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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19 ㅣ 소설 보다
김수온.백수린.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1. 문지문학상 후보작 선집 - <소설 보다> ; 봄 2019
‘이 계절의 소설’선집과 인연이 이번으로 네 번째다. 젊은 작가들의 단편 3~4편으로 구성된 작은 단행본이지만 이 선택을 계속하는 이유는 매 작품 끝에 이어지는 문지문학상 후보작 선정위원들과 해당 작가와의 인터뷰 때문이다. 갓등단한 신예부터 10년 남짓의 작가에 이르는 신진들이기에 이들의 작품이 낯선 독자들에게 수록작품에 대한 구성과 지향점을 비롯한 창작 계기, 소설화 과정에서 염두에 두었던 혹은 작가적 고민, 근황과 계획에 이르는 담화는 한국문학의 다채로운 시도가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해준다. 이는 작가와 독자의 내적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 선집을 통해 알게 된 몇 몇 작가의 작품이 발표되거나 출간되면 찾아 읽는 고정 팬이 되었기에 가능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이번 선집은‘<소설보다> ; 겨울 2018’에서 만났던 백수린 작가를 다시금 접하게 되기도 하지만, 내겐 낯 선 김수온, 장희원 이라는 두 작가와의 만남이 더욱 기대되었다고 해야겠다. 2018년에 등단해서 이미 여러 지면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수온 작가, 그리고 2019년 올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장희원 작가의 소설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보는 기회가 되었다.
2. 세 편의 수록작
2-1. 아직은 집에 가지 않을래요 - 백수린
그런데 몇 차례 작품을 접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라는 백수린 작가의 이번 작품은 소설 읽는 행위의 즐거운 기억을 되살려 주는 기쁨이 있었다. 어쩌면 작가가 무심히(?) 던진 하나의 문장 -“한 순간이나마 무언가를 욕망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은 욕망을 모르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법이니까” - 탓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꾹꾹 눌려졌던 욕망의 모습과 마주하고 그것을 현실적 감각 - 의식이라 해야 하려나? - 으로 이해하는 화자(話者)의 여정이 왠지 경쾌하게 보였으니까.
이렇게 신나게 읽었던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발산하는 무의식의 향취 때문이었을까? 고급주택가의 한 붉은 지붕의 집, 새빨갛고 탐스러워 보이는 만개한 덩굴장미,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배꼽 위가 간지러워’하고 깔깔거리게 하는 그네, 작지만 운치있는 레스토랑 카페 뮐러, ..., 마치 나보코프의 『에이다』를 번역하는 마을 사람들 탓에 브르타뉴의 브레아 섬을 가득 떠도는 그 활기찬 관능의 냄새를 떠올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빠만 학원에 보내주었고, 그녀의 재수를 반대했으며,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언제 직장을 그만둘 거냐고 물었다.” 아마 많은 그녀들은 이러한 환경이 익숙하지 않으려나? 이런 그녀가 불현듯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그녀의 삶은 그저 커다란 체념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 소설 속 그녀는 “미묘한 다른 삶의 징후를”쨍! 하고 예견한다.
그녀가 동경하던 붉은 지붕의 집이 어느 날 철거되기 시작하고 야생적으로 드러난 골조들 사이를 지나, “리드미컬하지만 대담한 움직임으로 벽을 부수는, 싱싱하게 젊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남자”를 “여자는 그의 옷을 벗기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를 맹렬히 쳐다보았다.”여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남자를 대상화하는 여자의 시선, 즉 남성우위의 시선을 전복하는 페미니즘 결정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억눌렸던 욕망,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을 과감하게 마주하는, 즉 무의식에서 끌어올려 비로소 의식화하는, 균형을 잃었던 자아의 온전한 정립의 멋진 정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가 훨씬 마음에 든다.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이제 곧 더 근사하게 다시 짓는대”에 대응하여 “이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미 새로운 욕망의 세계로 갈아탔으니 말이다. 내게도 삶의 변화를 예감하는 아주 짧은 한 순간이 내면을 명쾌하게 울려댔던 적이 있었나? 하고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 보게된다. 유쾌한 아름다움! “꽃놀이 가듯 즐겁게 쓴다”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을 기대하게 된다.
2-2. 한 폭의 빛 - 김수온
인생의 전환을 예견케 하는 이처럼‘삶의 짧은 어느 순간’이란 언어적 포착은 김수온 작가의 「한폭의 빛」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의 한 줄기 금’이 되어 또 다른 의미를 새기게 한다. 이 순간은 오히려 의식에 있었던 것을 무의식으로 침잠시켜버리는 그런 사태인 것 같다. “작은 일이 일어나는 순간, 일생이 바뀌기도 하잖아요.”그리고 “빛은 언제나 어둠을 동반하잖아요.”라는 작가의 변(辯)은 나의 이해를 어둠으로 이끈다.
소설 모든 정황이 압축되어있는 것만 같은 첫 문장을 대하면서 왠지 금지된 세계에 들어가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도시의 서쪽에는 숲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 있으므로 그늘이다.
숲에 작은 면적의 호수가 있다.
거기 유일한 빛이 비추고 있어.“
어떤 신경증적인 세계를 보는 듯하다. 동쪽의 도시에는 아기를 잃은 듯한 여자가 있고, 서쪽 숲속에는 검은 모포를 두른 사내가 있다. 그러나 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별로 규명된 것이 없는 실체들이기 때문이다. 통념들이라 이해하는 내 지각이 부정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어둠 속에 빛이 아니라 ‘빛에 동반되는 어둠’을 먼저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 지새는 여자, 아기가 없는 빈 요람, 빈 방, 닫혀 있는 문, 얼어붙은 호수, 숲 그늘, ...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 이미지는 한결같이 기억되려 하지 않는, 망각하려는 어떤 회피 혹은, 단단히 걸어 잠그려는 힘이 연상된다.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한 폭의 빛조차 손차양을 하여 가리면 어둠, 그늘이 있잖아요 하는 작가의 말 속에서도 집요하게 기억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평자(評者)는 공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이 작품을 “공간의 이미지가 주는 오묘한 힘”이라고 긍정적 해석을 하기도 하였지만 내겐 그것은 그저 텅 빈 것으로 두려는, 아무것도 채우려 하지 않는 의식의 공허함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끄집어내거나 마주서기에는 버거운 것이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너무 아픈 상실과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이기도 할 것이며, 혐오스럽거나 혹은 수치스러운 기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의식의 세계로 길어 올려 자기화하거나 영원히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붙들려 있으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 세계에 머물러 끝없이 자기형벌과 자기애에 묻혀 그 슬픔의 쾌락에 자신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소설 속 여자는 가스 불에 올려놓은 물이 끓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손수건이 탁자에서 왜 바닥에 떨어져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심함이 가장된 것일까? 내겐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행위를 반성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어떤 거부감만이 보인다. 무얼 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성장하지 못한 의식세계, 정신질환적 세계의 문턱만이 보인다. 다만, 여자의 일인용 소파에 잠든 어머니를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 그리고 그 옆 바닥에 드러눕는 여자의 행위, 한 줄기 금이 간 얼어붙은 호수에서 어렴풋한 무의식과의 대면의 가능성을 볼 뿐이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이처럼 소멸해가는 흐름, 그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갖기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린 모두 마주서왔고 그것을 굴복시키는 정신적 진화를 성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 아파하고 거부하고 억압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더 알고 싶은 작가다. 김수온 작가의 기 발표작들 -「행렬」,「음」,「한 겹의 어둠이 더」 - 을 챙겨 보아야 할 것 같다.
2-3. 우리「畜舍」의 환대 - 장희원
아마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것을 굉장히 분명한 감각들로 전달”하고 있다는 평자의 말처럼 ‘감각의 언어’들이 우리 지각의 현상들을 꿰뚫고 지나가게 하는, 그래서 구태여 어떤 너절한 담화나 수사의 필요 없이 삶의 이해에 다가서게 하는 감각과 행위로 현상을 묘파해내는 성취임에 동의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장치라는 것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들이 검열장치에 걸러져 변질, 왜곡되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가 손상되는 것을 그 누가 용인하겠는가? 아들과 아버지의 기억은 사뭇 다르다. 아직은 소년이었던 사춘기 시절 영재는 아버지의 무참한 폭력으로 커다란 상처를 새기고 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려, 아빠”,
“더러운 놈, 주먹이 탁상에 찢긴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아이를 때렸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는 아들과 아버지, 호주 남서부 끝 퍼스라는 곳에 있는 아들 영재를 만나기 위한 여정, 아이가 살고 있는 초라한 주택에 동거하는 노인과 스무살 여자아이 미영, 이들의 삶과 마주한 재현 부부의 그 어색함이란, 그리고 도망치듯 호텔로 향하는 이들에게서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말끔히 망각해버리곤 기만적인 행위를 일삼는 오늘의 우리들을 생각게 된다. 다만, 작가의 기대만큼 무게있는 부끄러움, 창피함을 돌아보고 타자의 아픔을 알 것 같은 순간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