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맥공주
이지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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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독자는 학교 다닐 때까지는 꽤 책을 읽었지만 사회 생활하면서 책과 멀어졌다. 흔히 핑계로 내세우는 "시간이 없어서"였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한참 책을 좋아할 때 읽었던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이 대부분이고 가끔은 에세이도 읽었다. 어쩌다 한 번씩 시집도 사서 읽기도 했다. 소설도 분야별(장르별)로도 편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나이 때는 사실 러브 스토리라는 연애 소설 혹은 로맨스 소설을 주로 읽었다. 그러나 SF판타지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소설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 유명한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내용이 공상(空想)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편화된 뉴 밀레니엄 들어서는 그야말로 작가 지망생도 인쇄된 책을 쓰는 대신 인터넷에 소설을 발표하는 일이 많았을 무렵, SF 소설이 대세인 듯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젊은 작가들이 주로 많이 쓴다는 말도 매스콤을 통해 들은 적도 있다.

2025년 현재 대한민국 소설의 대부분은 이른바 '장르 소설'이 대세를 이뤘다고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재택 근무가 실시되면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독자로서는 이때도 대부분 예전의 취향대로 선택했다. 그러나 온라인 서점을 자주 들러 책을 구매하곤 했는데 놀랍게도 장르소설은 이미 베스트셀러 순위에 늘 끼어 있었다. 몇 권을 사서 읽은 적도 있다. 그러나 독자가 읽은 소설에는 여전히 쉽게 공감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팬데믹 상황이라 일본이 강세를 보인다는 추리소설이 우리 국내 작가들도 적잖게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온라인 서점에서는 추리, 미스터리, 심리스릴러, 판타지, 과학, 공상 등을 거의 '장르소설'로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무렵 김초엽 작가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으로 많은 상을 수상했다고 알려졌다. 누군가가 김초엽 작가의 작품을 평해 놓은 기사도 읽었다. “김초엽은 심도 깊은 질문을 제시하는데 능숙하여, 그 질문에 대한 답에 다다르는 정교한 퍼즐을 과학과 인문학적 기초 위에 구축한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여성들은 역사에서 잊혀진 여성을 대표한다. 우리는 그 여성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며, 그들이 윤리적 도착 지점에 다다르는 아름다운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예전에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별이 없을 때는 이런 평이 나오지 않았을 터다.


독자가 뒤늦게 파악한 김초엽 작가는 과학도였다. 포항공과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인간은 사실 자연 세계와 동떨어진 채 인간만의 세계에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해 정의할 때 우리는 그동안 인간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죠. 그게 철학이 되고 사회과학이 되었는데, 그것만으로 우리 삶과 인간 자체에 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자연과 공간, 인공물, 기술, 과학 같은, 인간이 아닌 비인간적인 것들도 사회의 핵심적인 구성원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배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김초엽 작가는 어느 책을 읽으면서 SF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관점을 내재하고 있는 장르라고 말했다고 〈밀리의 서재〉는 밝혔다. 김초엽 작가는 SF는 인간도 중요하게 보지만, 인간을 둘러싼 세계, 구조,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 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인간과 사물을 동등하게 다루는 장르라는 말했다는 것.

또 "SF는 항상 우리가 지구환경, 우주, 우리 몸이 기술로부터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유전적 공학을 통해 어떤 괴물들이 만들어졌는지를 다뤄왔다. 그래서 SF는 '얽힘'을 다루기 좋은 장르다. SF를 통해서 현재의 얽힘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을 한다.

그리고 독자가 가장 공감 가는 인터뷰 내용이 마지막에 나온다. "SF에 나오는 과학이 진짜 과학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오해다. SF 작가들이 흔히 쓰는 기법의 하나가 진짜 과학처럼 지어내는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들을 써놓고 진짜처럼 설명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예 없는 엉터리도 많다. 과학과 SF가 연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실제 과학보다 엉터리 과학이 범위가 좀 더 넓다. 과학을 잘 아는 것도 물론 좋지만, SF 작품을 많이 읽는 게 SF를 쓰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일상적인 것만 알아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독자와 작가 지망생들에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밀리의 서재〉는 SF를 순수 문학으로부터 단절시켜온 벽이 허물어졌고, 순수문학 / 장르문학이라는 상투적인 구분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변화를 이끄는 주인공은 김초엽 작가라고 단언한다.


독자가 이 책 『산맥공주』를 서평하면서 갑자기 김초엽 작가의 장르소설, SF 소설에 관한 최근 강연 내용을 여기에 적은 이유는 '장르 소설'이라면 빠질 수 없는 저자 이지연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이지연은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깊이 있는 상상력, 긴 시간 쌓아온 장르 문학에 관한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가였다고 이 책 뒷 부분에서 출판사 측은 말하고 있다. 김준혁 황금가지 편집주간은 「장르라는 텃밭을 일구려 한 지구별 여행자」로 저자와의 인연을 회고한다. 김 주간은 자신이 출판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지연 저자가 직장 선배였고, 퍽이나 힘든 사수였다고 말한다. 김 주간에 따르면 이지연 작가는 그야말로 황무지와 같은 한국 장르 텃밭에 수많은 씨를 뿌려온 장인이었다. 1997년 PC 통신 하이텔에서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를 세상에 선보인 게 그 첫 시작이었다. 지금이야 서점에서 SF나 추리,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출판소설을 만날 수 있지만, 1997년 당시에는 신춘문예나 문예지로 등단한 작가 외에는 신인 작가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서점 매대에 비치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판타지라는 장르로 구분된 소설이라면 당연하듯 도서대여점으로 직행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영도 작가의 역량을 일찌감치 알아본 그녀는, 12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자신의 직을 걸고 출판하고 홍보에 물두했다. 한 편집자의 열정적 의지는 회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영도 작가 인터뷰와 소개가 이례적으로 주요 일간지에 사진과 함께 동시에 담겼고, 당시 신문지면에선 낯선 광경인 판타지 소설 광고가 연거푸 실렸다. 책은 100만 부가 훌쩍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그야말로 한국 판타지 문학의 전설이 되었다. 

그녀는 기세를 몰아 당시 막 꽃피우던 여러 판다지 소설가들을 끊임없이 찾아내어 독자들에게 선뵈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황금가지가 선두에 서서 물꼬를 터뜨리자 다른 출판사도 경쟁적으로 작가 물색에 참여하였다. 신춘문예에선 장르문학 부문이 도입되기까지 했다. 서점에는 장르 분야의 매대가 비치되었으며, 각자의 분야에서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이런 대중적 흥행은 현재의 웹소설 플랫폼이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p.308~309)



1997~2007년 국내 창작물 외에도 해외의 고전 장르 소설을 적극적으로 찾아 정식 출판을 밀어부쳐 『듄』, 『반지의 제왕』, 『어스시의 마법사』, 『스타십 트루퍼스』, 〈러브 크래프트 전집〉, 〈링 시리즈〉, 〈해인 시리즈〉 등 SF와 판타지, 호러 소설 기획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김 주간은 말한다. 이후 자신만의 글을 쓰겠다고 편집 책임자 자리를 물려주고 소설도 쓰고, 번역과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황금가지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인연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리고 이지연 작가는 2024년 8월, 지구별 여행을 마쳤다. 향년 52세. 출판사 황금가지는 그녀의 공로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 책 『산맥공주』를 출판했다. 

이 단편집은 저자가 생전에 애정을 가지고 다듬었던 미발표작과 기발표작을 한데 엮은 것으로, 「생일을 축하」, 「눈 속의 요정」 등 타자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초기작들에서부터 「산맥공주」, 「역표절자」 등 작가의 사변적 깊이에 더해 사건의 플롯을 능숙하게 다루는 변화된 스타일을 선보인 최근작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저자와 오랜 지기였던 소설가 송경아 씨가 직접 여덟 작품을 엮었으며, 저자의 가족 및 지인, 그리고 작가들의 1주기 추모글이 전자책으로만 별도 수록되어 발매될 예정이다.

표제어로 선정된 「산맥공주」는 고아로 자란 보르후가 한 여인과 결혼하지만, 곧 아내가 죽자 깊은 슬픔에 잠긴다. 무당은 '죽은 아내의 옷에서 나온 씨앗을 심고 잘 보살피면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 일러주자, 보르후는 그 말대로 씨앗을 심고 정성껏 돌보아 출룬체첵이라는 아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는 비범한 괴력을 가진 채 빠르게 성장하며 세상을 뒤흔들게 된다.

「눈 속의 요정」은 폭설로 마비된 도시에서 발견한 작은 요정이다. 인형처럼 생겼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근처 편의점으로 급히 요정을 데려가지만, 요정을 본 사람들로 곧 소동이 일어난다. 과연 요정을 살려낼 수 있을까? 궁금하다. 「공녀님은 기사가 되고 싶어서」에서는 황위 후계자의 친우를 선발하는 과정에 미드라코 가문의 17공녀 엘이 지원한다. 하지만 경쟁자인 데레의 예상치 못한 실력 발휘와 자신의 성적 하락으로 혼란을 겪게 된다. 더군다나 데레의 가문에 관련된 숨겨진 비밀까지 알게 되자, 엘은 복잡한 심경에 빠지고 마는데··· 「역표절자들」에서는 자신이 남긴 미스터리한 메모가 다이어리에 남아 있다. 메모에는 특정 기억이 삭제될 것이며, 친구나 지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누군가를 경계하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사라진 기억을 되짚는 와중에, 정말로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난다.


독자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작품은 「만찬: 콴 행성 라마 지역 상층부, 우위디야마구」이다. 주인공은 세즈.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콴 행성이고, 콴 행성에 거주한 이들은 조금 특이한 식성을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을 먹는다. 세즈는 이런 식성에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반면 세즈의 친구인 맥다이는 별로 거리낌이 없다. 인간이 죽은 후 음식의 형태로 재생되어 다른 인간들에게 제공된다. 이 작품은 인간이 항상 이야기하는 '존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은 존엄한가?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태어나고, 죽기 전까지는 생명 운동을 지속한다. 인간만 존엄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맥다이가 세즈에게 던진 말이 이 문제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사람에게 존엄성 같은 건 없어. 살아가는 거지. 그뿐이야."(p.251)

지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타인이 먹는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죽음 이후 타인의 음식으로 재활용된다면 존엄성을 해치는 것인가? 지구에서는 예부터 식량 부족으로 전쟁을 했다. 전쟁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먹을 것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먹지는 않는다. 그래서 얻은 존엄성이라면 동물을 죽여 먹이로 사는 인간은? 끔찍한 상상을 해야 하지만 흥미로웠다. 


「진화 혁명: 디벤둑 상급지식체화소의 강의 소묘」에는 '신인류'가 등장한다. 최근 출판된 베르베르의 작품 『키메라의 땅』에도 신인류가 등장한다. 구인류와 신체 구성요소가 다르며 정신적으로 더 완전하다. "의식과 유전자가 의식 우위로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100%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없다. 가정적이지만, 이들은 '진화했다'라고 표현한다. 이성이 감정을 완전히 조절하는 것, 이걸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구인류에 대해 배우던 카인은 교수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감정을 이성 아래 복속시키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p.215)


저자 : 이지연


책과 동물을 좋아하는 어린이였다가 책과 동물과 한문과 과학을 좋아하는 청소년기를 거쳐 더 더 많은 것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다. 세상에 좋은 것을 한 톨만큼씩 더해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울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상당 기간 단행본 편집자 및 번역자로 일해 왔으며, 옮긴 책으로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 연대기 6부작」을 비롯하여 『무한의 경계』, 『2010 스페이스 오디세이』, 『1인분 프렌치 요리』, 『빈티』 외 다수가 있다. 2024년 8월,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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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공한 리더들은 아무리 바빠도 미술관에 가는가 CEO의 서재 45
아키모토 유지 지음, 정지영 옮김 / 센시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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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왜 성공한 리더들은 아무리 바빠도 미술관에 가는가』는 표제어에서 '미술관'과 다른 단어, '성공' '리더'들과 조화하지 않지만 무슨 뜻인지, 무슨 분야의 책인지 명확한 표현을 하고 있다. 표제어를 한 번 읽으면 곧 '성공한 리더들은 미술관에서 무엇을 보는가'와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저자 아키모토 유지의 집필 취지 역시 간명하다. “나는 이 책에서 사업가들이 미술 작품 앞에서 어떤 영감을 얻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비즈니스에서는 숫자에 중점을 두기 쉽지만, 경영자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면 평소 경영에서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아트에서 배워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에 따르면 페이스북 마크 저커버그, 아마존 제프 베조스, 애플 팀 쿡, 현대카드 정태영, 신세계 정용진, 방탄소년단 RM. 늘 바쁜 일정의 세계 리더들이 꾸준히 찾는 장소 중 하나는 ‘미술관’이다. 뉴욕의 MoMA,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이들의 모습을 목격하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토록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트를 통해 경영적 통찰이나 창의적 영감을 얻는 걸까? 아니면 단지 고급스러운 취미로서 소비되는 것일까? 저자는 「세계 최고의 리더들은 미술관에서 보는 것」란 제목의 〈서문〉에서 ① 그 바쁜 사람들이 왜 미술관에 가는 걸까? ② 미술 작품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③ 자기 일과는 상관없어 보이는데, 거기서 무슨 아이디어라도 얻는 걸까? 등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이에 대한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해답을 던진다.

이 책의 저자 아키모토 유지는 도쿄예술대학 교수이자 미술관장으로, 연간 3만 명 정도 찾던 일본의 한 섬마을을 세계적인 예술 명소로 만든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클로드 모네의 〈수련〉, 구사마 야요이의 〈물방울 무늬 호박〉, 안도 다다오의 〈건축〉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유치하고 기획하면서, 전 세계 미술계와 경영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가나자와 21세기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해, 연간 255만 명이 찾는 현대미술관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그는 이런 활동을 이어오며 세계 곳곳의 CEO들과 교류해왔고, 그들이 예술 작품 앞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를 꾸준히 관찰하고 연구해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술과 비즈니스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사업가들이 미술 작품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영감을 얻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라고 집필 취지를 밝힌다.


책을 펴낸 출판사 소개글에서도 이 책의 성격을 명쾌하게 밝힌다. 『왜 성공한 리더들은 아무리 바빠도 미술관에 가는가』는 단순한 미술 입문서도, 작품 해설서도 아니다. 이 책은 숫자에 갇힌 리더가 ‘감각의 근육’을 회복하고, 그곳에서 기회를 발견하려는 전략서다. 당신은 책장을 넘길수록 더 많은 ‘왜’를 던지게 될 것이다. 왜 아무리 바빠도 그들은 미술관을 가는가? 그들은 미술관에서 무엇을 보는가?

저자에 따르면 세계적인 리더들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뉴욕의 MoMA,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 센터 같은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단순한 교양이나 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리더로서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작품 앞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미술 작품을 바라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나 영감을 얻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는 그들이 작품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이 책은 그런 궁금증에 답을 준다. 저자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과 비즈니스 리더들과도 활발히 교류해왔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리더들이 미술관을 찾는 진짜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아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친절히 알려준다.

“나는 이 책에서 사업가들이 미술 작품 앞에서 어떤 영감을 얻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비즈니스에서는 숫자에 중점을 두기 쉽지만, 경영자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면 평소 경영에서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아트에서 배워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p.5)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발간 취지를 밝히고 이 책을 필요로 한 독자들이 읽고서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설명한다. 서구의 미술관 관장은 MBA(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사람들이 많다고 저자는 귀띔한다. 미술사, 미학, 철학 등 아트에 필수적인 학문을 배우고, 거기에 추가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저자는 그만큼 서구에서는 아트와 경제가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아트 마켓도 마찬가지로 큰돈이 움직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데미안 허스트라는 영국의 현대 아티스트는 포르말린에 절인 상어와 양을 전시하는데, 그는 한 번의 전시에서 218점의 작품을 판매해 1억 1,100만 파운드(약 1,53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소개한다.


이뿐만 아니다. 현존하는 아티스트로 현대 미술품 부문의 경매에서 최고액을 기록한 제프 쿤스의 작품은 한 점이 9,107만 5,000달러(약 9.4조 원)였다. 저자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언뜻 보기에 돈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아트가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이 될까? 또 아트는 도대체 무엇을 팔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무엇을 공감할까? 평소에 접하는 비즈니스와 구조가 너무 달라서 오히려 관심이 생기는 것일까? 

다시 질문이 이어지지만 이 질문은 해답에 가깝다. "인간의 감성과 감정, 가치관이 비즈니스가 되는 것은 당장은 납득할 수 없을지 몰라도 현대 비즈니스에 알게 모르게 파고들어 있는 것이 이런 감성에 따른 가치가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문자 디자인인 캘리그래피를 배웠고, 옛 미국 야후 이후의 전 CEO 마리사 메이어가 영향을 받은 것은 화가인 어머니였다. 아이폰의 편리함은 단순히 기능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대한 공감이다. 지금까지 비즈니스와는 무관하다고 여겼던 직감이나 감성이 비즈니스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모습이다.

"요즘은 모든 제품과 서비스 안에 감성적, 감각적인 영역이 파고드는 시대다. 실제로 어느 분야에서는 감성이나 직감으로 얻는 만족이 큰 무게를 차지한다. 한편으로 그것을 노하우나 매뉴얼로 완벽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뛰어난 배우의 매력적인 연기나 숙련된 기술자, 탁월한 스포츠 선수의 퍼포먼스를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천재 아티스트가 만들어내는 아트는 더욱 재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귀중한 한 번의 사건, 독창성이 가치를 창출하는 법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감성이나 직감이라고 정리되기 쉬운 이런 내용을 굳이 정면에서 다루어 풀어갈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즉, 감성이나 직감이라고 쉽게 치부되는 예술의 힘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리더가 가져야 할 새로운 시선과 사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나아가 현대미술을 통해 독창적으로 사고하고 질문하는 법을 훈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함께 제안한다. 현대미술을 순간의 즐거움만으로 끝내는 것이아니라 미술을 즐기는 폭을 넓히고, 아트라는 매체(미디어)를 통해 현대사회를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대담한 일에도 도전해 볼 것을 독자들과 함께 다짐한다.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왜 성공한 리더는 아무리 바빠도 미술관에 가는가〉, 2장 〈그들은 미술관에서 무엇을 보는가〉, 3장 〈실리콘밸리의 기업가는 미술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4장 〈그들은 미술관에서 자신을 마주한다〉, 5장 〈아트, 돈, 비즈니스의 상관관계〉 등이다. ‘왜 성공한 리더는 아무리 바빠도 미술관에 가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그들은 미술관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사고하며, 그것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가’까지 단계적으로 내용을 확장해 나간다. 특히 2장에서는 오늘날 기업을 이끄는 리더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현대미술의 거장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 요제프 보이스를 다룬다. 저자와 함께 이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아트 작품을 비즈니스적 관점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또한 이 책은 아트가 비즈니스의 협업을 통해 성공적인 결과를 이뤄낸 사례들도 상세히 소개한다. BMW는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에서 미래형 자율주행차 디자인의 실마리를 얻었고, 명품 기업 로에베는 전통 공예의 감성을 현대 소비자에게 통하는 브랜드 언어로 재해석했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자동차가 사람에게 말을 거는’ 개념을 디자인에 도입했다. 더 나아가 아트가 브랜딩과 디자인에 영감을 주는 차원을 넘어, 프라이머리·세컨더리 마켓의 구조, 연출화된 경매 시스템, 블록체인 기반 미술 거래 등 오늘날 미술 시장의 흐름까지 폭넓게 다룬다. 성공한 리더들은 단지 작품을 ‘보는 눈’이 아니라 주변 지식과 함께 ‘읽는 감각’을 키우며, 미술을 통해 비즈니스의 기회를 포착해낸다. 

이 책은 단순한 미술 입문서도, 작품 해설서도 아니다. 이 책은 숫자에 갇힌 리더가 ‘감각의 근육’을 회복하고, 아트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그곳에서 기회를 발견하려는 전략서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 많은 ‘왜’를 던지게 될 것이다. 지금, 그들은 미술관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왜 아직 그곳에 가지 않았는가? 이 책은 이와 함께 각 장의 뒷 부분에 「한 줄로 이해하는 현대미술」과 「리더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현대 미술 개념」 코너를 각각 마련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비즈니스라도 뜻밖의 아이디어가 샘솟는 순간에는 비슷한 감각이 있지 않을까? 보통 무언가를 생각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귀납적인 사고다. 하나하나의 체험을 단서로 삼아 눈앞에 있는 문제를 분석?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과거라는 한정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제를 파악하는 방식 자체가 협소해진다. 그래서 과거의 체험이나 상식을 일단 보류하고, 눈앞의 문제를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p.83)


시대를 앞서 조명한다는 현대미술에는 이렇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을 읽어낼 힌트가 많이 담겨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을 가까이해서 변화의 전조를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다면 그만큼 비즈니스 기회도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특히 기업가는 사람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아티스트가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려는 행위와도 비슷할지 모른다.(p.150)


저자 : 아키모토 유지


도쿄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작가 및 미술 평론가로 활동했다. 1991년 현대미술의 힘으로 버려진 섬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의 섬’으로 거듭나게 한 ‘베네세 아트사이트 나오시마’를 총괄했다. 2001년 구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을 탄생시킨 ‘아웃 오브 바운즈’전과 오래된 민가를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킨 ‘집 프로젝트’전을 기획했다. 나오시마후쿠다케미술관 재단 상무이사와 베네세 아트사이트 나오시마 디렉터로도 활동했으며 2007년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해 일본 내 미술관으로서는 연간 최대 방문객인 255만 명이 찾는 미술관으로 성장시켰다. 현재는 도쿄예술대학 교수 및 도쿄예술대학미술관 관장, 네리마구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나오시마 탄생》,《놀라운 가나자와》,《일본 속 현대미술을 여행하다》 등이 있다.


역자 : 정지영


대진대학교 일본학과를 졸업한 뒤 출판사에서 수년간 일본도서 기획 및 번역, 편집 업무를 담당하다 보니 어느새 번역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현재는 엔터스코리아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40세의 벽』『만화로 보는 워런 버핏의 투자전략』『부자들의 인간관계』『비즈니스 모델 디자인』『돈이 쌓이는 가게의 시간 사용법』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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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사토 겐타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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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약(藥)의 '역사'보다는 어떤 약이 언제 발명(발견)돼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더 무게를 둔 인문학 서적이다. 사실 약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것이고, 특정 학문 분야 때문에 발달돼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약은 인류의 질병 발생 결과로 만들어지기에 역사를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으로는 약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없다. 법이 만들어진 이유도 공동 생활에 해를 끼치는 나쁜 행위가 발생되었기에 생긴 것과 같은 이치로 독자는 이해하고 있다. 인류에 유효한 약이 때로는 엄청난 효과로 나타나기도 하고, 더 많은 숫자는 전 인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것도 많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바꿀 만큼 영향력 있는 약은 분명히 있었다. 어떤 약인가? 저자 사토 겐타로의 집필 취지와 개인적으로는 독자의 호기심이 맞아 떨어졌다. 
저자의 집필 취지는 분명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역사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한발 더 나아가 ‘그때 만약 이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도 좋다고 본다. 인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만약’은 역사를 훼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좀 더 풍성하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는 활력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의 결정적 장면에 호기심을 품고 ‘만약’을 대입해보자."
"만약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 말은 '역사의 만약' 중에서 가장 유명한 파스칼의 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세월을 뛰어넘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만약 그때 그 약이 없었더라면」이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저자는 사람들은 한 여성의 코 높이라는 지극히 사소한 사건이 2,000년 후인 오늘날의 지도마저 바꾸어놓았다고 상상하며 짜릿한 흥분을 느낀다고 밝힌다. 베이징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바다 건너 뉴욕에 폭풍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와도 사뭇 닮았다.


위대한 정치가나 장군들만 역사를 바꾸는 원인은 아니다. 지진과 화산 분화 등 천재지변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 가뭄이나 한파 등의 기후 변동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 각종 질병 역시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BC 430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를 덮친 병마는 1년 사이에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를 포함한 수많은 아테네 시민을 쓰러뜨렸고, 경쟁 관계에 있던 스파르타에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346년, 흑해 연안의 카파(Kaffa)라는 도시를 포위했던 몽골군은 페스트로 죽은 아군 병사의 시신을 투석기에 매달아 성벽 안으로 던져 넣었다. 역병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친 사람들 탓에 페스트는 삽시간에 들불처럼 전 유럽으로 번져 나갔고,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되었다.
또 16세기, 스페인 출신 용병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200명도 채 안 되는 부하를 이끌고 인구 1,600만 명에 달하는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 기적의 그늘에는 유럽에서 정복자들과 함께 건너온 천연두라는 전염병이 숨어 있었다. 18세기에도 미국 선주민 사이에 천연두가 맹위를 떨쳤다.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 병은 영국과 프랑스의 정복 활동을 한몫 거들며 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다. 몇 번씩 전염병을 경험하며 면역력을 키워온 유럽인들과 달리, 신대륙 선주민들은 구대륙에서 들어온 질병에 완전히 무방비했기에 낯선 질병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이처럼 각종 전염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역사를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다시 말해 인류가 병마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개발한 다양한 무기, 즉 의약품도 역사의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전염병 피해 사례로 역사를 바꾸는 이야기가 있다면, 반대로 치명적인 감염병이 외상의 다른 상처로 전이되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대량 발생되는 경우도 역사에는 있다. 특히 외상을 다른 감염병에 감염되기 전에 치료를 하는 특효약으로 인해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사례도 많다. 만약 바스쿠 다 가마와 마젤란이 비타민C를 알았다면, 만걍 특수한 푸른곰팡이 포자가 런던의 병원에 있던 알렉산더 플레밍에게 날아들지 않았다면, 만약 양귀비에서 생산되는 알칼로이드 분자가 탄소 한 개 분량이 빠진 구조였다면······, 단언컨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계 지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11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의약품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을까?〉 외에 2장 〈세계사의 흐름을 결정지은 위대한 약, 비타민C〉, 3장 〈인류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 말라리아 특효약, 퀴닌〉, 4장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지닌 약, 모르핀〉, 5장 〈통증과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약, 마취제〉, 6장 〈병원을 위생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주인공, 소독약〉, 7장 〈저주받은 성병 매독을 물리쳐준 구세주, 살바르산〉, 8장 〈세균 감염병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 설파제〉, 9장 〈세계사를 바꾼 평범하지만 위대한 약, 페니실린〉, 10장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약, 아스피린〉, 11장 〈악마가 놓은 닻에서 인류를 구한 항 HIV 약, 에이즈 치료제〉 등 10가지 약에 대해 썼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인류 역사를 ‘질병’이라는 창과 ‘약’이라는 방패의 투쟁 역사로 파악한다. 이 책은 많은 국가와 사회를 치명적 위기에 빠뜨렸던 10가지 질병과 결정적 고비마다 인류를 무서운 질병의 위협에서 구한 10가지 약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저자의 관점은 인류 역사가 질병과 약의 투쟁 역사다. 괴혈병, 말라리아, 매독, 에이즈 같은 치명적인 질병이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 날카로운 창처럼 인류를 위협하면 비타민C, 퀴닌, 살바르산, AZT 같은 약이 기적적으로 등장하여 든든한 방패가 됐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고들 말하지만, ‘그때 만약 이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면 역사는 좀 더 흥미진진하고 생동감 있게 보인다는 사실에 독자는 공감한다. 인류 역사의 몇 가지 장면에 ‘만약’을 대입해보자는 주장에 독자의 관점에는 만약(萬若)이 만약(萬藥)으로 보이기도 한다.
1장은 '약의 기원'과 약의 영향력을 밀도 있게 써나간다. 문자 기록(유사 이후)이 이루어지면서 질병에 대한 다양한 비법과 비방이 축적되고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후나야마 신지 일본 약과대학 교수는 "인류는 독과 약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와 점토, 종이 등의 기록 수단을 발명한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했다(『독과 약의 세계사』, 2008)고 저자는 인용한다. 약의 기원을 역사를 훨씬 거슬러 올라가지만 문서나 기록이 남은 후에도 증명되지 않은 약이나 치료법으로 희생양이된 사람들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실제로 세계적인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와 로베르트 슈만을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 그들의 직접적 사인이 바로 매독 치료에 사용한 수은 중독이라는 주장이 단순한 주장을 너머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이유로 당시까지 의약품은 역설적이게도 '효능 있음'이 아닌 '효능 없음'으로 역사에 발자국을 뚜렷이 남긴 사례가 무수히 많다. 책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무렵이 되어서야 의약품은 비로소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평균수명을 연장하는 데 기여한다. 이 시대에 이르러 그런 일이 가능했던 데에는 세균학의 발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대에는 '쓰레기 약'으로 일컬어지는 의약품 목록으로 빼곡히 가득찬, 흔히 말하는 '의약품 리스트'가 발견됐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유적 등에서도 고스란히 잘못된 처치법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악마를 쫓아낸다는 퇴마 약품은 외과수술에도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그 유적지에서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있는 미라가 여러 구 발굴된 사례도 있다는 것. 다행스럽게도 세월이 지나 '의학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히포크라테스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쓰레기 약'이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책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약품은 「비타민C」이다. "비타민C가 의약품인 줄 아셨어요?"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2장에서는 만약 위대한 항해가이자 탐험가인 바스쿠 다가마와 마젤란이 비타민C를 알았다면?이라는 질문으로 비타민C의 등장시기와 이유, 과정 등을 기술하고 있다.
대항해 시대에 '비타민C'를 알았다면 대다수 선원을 괴혈병으로 잃지 않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더 많은 신천지를 발견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만약 비타민C를 알았다면 그들의 고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향신료 무역에서 막대한 부를 얻어 세계를 제패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 만약 그랬다면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계지도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괴혈병으로 수많은 사람을 잃고 나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괴혈병이 만든 비극을 영원히 끝낸 영웅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린드, 영국 해군 소속 군의관이었다. 1747년 제임스 린드는 효과적인 괴혈병 치료법을 찾기 위해 12명의 괴혈병 환자를 같은 장소에 모아놓고 매일 같은 식단을 제공한다. 환자를 두 명씩 여섯 조로 나누어, 각각의 조에 사과 과즙과 항산염 용액, 식초, 바닷물, 마늘 등으로 만든 반죽과 오렌지 두 개, 레몬 한 개를 먹이는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결과는 놀랄 만한 효과가 있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증상이 나타났으나 실험식이 아닌 일반적인 식사를 지속한 사람도 있었다. 린드는 다양한 사례를 자세히 관찰하고 그 결과를 꼼꼼히 기록했다. 그로부터 엿새 후 실험 결과가 나왔다. 오렌지와 레몬을 제공한 병사는 병이 거의 완치되었으나, 사과 과즙을 마신 사람들은 미미하게 회복 조짐을 보였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증상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 실험으로 린드는 '감귤류는 괴혈병 특효약이다'라는 가설을 훌륭하게 증명해냈다.


만약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강희제의 주치의 손에 ‘예수회의 가루’ 퀴닌이 전해지지 않았다면?이란 질문은 말라리아 치료약 「퀴닌」의 탄생 실화다. 책에 따르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강희대제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역시 명군으로 인정받는 옹정제, 건륭제 역시 역사 무대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며, 청나라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 판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강희제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61년간이나 제위에 있으면서 많은 위대한 업적을 세워 중국 역사상 최고 명군 중 한 명으로 남았다. 300년 가까이 이어진 청 왕조의 기반이 거의 전적으로 그에 의해 닦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강희제가 제대로 날개를 펴보기도 전에 종말을 맞이할 뻔한 치명적인 위기를 만났다. 마흔 살에 떠난 원정길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탓이었다. 그 바람에 한때 그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는데, 운 좋게도 예수회 선교사가 진상한 특효약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예수회의 가루’라 불리는 약 퀴닌이 바로 그것이다.
여담이지만,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 부왕에게 병문안 온 황태자는 황제의 건강을 염려하기는커녕 이제 곧 자신이 황위에 오른다는 생각에 희색이 만면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한 강희제는 인간적인 서운함에 더해 황태자의 작은 그릇에 실망하여 황위를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강희제에게 황위를 물려받은 이가 또 한 명의 명군인 옹정제이며, 그 뒤를 이은 황제가 역시 명군의 반열에 오른 건륭제다. 퀴닌은 왜 ‘예수회의 가루’라는 이름으로 불렸을까? 대항해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포교를 떠난 선교사들에 의해 퀴닌이 유럽과 아시아 등 여러 대륙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 세계로 전파된 퀴닌은 영국 왕 찰스 2세, 청나라 황제 강희제 등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이 기적의 가루 덕분에 1655년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인 콘클라베는 장장 석 달을 끌었음에도 말라리아로 인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마쳤다. 그로부터 30여 년 전인 1623년 콘클라베에서 선거를 위해 모인 추기경 중 10명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중 8명이 사망했으며, 교황에 최종 선발된 우르바누스 8세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던 걸 고려하면 예수회의 가루, 퀴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실감이 난다.


페니실린은 세계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약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중 재미있는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할까 한다. 페니실린이 목숨을 구한 세계 최초의 인물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일본 전국시대 후반인 158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진영과 오다 노부카쓰, 도쿠가와 이에야스 진영이 맞붙었던 전투?옮긴이)에서 다쳤고, 상처 부위에 황색 포도상구균으로 추정되는 균이 들어가 등에 큼직한 종기가 생겼다. 이에야스의 상태는 나날이 악화해 갔다. 한데, 주군의 용태를 걱정스레 지켜보던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오사카에 있는 가사모리이나리 신사로 가서 ‘종기에 효험이 있다’는 환약 한 알을 받아 돌아왔다.(p.199)


저자 : 사토 겐타로(Kentaro Sato, さとう けんたろう, 佐藤 健太郞)

1970년 5월 8일 효고현에서 태어나 도쿄대 이과대학교 이학부 응용화학과를 졸업했으며, 도쿄공업대학교 대학원에서 유기합성화학을 공부했다. 1995년부터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의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당시의 경험은 유기화학 세계에 특별한 흥미를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다. 1998년부터 인터넷에 CG로 분자 이미지를 제작하고 유기화학 관련 기사를 집필하여 올렸는데, 그 글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이자 스타 저자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말,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냈으며 퇴직 후 과학 전문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주로 화학 관련 잡지에 칼럼을 연재한다. <이메일매거진 유기화학>을 집필?제작하여 발송하며,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한다. 2010년 『의약품 크라이시스』로 과학 저널리스트 상을 받았으며, 2011년에는 화학 커뮤니케이션 상도 받았다. 주요 저서로 『탄소 문명론』 『의약품 크라이시스』 『제로 리스크 사회의 덫』 등이 있다.

역자 : 서수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회사 생활에서 접한 일본어에 빠져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해 출판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를 삶의 모토로, 더 많은 책을 읽고 알리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책을 읽고 옮긴다. 옮긴 책으로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세계사를 바꾼 21인의 위험한 뇌』『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사랑과 욕망 세계사』『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한 권으로 읽는 미생물 세계사』 『과학잡학사전 통조림 - 일반과학편』 『과학잡학사전 통조림 - 인체편』 『과학잡학사전 통조림 - 우주편』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63가지 심리실험 - 뇌과학편』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1가지 심리실험 - 인간관계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8가지 심리실험 - 자기계발편』『소수는 어떻게 사람을 매혹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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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줄이고 바꿔라 - 문장을 다듬는 세 가지 글쓰기 원칙, 개정판
장순욱 지음 / 북로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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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글쓰기에 많은 독자들이 점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글쓰기가 모두 펜과 종이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디지털 문화의 깊숙한 지점에 이르러 펜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일부일 뿐이다. 이에 따라 글쓰기의 필요성도 사실 예전에 비해 훨씬 줄었기에, 점점 더 어려워진 점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빠르게 의사 전달과 소통이 가능한 SNS의 무한 발전에서 더욱 잘쓴 글보다는 빠르게 쓰는 것이 더 중요해졌기에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일은 잦을 것이다. 펜으로 종이에 쓰는 글을 쓰던 시절, 아날로그 시대의 글쓰기에는 글을 잘 쓰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전업 작가가 아니더라도 편지 하나라도 모두 손글씨로 써서 전달해야 했기에 글씨체부터, 오탈자, 문장의 흐름, 적절한 어휘의 사용 등 그야말로 한 자, 한 자가 집중력이 필요했었다. 이 시기에는 비즈니스 면에서도 보고서, 설명도 등 많은 계획서나 기안서 등을 쓰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에 글쓰기에 더욱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고, 오탈자나 맞춤법까지도 그 문서의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절 글쓰기는 종류를 막론하고 전업 작가들의 글쓰기가 기준이 되었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3다(多)가 기본 조건이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은 쓰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SNS 시대에 인스턴트 메신저, 블로그 등이 의사전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입시나 입사에서 논술이나 자기소개서가 보다 더 중요해졌다. 시험의 당락이나 판단의 적부(適否)를 가려야 하는 기준으로 됐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잘 써야 한다. 간결하고 매혹적인 글이 관심을 끈다."는 다름이 없다. 다만 평소에는 SNS나 인터넷에 댓글 정도만 쓰던 글쓰기 습관에서 올바른 글쓰기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정작 필요할 때 적절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워진 것뿐이다. 

이 책 『지우고 줄이고 바꿔라』의 저자 장순욱은 글쓰기가 어려워진 배경이나 상황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고 단언한다. 아울러 얼마나 잘 썼는지 평가해줄 사람도 드물고 기준도 불명확하다. 사람마다 잘 썼다는 기준이 때론 다르기도 하다고 밝힌다. 글쓰기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다. 독자도 공감한다. 독자도 아날로그 세대라서 학교에서 배울 때까지는 아날로그 글쓰기 방식으로 배웠다. 다만 사회 생활 시작할 무렵부터 사회에서 디지털 문화가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해 컴퓨터 교육도 따로 받았다.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는 이유이다.



저자는 잘 쓴 글이란 간명함을 갖춘 문장의 집합이라고 강조한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써야 명확한 의사전달이 가능해진다는 신념으로 무장된 것 같다. 그렇다면 간결하게 쓰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이 책 표제어대로 '지우기’, ‘줄이기’, ‘바꾸기’ 세 가지다. 저자에 따르면 글이 간명하지 못한 이유는 군더더기가 문장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걸 찾아 지우거나 줄이고 혹은 바꾸면 된다. 저자는 글쓰기 습관 고치기에 주목해 많은 사람의 글에 등장하는 나쁜 습관을 정리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이 고쳐야 할 나쁜 습관을 찾아낸다면 글솜씨가 부쩍 늘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어떻게 쓸 것인가〉, 2장 〈지우기〉, 3장 〈줄이기〉, 4장 〈바꾸기〉, 5장 〈글쓰기 강의〉, 6장 〈실전 연습〉 등이다. 필기구와 종이만으로 글쓰기를 하던 예전이나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모든 글쓰기를 대신하는 지금이나 좋은 글을 쓰는 기본은 변하지 않았다. 바뀌어도 너무 많은 것이 순식간에 바뀌어서 적절한 방법을 제대로 몰라서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이다. 혹은 지금처럼 지내도 소통이나 웬만한 업무 처리에는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글을 잘 쓸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책읽기, 글 다듬기도 컴퓨터를 통하거나 컴퓨터가 알아서 체크해주기 때문에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되지 않는다. 이메일, 카카오톡, SNS 공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바뀐 환경이다. 어디서든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와 글로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문장보다는 간결하고 빠른 속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나 글을 자주 쓰는 만큼 글쓰기 실력이 향상된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나빠지는 현상이 눈에 띈다. 

입말(구어) 그대로를 글로 옮길 뿐 아니라 짧은 문장만을 쓰는 탓에 올바른 단어로 긴 문장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맞춤법도 거의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굳어버린 잘못된 글쓰기 습관이 학생의 답안지와 과제물, 직장인의 보고서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학교와 직장 그리고 SNS 공간에서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쉽고 빠르게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방법은 없을까? 좋은 글 쓰기는 이런 문제의식의 발로에서 시작된다.


좋은 글쓰기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이 책 『지우고 줄이고 바꿔라』는 유용한 책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 신문사 기자와 출판 관련 일을 해오면서 체득한 글쓰기 노하우를 아낌없이 소개한다. 그는 글을 쓸 때 알게 모르게 나타나는 나쁜 습관을 정리해 이를 세 가지 원리로 손쉽게 바로잡는 방법을 알려준다. 즉 ‘지우기’ ‘줄이기’ ‘바꾸기’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군더더기 많고 이해하기 힘든 문장을 간결하고 매력적이며 효율적인 글로 고칠 수 있게 도와준다.

글을 잘 쓰려면 국어 교과서를 다시 봐야 할까? 맞춤법과 띄어쓰기, 표준어와 외래어 표기법 등 어문규정을 배워야 하나? 글쓰기 교실이라도 다녀볼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고민일 것이다. 이 책은 글쓰기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보다는 기존의 글을 잘 고쳐 더 좋은 글로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세대라고 통칭되는 21세기 뉴밀레니엄 세대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점들을 숙지하고 계속 사용하다 보면 확실히 달라지는 글쓰기로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을 저자는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테면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또는 불필요하게 사용하거나 ‘~적’ ‘~버렸다’와 같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한결 깔끔하고 정확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문장을 다듬는 세 가지 원리는 다음의 예와 같다.

① ‘지우기’에서는 명사의 반복, 주어와 술어의 반복, 구와 절의 반복, 동사의 반복, 의미의 반복, 한자어나 영어의 반복, 문장의 의미 반복, 서술어의 의미 반복, 부사/ 형용사 의미 반복, 조사의 반복, 너무 많은 접속사, 불필요한 명사, 불필요한 동사, 불필요한 보조사, 불필요한 의존명사, 불필요한 지시대명사를 기술하고 있다.

② ‘줄이기’에서는 늘어진 동사, 늘어진 명사, 간접화법, 동사┼동사, 목적어┼서술어 ,부사┼관형어, 복수형, 짧은 단어 사용하기, 의미 없는 접사, 끊기에 대한 설명이다.

③ ‘바꾸기’에서는 호응하기, 구어체 바꾸기, 수식어 위치에 알맞게 쓰기, 영어식 표현 바꾸기, 같은 단어의 반복, 능동적으로 행동하기,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쉬운 단어 택하기, 구체적으로 쓰기, 끼리끼리 모아주세요 등이 서술돼 있다.


책의 1장 〈어떻게 쓸 것인가〉는 총론이다. 즉 '지줄바'(지우기 줄이기 바꾸기)를 잊지 말 것을 주문한다. 책에 따르면 지우기는 반복 혹은 중복을 피하는 작업이다. 타자가 야구배트 두 개를 들고 타석에 들어선다고 안타가 곱빼기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휘두르기가 불편해 아웃되기 더 쉽다. 수비수가 양손에 글러브를 낀다고 공을 잘 잡는 것 역시 아니다. 반복해서 사용된 단어도 이와 같다. 불필요한 단어를 찾아 없애야 한다. 두 번째는 줄이기다. 줄이기는 불필요한 지방을 빼는 일종의 다이어트와 같다. 몸무게가 70킬로그램인 사람이 그 가운데 10퍼센트인 7킬로그램만 빼도 몸매가 살아난다. 70자인 문장에서 일곱 글자만 줄여도 글맵시가 몰라보게 좋아진다. 간결해지고, 임팩트는 증가한다. 바꾸기는 어색하거나 맥락에서 벗어난 말을 수정하는 작업이다. 반복된 단어는 우선 지우기를 시도하는데, 어려운 경우 의미가 비슷한 단어로 바꾸거나 표현이 생뚱한 경우도 다르게 써야 한다.

저자는 그러나 이 책에서 정리한 36가지 문제가 원고에 단 한 번이라도 나타나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완벽하게 쓰는 일은 누구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이지당 한 번쯤 같은 문장에 단어가 반복되거나 동사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같은 문제가 습관처럼 반복되는 지점이다. 그걸 찾아 고치면 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기자 생활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풀어쓰고 있다. 누군가의 글을 고쳐줄 때는 완전히 뜯어 고치기보다 지줄바를 함으로써 본래의 맛을 최대한 살려줄 것을 권유한다.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고쳐쓰기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이후 저자는 타인의 글을 고칠 때는 각각의 맛을 최대한 살린 가운데 지줄바로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문장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책의 첨삭도 원문 구조를 유지한다는 원칙 하에 작업했다. 원래 구조를 살리면서 지우고 줄이고 바꿨다. 문장을 완전히 뒤집어 뜯어 고친 경우는 드물다고 밝힌다.


책에 따르면 글을 쓰는 이유는 어려운 단어 구사 능력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가능하면 쉽고 알아듣기 편한 말로 표현해야 한다. 물론 쉬운 말이라는 게 앞서 본 것처럼 풀어서 길게 늘여 쓴 걸 뜻하지는 않는다. 생소하고 또 이해하기 힘든 단어를 가급적 쉬운 것으로 대체하라는 말이다. 예컨대 예전에는 많이 사용했으나, 최근 빈도가 낮아진 단어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걸로 바꿔야 한다. 또한 전문용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기에 모두 이해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도 최대한 알 수 있게 써야 한다. 그래야 읽는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장황하게 설명해도 안 된다. 짧고 간략하게, 하지만 초보자도 이해할 수 있는 전달능력이 전문적인 글을 대중적으로 쓸 때 필요하다. 지식은 자기만족을 넘어 많은 사람과 교감할 수 있을 때 보석 같은 가치가 생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게 전문용어를 쉬운 단어로 풀어내는 능력이다.

2장 〈지우기〉, 3장 〈줄이기〉, 4장 〈바꾸기〉는 지줄바에 대한 각론을 펼친다. 특히 용례를 들어 친절하게 수정 전과 수정 후의 문장을 독자들이 비교할 수 있게 저자가 직접 바꿔 책에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높인다. "글을 쓰다 보면 ‘~적’, ‘~화’, ‘~성’, ‘~감’ 등 불필요한 접사가 붙는 경우가 많다. 무의미한 접사와 마주치면 달리던 차에 급브레이크가 걸리는 느낌이 든다. 한 번 정도는 괜찮지만 반복되면 멀미가 난다. 반대로 그걸 제거하면 뻥 뚫린 길을 달리는 상쾌함이 느껴진다. 덜컹거리며 갈 것인가, 시원하게 달릴 것인가. 답은 물론 후자다. 글은 최대한 물 흐르듯 유연해야 한다. 딱 한 글자지만 불필요한 접사가 그걸 방해할 수 있다. 이는 곧 한 글자만 치우면 글이 몰라보게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p.125)

5장은 〈글쓰기 강의〉란 제목의 장(章)이지만 지즐바를 통해 말하지 못한 바를 보완하고 또 심층적 글쓰기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마련한 장이다. 중요한 항목 10개만 선정해 여기에 적어본다. ① 호흡으로 고치기 ② 노력이 명문을 만든다 ③ 오탈자의 일상 ④ 가능하면 구조를 흔들지 말 것 ⑤ 이왕이면 다홍치마 ⑥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라 ⑦ 양만큼 질도 중요하다 ⑧ 얼마나 잘 버리느냐가 성패를 결정한다 ⑨ 첫 문장이 중요하다 ⑩ 욕심 버리기


오늘 경기는 삼성이 한화를 2대 1로 이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오늘 경기는 삼성이 한화를 2대 1로 이겼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리포터가 이렇게 말했다. 불필요하게 많이 등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같습니다’가 아닐까. 7월 초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으면 ‘여름이 다가왔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굳이 ‘여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라고 할 필요가 없다.(p.104)


일은 계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적’은 의미 없는 군더더기다. 빼고 나면 문장이 간결해진다. 읽으면서 걸리는 느낌이 절반쯤 줄어든다.(p.125)


저자 : 장순욱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경제를 몰라 세상이 답답하고 취직이 걱정돼 제대 후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고, 내친김에 영국 뉴캐슬 대학교에서 국제금융을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경제신문과 스포츠투데이를 거쳐 중앙일보 NIE면 담당 기자와 팀장으로 일했다. 기자 시절부터 실물경제와 재테크의 다양한 면을 추적해왔고, 이를 바탕으로 《푼돈의 경제학》, 《부자들의 상상력》, 《하룻밤에 읽는 경제》, 《불황의 경제학》, 《시간과 균형》 등 여러 책을 썼다. MBC, SBS, YTN, CBS, KTV 등에서 경제평론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미국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세계경제를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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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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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모국어로 글을 써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꼽을 수 있다. 또 세계의 전 문인들을 대상으로 주는 상은 물론 자국 내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외국어를 몰라서 모국어로만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외국어, 심지어는 여러 나라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문인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언어에 정통해 각각의 언어로 글을 써 인정받고 수상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물론 과문(寡聞)한 독자로서 아는 것이 적어 모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책 『영혼 없는 작가』의 저자 다와다 요코는 이 두 가지 언어로 모두 책을 냈다. 일본 문학인이기 때문에 일본어로 쓰고 독어로 번역을 따로 한 작품이 아니다.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 

다와다 요코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범상치 않다. 독자 개인적으로는 '이중 언어 작가'라기보다는 '다중 언어 작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 〈엘리〉에 따르면 다와다 요코는 얼핏 범상해 보이는 세계의 기호를 독창적인 시선으로 해독해 나가는 유심한 관찰자다. 또 모(국)어와 외국어의 문턱을 넘어 다니며 몸의 감각으로 낯선 언어의 세계를 유영하는 유목민이라고도 말한다. 그에 대한 수식어는 이뿐만 아니다. 엄격하고 절제된 사유로 신화적 상상의 안팎을 넘나드는 샤먼이라는 별명도 소개한다. 4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하며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은 그의 이름을 문학사에 알린 대표작이자, 언어와 세계에 대한 작가 고유의 사유가 집약되어 있는 작품 『영혼 없는 작가』의 개역 증보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독문학자 최윤영 교수의 기획 및 번역으로 초판본 출판됐다. 이후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있었지만, 저자의 새 중요한 작품과 초판본 이후 발표된 작품들을 추가한 개역 증보판으로 펴냈다. 초판본에는 열네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었지만 이번 새로운 판본에는 ‘다와다 유니버스’의 중요한 조각 아홉 편이 추가되었다.


출판사에 따르면 전체 스물세 편의 글은 다와다 요코가 독일어로 처음 쓴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부적』(199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 등 세 권에서 다와다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단편들을 가려 뽑았으며, 그중에서도 몽환적이고 에세이적인 사유가 돋보이는 초기 대표작 『부적』 열여섯 편은 전부 번역해 실었다. 최윤영 교수는 이번 개역 증보판을 작업하며 새로운 단편들을 번역하는 작업과 함께 기존 번역문도 전면적으로 다시 손질했다. 또 다와다 요코의 세계를 개괄하는 해설도 책 뒷 부분에 새로이 써 독자들에게 풍성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주었다.

독자가 저자 다와다도, 또 그의 책을 읽어본 적도 없어 잘 모르고 있었을 뿐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인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이 책은 독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복간을 요청한 책이기도 하다는 것이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특히 지난 5월 다와다 요코 방한 당시 많은 독자가 이 책의 절판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며 재출간을 요청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개역 증보판을 펴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독자들이 이 책을 특별히 찾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몇 년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작가인 만큼 한국에도 그의 저서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영혼 없는 작가』는 작가의 세계를 관통하는 언어-예술-세계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라서 이번 재출간은 더욱 뜻깊다고 출판사 측은 덧붙인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최윤영은 표제어 '영혼 없는 작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마치 과문한 독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듯하다. "흔히 작가를 그 나라나 문화권을 대표하는 '영혼'이라 생각한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를 러시아의 영혼이라 부르듯 말이다. 그런데 다와다 문학의 핵심적 특징을 보여주는 '영혼 없는 작가'의 제목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에게 영혼이 없다니, 뭔가 기구한 사정이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고, 혹은 나라나 사회의 영혼을 대변하는 작가가 그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인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작가는 차원을 달리하여 이야기한다. 오늘날 긴 여행 중에 영혼은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몸을 따라가지 못해 분실되는 사태가 종종 발생한다는 기발한 착상은, 사실 인디언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p.265)


역자는 다와다에게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경계를 넘나들며 쓰는 과정에서 한 언어에 얽매인 사고를 풀어내고, 다양한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유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힌다. 특히 다와다는 많은 외국어를 보고, 듣고, 인지하면서 의미를 새롭게 상상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듯하다. 이 책의 각각의 글들은 이를 증명이라 하듯 언어의 신세계는 물론, 세계의 여러 작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언어 비교를 하듯 글로써 풀어내는 능력을 보면 독자들이 놀랍고 신비로운 생각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는 말과 글의 차이점은 물론 각 나라 언어의 특징을 연결하는 공통적 의미에 대해 추출해 내기도 한다. 

또 독일어로 쓰인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수록된 글들이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다와다 요코의 문학은 일본어 작품과 독일어 작품이 주제, 형식,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일본어 작품이 스토리를 갖춘 본격 문학에 가깝다면, 독일어 작품은 작가가 문화 간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주제화한 에세이적 성격이 강하다고 역자는 설명한다. 조용하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날카롭게 지적하는 문화적 차이에 대한 통찰로 사유의 직접적 전환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와다의 일상적 관찰을 따라가다보면, 말 그대로 허를 찌르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와 함께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세심하고 민감하고 다정한 시선을 잘 드러낸다. 제목에서부터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을 결합해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유머러스한 방식은 다와다식 하이브리드의 원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전”과 “마을”, “사랑”과 “광물학”, “고트하르트터널”과 “생물의 배”를 연결한다. 사전에서 단어들이 빠져나와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고, 몸을 암석에 빗대어 주름진 층을 상상하고, 터널을 통과하는 것을 배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는 식이다.


이러한 연결과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의미를 찾는 연구”부터 “의미와 벌이는 유희”까지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특히 이중 언어 사용자로서 몸으로 체득한 언어적 사유가 도드라진다. 세계와 자신의 관계가 언어로 불가분하게 맺어져 있다는 깨달음, 언어를 이동하면 사물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는 의식,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될 때 그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맛을 내는 혀에 대한 자각 등 여태껏 심상하게 느꼈던 일상의 모든 것이 다와다 요코라는 프리즘을 통과해 새롭게 인식된다. 


“자, 이제 중세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여행 가이드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이 도시가 중세 땐 실제로 존재했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내 질문에 가이드는 다소 놀란 듯했지만 곧바로 바른 답을 내놓았다. “이 중세도시가 아직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스스로 알아내셔야 해요. 어쨌든 이 도시는 마치 중세를 연출한 무대 세트 같아요.”

“무대 세트”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중세를 한때 존재했다가 영원히 사라진 과거의 시대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중세는 반복해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처럼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어떤 것이었고, 매번 새롭게 재현되는 무엇이었다.(p.67) - 「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 독일 수수께끼」 중에서


이렇게 인식된 모든 것은 다와다를 통해 인류학적 현상, 신중히 해독해야 할 세계의 암호로 바뀐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불가사의를 문학적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민족지인 셈이다.

이 책은 형식 면에서 에세이로 분류되지만, 작가는 전통적 장르 구분의 구속에서 벗어나 언어와 사유와 장르의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덕분에 이 책의 글들은 픽션과 에세이가 서로 몸을 바꿔가며 단어와 문장, 글이라는 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향연을 눈부시게 선보인다. 작가가 유심히 포착하는 대상들도 그 스펙트럼이 넓은데, 시베리아 횡단 열차부터 연필, 타자기, 중세도시, 통조림, 전철, 배우, 알프스 터널, 일요일, 음악, 파울 첼란까지 실로 다양해서, 소재별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밖에도 다와다의 문학 세계 초기부터 일관되게 흐르는 언어와 정체성, 국가주의의 폭력성을 문제 삼는 비판적 인식은 장르와 언어에 대한 경계적 사유 너머를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귀신들의 소리」에서 어느 독일인이 바흐를 독일 음악이라고 무심히 주장한 사례는 “우리”라는 범주를 암묵적으로 전제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경계 밖으로 몰아내 타자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텅 빈 수사에 대한 “구역질” 역시 단일한 언어를 기반으로 한 민족주의, 집단주의를 향한 일침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어떤 귀신들이 공기 중에 특별한 떨림을 불어넣었을 수 있다. 내 몸은 이 쓰레기들을 질료화하기 위해 사용된 것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때조차 나는 문장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상상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문학을 쓰는 것이 한층 더 큰 위안이 된다. 적어도 문학에서 나는 무언가 의미 있는 사명을 전달하겠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 문학의 단어들은 그저 하나의 그물망을 만들고 이 망은 떨림의 쓰레기들을 잡아낸다.

쓰레기-단어들은 마치 유성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유성들은 일단 떨어지면 더 이상 별자리에 속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파편들, 단편들, 조각들일 뿐이다. 한 그물망 안에 있는 조각들 사이에는 부조화가 지배한다. 사실 나는 이전에 별자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이 망 안에서 스스로 새로운 선을 긋고 새로운 별자리를 그려 넣는다.(p.181) - 「귀신들의 소리」 중에서


이 책 『영혼 없는 작가』에 배음(倍音)처럼 깔려 있는 이런 식의 섞임과 깨짐, 비판과 거리 두기의 사유는 일차적으로는 낯선 언어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무엇보다 몸이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공간상으로 보면 이 책은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시작해 독일, 일본, 미국을 거쳐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서 끝을 맺는데, 이 여정 또한 내용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힌다. 『영혼 없는 작가』와 더불어 몸의 여행, 장소의 여행, 언어의 여행을 함께하는 독자들은 나라와 도시, 현실과 환상, 언어와 사물을 이동하며 경계의 흩뜨림이 열어주는 환상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저자 : 다와다 요코 (Yoko Tawada, たわだ ようこ, 多和田 葉子)


독일 베를린에 살면서 독일어와 일본어로 소설, 시, 희곡, 산문을 쓰는 작가다. 196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82년 와세다 대학 제1문학부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로 이주했다. 1990년 독일 함부르크 대학 대학원에서 독문학 석사 학위를, 2000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홀로 독일로 건너갔던 열아홉 살의 경험은 삶의 지축을 뒤흔들었다. 기나긴 기차 여행 동안 물을 갈아 마시며 서서히 낯선 세계에 가까워진 그녀는 독일에 도착하여 전혀 알지 못했던 언어를 새로 익히면서 그때까지 알았던 세상과 사물을 송두리째 다시 보는 전율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언어’ 자체에 천착하도록 했고, 언어가 지닌 ‘매체’로서의 불안한 혹은 불편한 속성은 다와다 문학의 일관된 주제가 되었다.

다와다에 따르면 언어는 자아와 세계를 매개하는데,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하다가 새로운 언어를 새로운 매개로서 사용할 때 비로소 우리가 이 언어(매개)를 통해 생각하고 발화해 왔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머릿속에서 아무런 성찰의 과정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은 세계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므로, 그녀는 이에 안주하려는 인식의 자동화에 제동을 걸고 세상의 잊히고 버려진 또 다른 측면을 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보고자 부단한 문학적 시도를 아끼지 않는다.

1987년 시집 『네가 있는 곳에만 아무것도 없다』로 데뷔했는데, 일본어로 쓰인 시가 번역되어 책에 일본어와 독일어가 나란히 실렸다. 이듬해 독일어로 처음 쓴 단편소설 『유럽이 시작하는 곳』이 출간되었고, 1991년에는 일본어로 쓴 단편 「발뒤꿈치를 잃고서」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받았다. 다와다 요코는 독일에서 샤미소상, 괴테 메달, 클라이스트상 등을, 일본에서 아쿠타가와상, 이즈미 교카상,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요미우리 문학상 등을 받는 한편 독일 문학을 공부해 1990년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2000년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작가가 30여 년간 쓴 작품은 약 30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1천 회 이상 낭독회가 열렸다.

작품으로 『눈 속의 에튀드』, 『여행하는 말들』, 『헌등사』, 『용의자의 야간열차』, 『영혼 없는 작가』, 『목욕탕』, 『경계에서 춤추다』 등이 있다. 그 밖에 중편집 『세 사람의 관계』, 『개 신랑 들이기』, 단편집 『고트하르트 철도』, 『데이지꽃 차의 경우』, 『구형 시간』, 장편소설 『벌거벗은 눈의 여행』, 『보르도의 친척』, 『수녀와 큐피드의 활』, 『뜬구름 잡는 이야기』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3부작 중 『지구에 아로새겨진』과 『별빛이 아련하게 비치는』, 시집 『아직 미래』 등이 출간되었다.


역자 : 최윤영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와다 요코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으며, 관련 연구서인 『엑소포니, 다와다 요코의 글쓰기』를 펴냈다. 지은 책으로 『한국문화를 쓴다』 『서양문화를 쓴다』 『카프카, 유대인, 몸』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영혼 없는 작가』 이외에 『목욕탕』 『눈 속의 에튀드』 『어느 아이 이야기』 『이상한 물질』 『문화와 문화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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