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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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서포터즈3기 출판사지원도서입니다.


《네가 누구든》 —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유리창, 그리고 그 너머의 여성들


바닷가의 한적한 교외, 오래된 집 하나와 유리의 성 같은 새집 하나. 이 소설은 그 두 공간 사이에서 흔들리는 여성들의 마음을 아주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비춘다.


미티와 레나.

하나는 스스로 몸을 숨긴 여자,

하나는 누군가에게 숨겨진 여자.


나는 이 둘이 서로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어느새 그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내 삶의 모서리에 겹쳐 놓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시선들, 엄마로서의 역할들,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요구되는 매끄러움들. 내가 매일 눌러 삼키던 감정들이 작품 속 유리창에 비치는 듯했다.


새로 지어 올린 집의 투명한 벽 너머로, 레나는 완벽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잠겨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어떤 자격이 있다고 믿는 확신이 아닌, ‘내가 이 삶의 주인인가?’를 의심하는 표정. 그런 그녀에게 오래된 집의 미티와 베델이 다가가고, 그 순간부터 소설은 여성들이 서로를 통해 자신을 재구성해가는 여정을 은은하게 보여준다.


미티는 레나를 동경도, 질투도 아닌 묘한 친밀함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여성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갇혀 스스로의 역사를 의심해야 하는 삶을, 이미 어느 정도 지나온 사람만이 느끼는 감각. 그 감정의 실루엣은, 시인이 언어를 다루듯, 묵묵히 그러나 깊게 페이지에 스며든다.


레나가 말하는 순간들, “내 과거가 내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이 문장을 읽으며, 우리는 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지만, 미티와의 연대는 레나에게 처음으로 ‘나’라는 감각을 준다. 서로의 상처가 조심스레 맞닿을 때, 아이를 키우며 종종 느꼈던 ‘나도 사라지고 누군가의 그릇으로만 사는 건 아닐까’ 하는 감정도 조용히 떠오른다.


그리고 베델.

세월이 남긴 그림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두 젊은 여자를 굳이 잡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존재.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단단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여성을 지키는 방식은 늘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크게 울지 않고, 크게 말하지 않고, 다만 곁에 있어주는 일.


소설은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지만, 나는 이것을 ‘여성의 자기 복원 서사’로 읽었다.

의심하고, 벗어나고, 서로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쌓아 올리는 일. 그런 각성의 순간들을 이렇게 조용한 문장으로, 그러나 이토록 날카롭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첫 장편은 놀랍도록 단단하다.

더욱이 영화화가 확정되었다니,,, 심장은 더 뛰었다.


유리창 사이에 선 레나의 실루엣, 밤마다 바닷가를 걷는 미티의 그림자, 그리고 그들을 낡은 집 안에서 바라보는 베델의 눈빛. 이미 여러 장면이 머릿속에서 영사되고 있다. 여성의 연대가 가진 떨림을 스크린에서도 다시 만나고 싶다. 시인의 문장이 움직이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를 구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깨우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여성의 삶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 만든 빛 아래에서 비로소 살아난다는 것.

이 조용한 소설은 우리에게 그 진실을 우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속삭인다.


#네가누구든 #올리비아개트우드 #비채 #비채서포터즈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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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결말을 바꾼다 - 삶의 무의미를 견디는 연습 철학은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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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철학은 결말을 바꾼다》는 일상 속에서 철학이 어떻게 현실의 방향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서동욱 교수는 전작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에서 사유가 감정의 기후를 바꾼다고 말했다면, 이번에는 사유가 삶의 결말을 바꾼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철학은 거창한 학문이 아니라, 하루를 조금 다르게 살아보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먹기’와 ‘쾌락’ 같은 일상의 행위를 철학적으로 들여다보는 1부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왜 질병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참는 법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새로 해석하는 법이다. 나 또한 불안하거나 피로할 때, 이 책의 문장을 곱씹으면 일상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


2부의 핵심은 ‘실망’이다. 우리는 좌절을 피하려 하지만, 서동욱은 실망이야말로 인간을 성장시키는 공부라고 말한다. 철학은 인생의 ‘답안지’가 아니라, 실패를 통과하며 얻는 사유의 훈련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사는 연습”이라는 표현이 오래 남았다.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학문이 아니라, 더 단단히 살아보기 위한 기술이다.


3부와 4부는 세계를 낯설게 보는 법을 가르친다. 구역질, 부분과 전체, 타자와 자유 같은 주제들이 등장하지만,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결말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혁명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라는 것이다. 내 안의 편견을 조금 비틀고, 타자를 향한 시선을 조금 열어두는 일. 그것이 곧 철학의 시작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철학은 결말을 바꾼다’는 말을 개인의 구호로 받아들였다. 일상의 결말, 관계의 결말, 생각의 결말을 조금씩 다르게 쓰는 힘. 철학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멈춰 서서 한 문장을 더 깊이 생각할 용기를 주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바뀌는 건 결말뿐 아니라, 그 결말을 기다리는 우리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철학은결말을바꾼다 #서동욱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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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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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유스케의 《여름비 이야기》는 장마철의 눅진한 공기 같은 공포의 이야기로, 읽다 보면 비 냄새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어둠이 느껴진다.

기시는 언제나 초자연보다 인간을 택한다. 이번 책에서도 공포의 근원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5월의 어둠>의 하이쿠에 숨은 죄의식과 후회, <보쿠토 기담>의 향락 속에 스며든 자기 파괴로 타락해가는 젊은이가 등장하고, <버섯>에서는 버섯이 자라며 고립된 집을 덮어버리고 그 속에서 주인공은 악의를 느낀다. 세 이야기 모두 마음속의 어둠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시의 문장은 냉정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아름답다. 비가 내릴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고, 버섯이 퍼지듯 죄책감이 확산된다. 현실적인 서스펜스와 환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순간, 나는 서늘함보다 슬픔을 느꼈다. 인간의 악의는 결국 외로움과 공허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보여준다.

책을 덮은 뒤에도 장마 소리가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가을비 이야기》가 죽음의 냄새를 품은 스산한 비였다면, 《여름비 이야기》의 비는 살아 있는 인간이 저지른 죄를 씻어내지 못한 채 흘러내리는 비다. 창밖의 빗줄기가 현실의 균열처럼 느껴지는 경험은 기시 유스케가 만들어내는 진짜 공포다.

악의를 통해 인간을 해부하는 냉혹한 실험 같은 책! 읽는 동안 나는 ‘공포’가 아니라 ‘자각’에 몸서리쳤다. 나도 일상 속에서 저런 어둠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여름비이야기 #기시유스케 #비채 #호러소설 #가을비이야기 #악의 #5월의어둠 #보쿠토기담 #암흑기담집 #이호러가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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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과 군상
하인리히 뵐 지음, 사지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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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와 문서로 레니를 ‘증거‘처럼 배열한다. 배열이 끝나면 레니의 윤리가 또렷해진다. 전후 독일의 기만, 재건의 탐욕, 신앙과 위선이 드러난다. 레니는 비영웅적 선함으로 생존과 연대의 문법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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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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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서포터즈3기 출판사지원도서입니다.


《복안인》을 덮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오래도록 가라앉는다. 인간이 만들어낸 폐허 위에서, 여전히 살아가려는 생명의 마지막 몸짓을 그린 지구의 초상화다.


나는 플라스틱을 씻어 말리며 쓰레기 분리수거일마다 이 책을 떠올렸다. 우리가 버린 그 작은 플라스틱들이 모여, 바다 한가운데 ‘섬’을 이룬다. 그리고 그 섬은 언젠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밍이는 이 끔찍한 순환을 신화의 언어로 번역한다. 와요와요의 소년 아트리에와 타이완의 여성 앨리스가 만나는 순간, 바다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기억하는 의식 있는 존재로 변한다.


“자연은 반격하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이 문장은 소설 속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진실하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할 때, 그것은 ‘공격’이지만 자연의 변화는 ‘복수’가 아니다. 그저 균형의 복원일 뿐이다.


쓰레기 섬, 복안인, 카방의 신화, 그리고 앨리스의 절망은 모두 한 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보는 눈의 문제, 곧 ‘복안’의 의미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본 것만이 세계의 전부라 착각한다. 그러나 곤충의 겹눈처럼 세상을 입체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개발과 소비를 ‘진보’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아름다운 문장이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그 속에 섞인 냄새는 썩은 바다의 것이다. 아트리에는 죄가 없다. 그러나 문명의 죄는 그를 집어삼킨다. 앨리스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든 재앙 속에서 그녀는 고양이 ‘오하요’와 함께 미약한 생의 불씨를 지킨다.


읽고 나면 다시는 "버린다"라는 말을 쉽게 쓸 수 없다. 우리의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방향을 바꿔, 우리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복안인 #우밍이 #비채 #비채서포터즈3기 #리브르앵쉬레르상 #베를르날레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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