질의 쇄도에 짓눌려 정신의 저 깊은 곳을 마주할 시간조차 없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운명의 범주가 아니라 미덕의 범주인 우정과 사랑, 지고한 선을 향한 참된 행복, 우주의 본성에 대한 겸허를 얘기하기란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네 인간은 불행이, 삶의 일상적 안온함이 물러날 때 그 허기와 상실의 고통으로 또 얼마나 아파하는가? 아마도 그러한 때가 되었을 때 이 책은 그 비탄의 통로를 빠져나가는, 죽음의 멍에를 떨쳐 버리려는 헛수고를 멈추게 해 줄것 같다. 삶의 진실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의 평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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