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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평점 :
<작은 파티 드레스>로 만났었던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 사랑하는 여인 지슬렌을 잃은 후에 느꼈을 상실감을 보뱅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글을 써나갔고, 그녀는 그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인 지슬렌의 죽음으로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보뱅은 어떻게 그 상실감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을까? 결자해지라고 해야 할까? 보뱅에게 사랑한다는 문장을 쓰도록 알려준 사람도, 느리게 천천히 말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도 바로 사랑 안에서 빛나는 자유를 사랑하는 지슬렌이었다.
귀염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받은 사랑을 수백 배, 수천 배로 돌려주고 떠난 지슬렌은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고, 죽음을 말할 때도 사랑을 이야기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죽음의 고유한 특성과 사랑의 감미로움에 어울리는 세밀한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품위를 전혀 잃지 않은 채 화를 내며 욕을 할 줄 알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책 제목을 메모하지만 다음 날이면 메모한 종이를 잃어버리곤 하던 지슬렌은 어느 때든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커플로 살아가는 방식들을 16년 동안이나 지켜보던 보뱅의 눈길과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지슬렌이 활짝 웃고 서 있는 듯하다.
5분의 산책을 500년 동안의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웃으며 서있는 그녀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은 완벽했다. 보뱅과 지슬렌의 사랑을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었다. 겨울이라서 그런 걸까? 김신의 대사.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눈부셨다."
지슬렌을 말할 두 단어로 '고통스러운'과 '찬란한'을 선택했고 한 단어로는 '다정한'을 선택했다. 다정해서 고통스럽고, 다정해서 찬란한 여인 지슬렌은 경이롭다. 보뱅은 자신의 언어로 지슬렌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움들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마치 난 지슬렌을 알고 있던 사람같이 느껴진다.
거지도 안 가져갈 오래된 보라색 실내 가운과 워크맨,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핫 초콜릿, 쿠션, 고깔모자, 감초 사탕, 초록 식물들의 고요한 빛을 사랑하던 여인 지슬렌이 베란다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나에게도 환하게 웃어주고 있다.
그리움의 정원을 글로 가꾸어낸 보뱅과 그의 연인 지슬렌의 사랑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밑줄을 긋지 않은 페이지를 찾을 수가 없다.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처럼 내 삶의 또 한 권의 겨울책이 되었다.
변함없이 계속 살아가라.
더욱더 잘 살아가라.
무엇보다 악을 행하지 말고 웃음을 잃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