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소담 클래식 5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안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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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856년 출간된 이 책 『독일인의 사랑』은 동양학, 비교언어학의 세계적 학자인 막스 뮐러가 전 생애 동안 남긴 유일한 소설 작품이다. 평생 성실한 학자였던 뮐러는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가』, 『신비주의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 등의 저서를 남겼다. 아버지 빌헬름 뮐러가 예술적 기질이었다면 막스 뮐러 자신은 연구하는 학자 기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 빌헬름 뮐러는 유명한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네」의 노랫말을 쓴 독일의 낭만적 서정시인이다. 『독일인의 사랑』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나, 소담출판사의 이번 번역본은 저자 막스 뮐러의 탁월한 언어 사용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막스 뮐러가 언어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언어의 사용과 문학적 감수성의 어우러짐에 초점을 맞춘, 출판사의 재출간으로 독자에게는 이해된다. 

『독일인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의 대표격인 작품이다. 뚜렷한 기교나 독창적인 서술 방식 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언어학에 뛰어난 재능과 세련된 감성을 가진 그의 어휘 구사 능력이 독자들에게 어필된 점이 평론가들에 의해 호평을 받았을 것으로 풀이된다. 이 소설이 크게 주목받은 것은 우리나라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 같은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으로 독자는 이해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독일인의 사랑』은 비교언어 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동양학자인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가 남긴 단 한 편의 소설 작품이다. 100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에 어떤 내용을 담았기에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것인지 궁금하다. "풍부한 감수성과 시적인 문체로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는가 하면 독일 신학과 철학, 동양학으로 이성을 일깨우기 때문"인 듯하다. 단순한 스토리에 담긴 짧은 내용이 때로는 로맨틱하게, 때로는 심오하게 ‘사랑’을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독자의 가슴을 두드린다.


『독일인의 사랑』이란 표제어가 독자에게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면도 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말하는 그들(유럽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독일인'을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순수한 사랑'이 주제인데···. 그러나 소설가 이근미가 이 작품에 대한 평(評) 가운데 "1850년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강의 교수로 초빙돼 문학사와 비교독문학을 강의하게 됐다. 3년 뒤인 30세 때 당시 열아홉 살이던 영국 소녀 애들레이드를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대단한 귀족 딸인 애들레이드와의 만남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결국 나이, 신분, 국적, 종교의 벽을 넘어 결혼했다."는 점에서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서전적 사랑의 결실을 보여주는 것이리란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 『독일인의 사랑』에서 평범한 ‘나’가 좋아하는 마리아도 영주의 딸이라는 높은 신분에 속한다. 소설 속의 ‘나’(주인공)는 갈등을 느끼고 주변의 반대로 인한 아픔을 겪는다. 막스 뮐러는 애들레이드를 사랑하면서 ‘사랑의 조건’에는 무엇이 있으며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상념의 결실을 『독일인의 사랑』에 고스란히 담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작자 미상'으로 출간했고,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고 알려져 추측이 사실로 더욱 확고해진다. 이 작품 『독일인의 사랑』은 1877년 아내 애들레이드에 의해 영어로 번역 출간됐다고 한다.

역자 안영란은 소설이 "시와 같이 아름답고 순수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두 남녀의 사랑을 더욱 애달프고 아름답게 이끌어낸다."며 전제한 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각자의 사랑을 품고 있으며, 이들의 사랑은 이윽고 개인적인 사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되어 인류애로까지 확장된다."고 밝힌다. 또 세련되고 아름다운 언어로 이야기하다 다시금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막스 뮐러의 세련된 문장은 독자에게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고 설명한다.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더없이 신실하고 순수한 마리아와, 그런 그녀의 마음뿐 아니라 전체를 갈구하게 되며 그녀를 향한 사랑을 평생 간직하는 주인공의 사랑은 독자들의 감성을 일깨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순수한 두 영혼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깨끗한 물로 가슴을 적시듯 맑아진 듯한 기분을 준다. 순수하고 깨끗한, 감성적인 언어가 독자를 단순히 이야기가 아닌 명상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은 속세를 초월한 탁월하고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다. 

소설은 여덟 개의 회상으로 구성돼 있다. 유년 시절 얘기를 담은 세 번째 회상까지는 동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6세경 '나'는 마을 영주인 후작의 집에 초대받는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교회보다 더 크고 첨탑도 여럿인 거대한 저택’에 방문해 후작부인을 만난다. 어머니께 하듯 아름다운 후작부인에게 목을 안고 볼에 입을 맞춘 나는 집에 와서 아버지께 ‘그분은 '남'이고 신분이 높은 분이니 조심해야 한다’며 야단맞는다. 그 이후에도 성에 갔는데 후작의 딸인 마리아가 있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도 잘 모르지만 그녀는 외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몸이 매우 안 좋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리아는 심장병으로 항상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했다. 

마리아는 견진성사를 받을 때 다섯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마지막 하나는 자신이 끼고 있었다. 나에겐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리아는 그 반지를 주면서 말했다. '원래는 내가 가지고 있으려고 했는데 너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 살아있는 동안 나를 기억해주렴' 대충 이런 의미의 말을 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너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라는 말과 함께 반지를 돌려준다.


주인공인 '나'는 나중에 대학생 성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다. 오랫동안 성에는 가지 않지만 늘 마리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친구로서 한번 만나자고 주인공에게 편지를 보낸다. 마리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던 주인공은 마리아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기독교의 사랑에 대해 대화와 토론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둘은 매일 같이 만난다. 

하지만 마리아를 돌보던 의사가 마리아의 건강을 위해서 나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하고 나는 갑작스런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해도 마리아를 잊지 못한 나는 마리아가 요양하고 있다는 시골 성에 찾아가 마리아를 만난다. 자신이 마리아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결국 마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마리아는 두 사람 간에 놓인 장벽이 많다며 거절한다. 먼저 마리아가 높은 계급이라서 주인공이 감히 사랑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또 마리아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사랑 사이에는 장벽이 없다고 설득하고 서로 키스를 하며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안타깝게 마리아는 그 다음날 죽고 만다.

마지막에 마리아를 돌보던 의사의 비밀도 밝혀진다. 마리아는 의사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후작이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지고 의사는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포기한다. 결국 그녀는 후작의 아내가 되었고 딸 마리아가 태어나는데 안타깝게도 마리아를 낳으며 그녀는 죽고 만다. 마리아의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던 의사는 마리아를 살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마리아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그 덕에 마리아는 예상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하는데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되는 그 ‘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데서 나의 성장이 시작된다. 마리아를 보면서 ‘저 소녀도 역시 남일까?’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이 운명적인 말로 두 사람의 마음은 연결되고, 성인이 돼 재회한다. 마리아가 ‘친애하는 친구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내 성으로 초대한 것이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의 마음과 그간 쌓은 지성을 폭넓은 대화로 풀어낸다.


마리아는 숨김없이 자기 생각과 느낌을 얘기하건만 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열어 보이지 못한다. 끊임없이 속마음을 숨기라고 요구하는 사회에 익숙해진 스스로가 못마땅한 나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여러 편의 ‘시’를 마리아에게 들려준다. 나와 마리아가 인용하는 시를 읽기만 해도 독서의 보람을 느낄 것이다. 병약한 마리아와의 재회는 나에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지만 둘은 아버지의 반대로 이별한다. 결국 나는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뒤 반지와 ‘네 것은 모두 내 것이야. 너의 마리아로부터’라는 편지를 받는다. 짧지만 진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 단순하지만 심오한 상념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 책이 ‘조건이 우선 되는 만남,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세태’에 깊은 경종이 되길 바란다.

고결하고 깨끗한 사랑에 대한 찬미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진정한 사랑이란, 어린 아이의 마음 속에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인간 세상의 질서를 초월하며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미치는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에 드러나는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자연의 질서에 귀의하고 세계와 합일을 이룰 수 있으며 존재의 충만함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정화된 내 마음에 열리는 사랑이야 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이며, 스스로의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사랑을 알 수 있고 모든 이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 막스 뮐러의 종교적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진실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선한 영혼을 가진 여인과의 더 없이 맑고 순순한 사랑의 감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긴 대화와 긴 독백 같은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다면 인내심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정결하고 진심이 우러나는 담담한 이야기는 어떤 독자의 마음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맑고도 맑은 마음의 울림이 투명한 여운을 오래도록 남겨줄 것이다.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나요?"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고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들판에 핀 꽃들에게 왜 피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반으로 대답이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지금 여기 놓은 책,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이 책이 나를 대신애서 말해 줄 것입니다."(p.161)


저자 :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동양학, 비교언어학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막스 뮐러는 유명한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 나그네'의 노랫말을 쓴 독일의 낭만적 서정시인 빌헬름 뮐러의 아들이기도 하다. 베를린 대학에서 F.보프.F.셸링, 파리에서 E.뷔르노프 등을 사사한 그는 1950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인도-게르만어의 비교언어학, 비교종교학 및 비교신화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막스 뮐러는 전 생애 동안 오직 한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그 작품이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기적 격정은 이미 사랑이 아님을 나직이 역설하는 이 철학적 사랑이야기 외에도 막스 뮐러는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가』, 『신비주의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 등의 저서를 남겼다.


역자 : 안영란


전문 번역가, 이화여대 독문학과와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뮌스터 대학 독문과를 수료하고 92, 93년 독일 마이츠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주요 역서러는 『한밤의 모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마법사 모야와 보낸 이틀』 『아직 한번도 이야기되지 않은 동화』 『밤』 『수학악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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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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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애틀랜타, 아바나��� 명작의 배경 도시에서 다시 써내려간 작가의 이야기. “실재하는 책 속 세계를 만난다는 건 문학이 말하는 인간의 위대함, 선의, 낭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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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나와 그녀들의 도시』는 외국의 책(소설)에서 만났던 여주인공의 발자취를 찾아 다니는 한 작가의 에세이집이다. 저자 곽아람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 속의 여주인공이 살던 곳으로 찾아가 소설 속 장면을 그리고 직접 봄으로써 당시 상상했던 기억 속의 장소와 주인공들을 현재 시점으로 불러내 업데이트하는 셈이다. "유년 시절 머리맡을 지켜주던 책 속 친구들이 있었다. 나와 다른 머리색을 한 그들은 부푼 소매의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향하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끊임없이 재잘대거나, 요정과 함께 네버랜드로 모험을 떠나 해적과 한판 승부를 펼쳤다. 때로는 전쟁과 굶주림을 이겨내고 삶을 쟁취했으며, 살인 사건 현장에서 냉철한 판단력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했다. ‘책 속 친구들이 사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들이 있는 그곳에 가볼 수 있다면!"

    이 책은 소설과 현실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독서 여행자 곽아람이 안식년으로 주어진 1년간 심상으로만 존재하던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을 썼던 작가의 내면 세계도 들여다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다. 열세 편의 소설이 태어난 곳을 직접 여행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뉴욕을 근거지로 하면서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시작으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속 도시들을 찾아가는 미국 남부 여행, 『작은 아씨들』이 쓰인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톰 소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미시시피강을 탐험했다. 또 ‘디즈니 그림 명작’의 추억을 떠올리며 올랜도 디즈니월드를 누비고, 애거사 크리스티의 『카리브해의 미스터리』를 환기하며 서인도제도의 세인트마틴을 찾기까지.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땅을 직접 밟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2D로 그려왔던 그 세계가 3D로 실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내게 소중했다. 책 속 세계가 실재한다는 건 문학이 단지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 문학이 말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선의, 그리고 낭만이 실재한다는 것과 동의어여서 그간 내가 책에서 받은 위안이 한 꺼풀짜리 당의정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p.9)



    이 책은 「여행을 시작하며」란 제목의 〈프롤로그〉와 「끝나지 않은 문학 여행, 『빙점』」이란 제목의 〈에필로그〉를 제외한 3부 13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부 〈문자로 지은 집〉, 2부 〈바람과 함께, 스칼렛〉, 3부 〈태양 가득히〉와 13장 「그곳,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_『빨강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태고의 자연, 아카디아 국립공원_『에반젤린』.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마녀 도시, 세일럼_『영 굿맨 브라운』 『주홍 글씨』, 너새니얼 호손」「네 자매 이야기, 콩코드_『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컷」「개츠비의 고장, 뉴헤이븐, 샌즈포인트, 그레이트넥, 킹스포인트_『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고단한 예술가들의 도시, 뉴욕_『마지막 잎새』, 오 헨리」「강인한 여성을 키운 남쪽 땅, 애틀랜타, 찰스턴, 존즈버러_『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우아한 어머니의 고향, 서배너_『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꿈과 희망의 세계, 디즈니월드_‘디즈니 그림 명작’, 월트 디즈니」「에밀리에게 장미를, 뉴올리언스에 승리를_『에밀리를 위한 장미』, 윌리엄 포크너」「대문호의 노스탤지어, 해니벌_『톰 소여의 모험』, 마크 트웨인」「헤밍웨이의 영감, 쿠바 아바나, 키웨스트_『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먼 북소리, 세인트마틴_『카리브해의 미스터리』, 애거사 크리스티」 등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명작은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빙점』까지 열네 편인 셈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저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들까지 합친다면 수십 편의 책이 이 한 권에 들어 있는 셈이다. 저자의 독서량을 보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파리 센 강변의 영문 서적 전문 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Shakespeare & Company)〉 앞에 붙은 칠판의 글귀를 읽다가 울었다고 고백한다. 사라질 뻔한 이 서점을 인수해 키워내 딸에게 물려준 조지 휘트먼의 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라탱 지구의 돈키호테라 부른다···.” 저자는 이웃보다 책 속 인물들을 훨씬 친숙하게 여겼던 휘트먼과 책벌레로 살아온 자신이 무척 닮아 있음을 느낀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이웃보다 책 속 인물들을 더 친구처럼 느끼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고 주인공 나스타시야를 현실에서 찾아 헤맸다는 휘트먼에게서 나는 책벌레로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p.10)



    성인이 되어서도 한쪽 발은 여전히 이야기의 세상에 걸치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작품의 배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수없이 여행했다고 밝힌다. 이번이 문학 속에서 보여준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을 여러 번 찾았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책 속 주인공들이 어딘가에 실제로 살고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마음, 그 믿음을 품고, 이번에도 독서 여행자가 되어 미국과 캐나다, 쿠바 등 문학의 무대, 작가의 생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가 걸은 길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문학이 만든 ‘실재하는 풍경’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책과 함께 떠난 "그 시절 그녀들"의 도시 말이다. 저자는 뉴욕, 콩코드, 보스턴 등 어린 시절 마음속에 그려온 장면들이 살아 움직이는 도시를 찾아가 문학의 향취를 느끼며 작품과 깊이 공명한다.

    첫 장(章)는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이 된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시작으로,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서사시 「에반젤린」의 태곳적 자연이 떠오르는 아카디아 국립공원(2장), 너새니얼 호손의 어두운 상상력이 깃든 세일럼(3장), 루이자 메이 올컷이 네 자매의 우정을 길어 올린 콩코드(4장),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화려함과 허망함이 교차하는 뉴욕 근교의 부촌들까지(5장), 한 시대와 한 작가를 규정한 장소들을 직접 찾아가며 작품 속 문장이 어떻게 현실의 풍경과 겹치는지를 탐험한다. 또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탄생한 애틀랜타와 서배너(7~8장), 헤밍웨이가 생애와 작품을 쌓아 올린 쿠바와 키웨스트(12장), 그리고 마크 트웨인(11장)과 오 헨리(6장)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문학의 요람까지. 저자는 아메리카 문학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길 위에서 되살려낸다.



    이 책은 2018년에 출간한 『바람과 함께, 스칼렛』의 원고를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쓰다시피 개정증보했다. 이렇게 이 책 『나와 그녀들의 도시』는 이전의 여정에 새로운 이야기와 한층 깊어진 시선을 더해 다듬어 펴낸 것이다. 책에는 월트 디즈니의 세계와 미스 마플의 미스터리한 현장,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빙점』 속 눈 내리는 설원을 여행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책에는 여행의 시점에 어울리는 문장을 작품의 원문과 함께 저자가 직접 번역해 실었다. 원문을 음미하는 것 또한 문학작품을 읽어가는 또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 저자의 의도가 담겼기 때문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단지 ‘책 속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기가 아니다.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해온 문학작품들이 현실의 장소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또 그곳이 작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과 삶을 잇는 하나의 ‘지도’다. 또한 이 책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책 속 인물들과 이별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 숨 쉬는 문학과 마주할 수 있는 장소로 이끄는 ‘초대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빨강 머리 앤』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회고한다. "1953년 봄 휴전 직전 서울. 틈만 나면 인사동 헌책방에 들러 지적 허기를 채우던 스물네 살 이화여고 국어 교사 신지식(申智植, 1930~2020)을 손바닥만한 문고판 일본어 책이 사로잡았다. 『빨강 머리 앤』, 『초록 지붕 집의 앤』을 일본어로 옮긴 책이었다. 홀린 듯 읽던 신지식은 호주머니를 털어 그 책을 샀다. 그는 1960년대 초 이화여고 주보 〈거울〉에 이 책을 번역해 연재했고, 1963년 정식 출간했다. 『빨강 머리 앤』은 그렇게 처음 한국에 소개되어 '소녀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p.20)

    저자가 신 교사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이화여고 주보에 소개한 이유에 대해 "저는 책을 번역하면서 완전히 앤이 되었다 나왔어요. 앤을 통해, 그 상상력을 통해 저는 전쟁의 우울함을 극복하고 소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저자의 머릿속에는 직접 책 속에 나오는 배경지를 찾아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이번 여행에서 들렀던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저자가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저자가 독서 여행을 가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책을 읽은 후부터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야기 속 장소가 실재한다 믿는 사람, 이야기란 허구니 배경 또한 허구라 생각하는 사람. 나는 전자(前者)였고, 이야기 속 트로이가 실재한다 믿었던 슐리만처럼 언제나 소설 속 장소들을 갈망했으며 그중 어떤 곳에는 반드시 가보리라 결심하곤 했다."

    저자에 따르면 작가 몽고메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빨강 머리 앤』은 서른네 살 때인 1908년에 쓴 책이다. 그는 캐번디시의 외가에서 이 작품을 썼는데, 현재 집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사과나무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저자는 사진과 함께 책에 실었다. 사과나무 주위에서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몽고메리가 걸었던 오솔길을 산책하고 다시 차를 달려 몽고메리의 생가를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 『빨강 머리 앤』을 사랑하는 일본인이 열었다는 식당 〈블루 윈즈 티룸(Blue Winds Tea Room)〉이 근처에 있다기에 찾았다. 저자는 앤이 다이애나를 초대해 취하게 만드는 에피소드에 나오는 바로 그 라즈베리 코디얼(과일청을 물에 타 만든 음료)을 곁들여 비프 커리를 먹었다.

    읽을 때는 차례대로 읽었지만 '서평'은 그대로 따를 수 없기에 독자가 청소년기에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쿠바의 아바나로 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즐겨 묵었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이다. 옥상 야외 바에서 다이키리를 마시며 이 글을 썼다. 이날 석 잔째의 술, 점심 먹은 식당에서 반주로 모히토 한 잔,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바 '엘 플로리디타'에서 오후에 딸기 다이키리 한 잔,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 잔, 럼과 보드카를 좋아하는 내게 쿠바는 술 궁합이 최고인 나라다. 낮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50여 분 걸려서 산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헤밍웨이 박물관, '핀카 비히아에' 다녀왔다. '전망 좋은 농장'이라는 뜻의 이곳은 헤밍웨이가 20여 년간 살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를 집필한 곳, 그러니까 헤밍웨이의 집이었다. 택시를 타면 편도 20쿡(약 2만 5,000원) 정도 내야 한다는데 가이드북의 충고대로 0.5모네다(약 25원)짜리 버스를 탔다. 관광용 버스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버스여서인지 동양인은 나밖에 없어서 당연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행기보다 더 세밀하게 적어놓아서 처음 가보는 독자들은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또 현지에 가보니 달라진 풍경, 변함 없는 곳, 그리고 현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냄새까지 모두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저자의 문학여행은 매우 귀중한 소설 읽기의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최소한 여기에 등장하는 수십 권의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뒤늦은 독서열도 자극된다. 작품 해설은 물론, 저자가 느낀 독후감 형식의 깨알 지식, 현재 주민들의 삶의 모습 등 과거와 현재가 함께 있는 문학 배경지의 모습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호기심까지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독자 개인적으로는 〈에필로그〉에 나오는 홋가이도 아사히카와를 찾아 여행한 저자의 기록이 유독 눈길을 붙잡았다. 물론 독자가 읽어본 소설이기도 하고, 저자가 아는 지식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지적 호기심도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빙점』은 광복 이후 가장 많이 팔린 일본 소설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드라마·영화 등으로 제작되었는데, 줄거리는 다소 자극적이다. 저자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이라지만 독자로서는 성인이 되어서 읽어서인지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설원의 홋가이도는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이 일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노벨 문학상 수상작)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숲이 보였다. 화창했던 전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흐리고 눈 내리는 날,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의 어둠, 그리고 눈밭에 휩싸인 숲은 신사의 입구처럼 신령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문학관은 이미 문을 닫았다. 다시 스트로부스소나무숲을 지나 제방까지 걸어갔다. 전날 아이가 타고 놀던 분홍색 눈썰매가 나무 아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곧 캄캄해질 것 같아 이번에는 제방에 오르지 않고 그냥 돌아나오기로 했다.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나오는데 저멀리 숲 어귀에서 문학관의 불빛이 환하게 반짝였다."(p.353) 


    저자 : 곽아람


    문학을 사랑하는 독서 여행자. 주중에는 기사를, 주말에는 책을 쓴다. 책 속 세계에 매료되고, 그림 속 풍경에 고요히 나를 맡길 때 평온하다. 2003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현재 『조선일보』 문화부 출판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미술경영협동과정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뉴욕대학교 IFA(The Institute of Fine Arts) 방문 연구원으로 있었다. 뉴욕에 있는 동안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뉴욕의 아트 비즈니스 서티피컷 과정을 마쳤다. 지은 책으로 『나의 뉴욕 수업』 『구내식당: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 『쓰는 직업』 『공부의 위로』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미술 출장』 『어릴 적 그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림이 그녀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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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점령한 중독 경제학 - 인류를 위기에 빠트린 중독의 쾌락
    쑤친 지음, 김가경 옮김 / 이든서재 / 202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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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은 '마약 청정국'이었다. 간혹 마약류를 이용하다가 검거돼 뉴스의 인물로 떠오른 적은 있지만 일부 일탈의 행위로 보았을 뿐 사회적 문제로까지 부상되지는 않았다. 대검찰청에서 발표한 〈마약류 범죄 백서〉에 따르면 2023년 마약 사범이 2만 7,611명으로, 우리나라도 역대 최초로 마약 사범이 2만 명을 넘어섰다. 영화로나 접했던 '마약'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현실로 다가온 국가적 난제로 떠오른 셈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마약이 들어온 것은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무렵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전에는 소량이 약재로만 사용되었을 뿐 우리 국민들은 마약의 마수에 빠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이나 서양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마수를 뻗치면서 서서히 마약이 우리 사회에 침투해 들어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것도 아니라 아마 문호 개방 이전까지는 얼씬도 하지 못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이 열리면서 청으로부터 마약이 함께 유입되었던 것 같다. 

    일년 전쯤 미국의 마약 문제를 다룬 시사 프로그램을 TV로 통해 시청하다가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기억에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였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이 영화에나 나올 법한 걸음걸이(걸음이라기보다 곧 넘어질 듯 위태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약 중독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한때 영화에서 붐을 탔던 '좀비'의 걸음걸이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마약 중독자들은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아 영상으로만 보여지는 환각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았지, 약 기운이 떨어진 환자들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으며, 마약의 무서운 폐해 실상을 줘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국민들이 보았는지 어느새 '필라델피아 좀비'란 별칭까지 퍼져 있었다.

    이 책 『세계를 점령한 중독 경제학』은 마약이나 알코올 등 개인의 건강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 중독의 역사와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짚어보는 인문학 서적이다. 마약이나 알코올은 중독의 상태가 급속히 진전되기 때문에 위험성을 금세 알 수 있지만, 음식과 음료의 중독도 결코 적지 않은 사회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쓰였다.



    중독은 예전부터 있었던 질병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사실 고도로 발전한 의학계에서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뇌의 질병이다. 원인은 중독의 유형에 따라 다르지만 모두 뇌 신경의 장애로 판단하고 있다. 담배나 술, 마약 등 독성물질의 장기 사용으로 중독에 이르는 병의 대명사격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특히 디지털 시대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쳐 이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실체들이 하나둘씩 우리 주변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태다. 현대 사회는 신자유주의 풍조의 부상으로 정신적 혼란도 가져오고 있다. 극심한 빈부 격차와 지구상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전쟁, 코로나 팬데믹 등으로 불안과 공포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더욱이 어수선한 국제 정세와 가파른 인플레이션으로 경제난을 겪으며 위기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내면화된 불안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주로 특정 행동을 개인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양상으로 발현된다. 예컨대 스마트폰에 과하게 의존하며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종일 살펴보거나, 평균 체중임에도 강박적으로 식단을 조절하며 일 년 내내 다이어트를 하는 시달리는 식이다. 저자 전형진은 이 책을 통해 정신건강 전문의의 관점에서 현대인을 괴롭히는 중독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점을 모색한다. 이 책은 자신이 현재 중독 상태가 아니더라도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 중독의 사전 예방에 효과를 내기를 위해서는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중독’은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고 의학계는 판단하고 있다. 의학계에 따르면 중독이라고 하면 흔히 마약류의 약물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 증상을 떠올릴 수 있지만, 개인의 통제력을 벗어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특정 행동도 엄연한 중독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중독의 스펙트럼은 방대하다. 쇼핑, 게임, 운동, 면과 육류, 포르노, 일과 공부 등 그 종류가 다양하고, 성별과 연령의 성역 없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장시간 이어진 팬데믹의 영향으로, 사회적 소통 없이 고립된 시간을 보내며 사회 전반에 중독 문제가 심화된 것도 사실이다.



    중독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고 의학계는 경고한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게도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정신적 질병이라는 것. 시간에 쫓기고, 생존을 건 경쟁에 수시로 노출되며, 이루어야 할 성과와 목표가 늘어감에 따라 과도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중독 문제에 취약하다고 한다.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특정 행동들이 어쩌면 개인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중독이라면 당연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질병이기 때문에 치료에도 의료보험 적용이 되고, 국가도 중독에 이르기 전에 예방하고 중독자의 경우 치료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는 중독이 인간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쾌락'의 병이라는 점이다.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말과도 비슷하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본능적이라면 중독 물질의 순기능적 면을 국가가 막아설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펴낸 이든서재 '소개글'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에서 음식은 단순한 생존 수단을 넘어 문명과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이 책 『세계를 점령한 중독 경제학』은 설탕, 차, 커피, 고추, 주류 등 인류를 유혹한 먹거리가 어떻게 세계사를 뒤흔들었는지를 경제학의 시각에서 풀어낸다. 단테의 『신곡』 〈연옥〉 편에는 단테가 인간의 쾌락 중 가장 일상적인 욕망, 바로 ‘식탐’에 대해 성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식탐은 단순히 과식에 대한 욕구가 아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정신이 육체의 탐욕에 무릎을 꿇고 노예가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음식을 갈망하다 못해 정신적 탐욕에 잠식되고 만다. 대상에 대한 갈구가 과해 욕망에 먹히는 상태. 이것은 식탐을 넘어 ‘중독’을 부른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중독의 일상을 살고 있다. 잠에서 깨자마자 찾는 한 잔의 커피, 허기진 위장을 유혹하는 한 스푼의 설탕, 거친 노동 끝에 손을 뻗는 한 잔의 맥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음미하는 한 잔의 위스키. 이 모든 것이 중독을 일으킨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단테의 〈연옥〉에서는 ‘보지만, 먹지 못하는 벌’이 행해진다. 저자에 따르면 영혼들은 달콤한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 아래에 서 있다. 하지만 나뭇가지가 너무 높아 손이 닿지 않는다. 이들은 ‘보지만 먹지 못하는 벌’을 받는 중이다. 이 형벌의 목적은 ‘절제’를 배우고, 욕망의 주도권을 찾기 위함이다. 이는 언뜻 우리가 과하게 탐닉하고 있는 ‘먹방 콘텐츠’와 닮았다. 음식에 중독됐지만 먹을 수 없는 현실 탓에 대리 만족으로 ‘먹방 콘텐츠’를 소비한다. 허기진 속을 달래기 위해, 가짜 식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식사 과정을 염탐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허망한 행동에 열광하는 것일까?

    우리는 허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 허기가 몸의 것인지, 마음의 것인지에 따라 중독의 여부가 갈린다. 이미 육체적 허기를 넘어 정신적 허기의 상태가 되었다면 이미 상당한 중독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과연 우리는 이 허기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 것일까? 책을 덮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작은 초콜릿은 ‘예의 달콤함’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중독이 인간의 집착을 불러 문명을 일으키고, 제국을 무너뜨리며, 수백만 명의 운명을 바꾼 이야기를 이 책은 다루고 있다. 그 중독의 주인공들은 우리가 현재 식탁에서 흔히 접하는 설탕·차·커피·고추·주류 등 단순한 먹거리들이 어떻게 세계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었는지, 경제학적 분석과 역사적 사례를 통해 조망한다. 대항해 시대 이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흑인 노예무역, 차 무역과 아편전쟁, 커피와 산업구조의 변화, 고추의 국제적 확산과 인류 미각의 진화 등 음식이 주도한 정치·경제적 사건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결국, 역사의 대서사를 만들고 세계 경제를 뒤흔든 사건들은 ‘음식’이라는 공통분모로 연결된다.



    저자 쑤친은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는 ‘동파육’이라는 음식의 유래가 된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미식가 소동파의 후손이며, 금융과 비즈니스 세계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실전 투자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끼의 위대함’을 아는 진정한 미식가다. 그는 우리가 허우적대고 있는 ‘중독의 바다’를 강렬한 문장을 인용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18세기 경제에서 사탕수수의 지위는 19세기의 철강, 20세기의 석유와 같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달콤한 유혹〉, 2장 〈향긋한 차茶로 인해 발발한 전쟁〉, 3장 〈중독 경제학〉, 4장 〈돌고 도는 돈〉, 5장 〈‘고통의 쾌락’ 비즈니스〉, 6장 〈먹보 인류의 미래〉 등이다. 1장은 십자군 전쟁이 유럽에 가져온 ‘사탕수수’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탕수수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다.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은 유럽 귀족의 미각을 사로잡았고, 폭발적인 수요는 카리브해와 남미를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뒤덮게 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피와 눈물이 스며 있다.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를 잇는 ‘검은 삼각무역’은 전 세계 무역의 판도를 바꾸고 산업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2장과 3장에서는 현시대에서도 강력한 중독성으로 음료 시장의 선두 자리에 있는 커피와 차의 이야기를 전한다. 중국의 찻잎은 명·청 시대에 외교와 무역의 핵심 카드였으나 유럽 열강의 찻잎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아편전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한편, 에티오피아 염소 떼가 발견한 커피는 예배당에서 졸음을 쫓는 음료로 시작해, 런던에 세계 최대 원두 시장을 만들고, 오늘날 ‘루왁 커피’ 같은 희소 상품으로까지 발전했다. 4장에서는 맥주가 일으킨 농업혁명과 럼주가 촉발한 독립전쟁, 미국을 분열시킨 최악의 정책인 ‘금주법’의 뒷이야기를 전한다.



    5장에서는 ‘매운맛’의 경제학이 핵심이다. 고추의 매운맛은 ‘고통의 쾌락’을 자극하며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행동경제학 관점에서 인간이 매운맛에 끌리는 심리를 분석하며, 매운맛이 산업과 마케팅의 무기가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책의 후반부는 미래로 향한다. 6장에서 저자는 「비료와 독가스를 발명한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 「전쟁에서 태어난 깡통 혁명」 「미식가의 욕망으로 탄생한 냉장 유통 기술」 「음식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깨다」 「자연 섭리에 대한 인간의 불복종」 「음식의 복수, 식탐이 인류에게 가져온 건강 재앙」 등을 다루고 「미래의 먹거리를 예측하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를 통해 2200년, 세계 인구 200억 명 시대를 가정하며 「합성육의 대중화」 「3D 프린팅 식품」 「AI 맞춤형 식단」 「유전자 조작 맞춤 식품」 「농약 잔류 문제의 완전 해결」 등 다양한 예측을 제시한다.


    저자 : 쑤친


    깊이 있는 미식가이자 경제학 탐구자. 베이징대학교에서 금융학을 전공하고, 15년간 금융 투자 분야에서 활약하며 자산관리 규모 최대 1조 위안을 달성했다. 그의 투자 분야는 디지털 뉴미디어 산업, 물류, 인공지능, 농업 등을 포함한다. 현재 퀀텀이코노미 금융경제연구원 원장으로, 7,500만 명이 참여한 금융·경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2010년에는 맥킨 글로벌 비즈니스 대회 우수상을 수상했다. 경제 지식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이 많다. 그는 역사적 미식가 소동파의 후예로서, 이 책을 통해 음식과 경제의 흥미로운 연결고리를 풀어낸다. 우리가 먹는 것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지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 주요 저서로 『초보 경제학』이 있다.


    역자 : 김가경


    덕성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북경어언문화대학에서 수학했다. 국방대학교 국방사업관리학 석사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대한민국 공군 소령으로 공군 본부에서 복무 중이다.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건축편』, 『사자는 쥐와 겨루지 않는다』,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100가지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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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메라의 땅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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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러던 중 3차 대전이 발발하여 지구는 핵전쟁으로 파괴되고, 우주에 머물던 알리스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1년, 단 세 명이, 폐쇄된 공간에, 3차 세계 대전으로 황폐해진 행성에서 410킬로미터 떨어진 상공에, 소중한 이들이 살아남았는지 알지 못하고 누구와도 연락할 길 없이, 이게 우리 앞에 선 주어진 미래로군."(1권, p.129) 하지만 갖은 우여곡절 끝에, 고농도의 방사능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3종의 키메라 배아를 들고 지구에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인간과 박쥐의 혼종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키메라 「에어리얼」. 인간과 두더지의 혼종으로, 땅을 파고 지하에서 생활할 수 있는 키메라 「디거」. 그리고 인간과 돌고래의 혼종으로, 물속에서 유영하며 살아갈 수 있는 키메라 「노틱」까지. 2권은 이들 퀴퀴파 공동체에 대한 알리스의 서술 평가를 자세하게 기록한다. 

    1. 디거

    ① 학명: 호모 수브라테라리스 ② 평균 신장: 1.6미터. ③ 색: 호흡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어 질식하지 않고 땅속에 오래 머물 수 있다.

    2. 에어리얼

    ① 학명: 호모 블란티스 ② 평균 신장: 1.8미터(사피엔스와 유사) ③ 색: 털 없는(가슴 부위는 제외) 두꺼운 피부, 사실상 흰색인 아주 연한 베이지색으로, 알비노 인간의 피부색과 비슷하다. 

    3. 노틱 

    ① 학명: 호모 나우티쿠스 ② 평균 신장: 2미터 ③ 색: 돌고래와 비슷한, 푸르스름한 회색의 매끄럽고 윤기 나는 피부. 피부는 민감하고 연약하며 특히 햇빛에 약하다.



    이들에 대한 기술은 무려 20페잉지에 걸쳐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외에 ④ 건축 ⑤ 예술 ⑥ 식생활 ⑦ 철학 ⑧ 정치 ⑨ 성적 성숙 ⑩ 번식 의례 등이 약간의 차이부터 크게 다른 부분까지 자세하게 묘사된다. 그의 혼종 인류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멸종하다시피 한 구인류 대신, 황폐해진 지구에서 세력을 굳히며 새로운 대체 인류로서 지위를 공고히 할 키메라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인류가 지구 각지에서 서로를 증오하고 해치는 사건이 끊이지 않는, 아니 폭증하고 있는 요즈음의 세계정세를 보고 있으면, 이 작품 초반에 묘사되는 인류 파멸의 현장은 자못 현실감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더 이상 인간이 살아가기 어려워 보이는 지구 곳곳의 자연 환경, 기후 위기로 인해 눈앞에 닥친 전 지구적 재난과 식량 문제, 빈번한 핵전쟁의 위협 속에서, 베르베르가 상상해 본 종 진화의 이야기는 어쩌면 비교적 근미래에 우리가 고려하게 될 선택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의 역자 김희진은 이 작품에 대해 〈옮긴이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 책에서, 그리고 여러 전작에서 그렸던 미래의 모습이 머지않아 현실로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 독보적인 우월종의 지위를 점하고, 물질적 성장과 기술적 발전에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인류의 영향력을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아포칼립스를 불러오지 않으려면 너무 늦기 전에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인류가 맞이할 위기와 그 해결책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는 이런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결국 스스로 불러온 위기를 해결할 방도는 인간의 손에 있다고.(2권, p.326~327)


    이들은 묘하게도 서로 다른 종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공격 성향이 뚜렷한 데다 반목하다 결국 내전으로 돌입한다. 물론 지금의 지구처럼 지역적인 분쟁 수준이지만 자칫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을 정도로 상황은 나빠진다. 인간과 동물과의 혼종이지만 각 종의 장점은 잘 이어져 인류 못지않게 빠르게 문명을 회복해 간다. 그동안 알리스에게는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이다. 신인류로 분류되는 이들의 지혜는 인간에 못지 않고 신체의 특성은 동물의 장점을 잘 갖고 있다. 유전자의 내림이겠지만 어쩌면 지금은 별로 채택되지 않은 '우생의 법칙'을 따르는 것 같다. 

    "퀴퀴파의 피라미드는 20년 전 알리스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보다 높아졌다. 하늘에서 보니 위합적인 언덕 도시 옆에서 연못은 손거울 같은 작은 물웅덩이로 보인다. 웅장한 검은 두더지 언덕은 이제 에펠탑만큼 높아 보인다. 3백 미터까지 도달했을 수도 있을까? 주위를 둘러싸고 경작된 밭, 도로, 풍력 터빈, 크기가 더 작은 다른 흙 피라미드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알리스가 솔랑주의 도움으로 아주 사뿐히 착륙하자마자, 이 기묘한 한 쌍을 보러 나온 다양한 나이대의 두더지 인간ㅇ들이 주위를 에워싼다. 몇몇 디거는 레이스로 장식된 결겹의 의상을 입고 있다. 다들 내가 지난번 왔을 때보다 더 나은 것 같아···.(2권, p.255) 

    협력과 공존이 아닌 통제와 배제를 선택한 구인류의 행태 앞에서, 신인류 키메라들은 과연 어떤 생존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작품은 키메라라는 상당히 현실적인 모습의 상상적 존재를 통해서,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인간만이 '주인'이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보여 준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래를 사는 이 시대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의 명불허전 탁월한 과학적 상상력과 인류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한데 어우러진 『키메라의 땅』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성찰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가까스로 4차 세계 대전의 위기를 넘긴 3종의 키메라들은 노련한 작가 베르베르처럼 해박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알리스를 통해 멸종을 불러올 전쟁 재발을 막고 더 다양한 종을 위해 끊임없이 혼종 개발(?)에 노력한다. 인간과 도룡뇽의 혼종이 세상에 눈을 뜬다. 마치 형식상, 주변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다는 듯 첫울음을 터뜨리고 약간 울더니, 자기 탄생의 자리에 참석한 이들을 하나씩 바라본다.


    이 새로운 훈종을 탄생시키기까지 3년이 필요했다. 알리스는 하얀 가운 차림이다. 막 60대에 들어선 그는 이제 이런 식의 실험 조작에 경험이 많고, 뱅자맹이 제공한 최신 장비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새 개체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심장이 뛰고 규칙적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새로 태어난 존재를 붉은 벨벳으로 된 요람에 넣는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는 처음 봐. 과학자의 머릿속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이다. 첫 세 혼종 신생아와 달리 이번에는 암컷이다. 몇 가지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사피엔스 여자와 굉장히 닮았고, 알리스는 즉시 그 점들을 관찰 노트에 적는다.

    ① 학명: 호모 아그니스

    ② 출생시 신장: 30센티미터, 예쌍되는 성체 신장: 호모 사피엔스보다 작음 

    ③ 색: 노르스름한 투명 비닐이 여러 겹 포개진 것 같은, 반투명한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노란 피부

    이름을 고민하던 알리스는 뱅자맹의 질문에 '악셀'로 짓는다. '아흘로틀인 악셀···.' 뱅자맹이 되풀이한다. "어감이 좋은데."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히브리어로 악셀은 '평화를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야. 그거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거잖아."(2권, p.230)

    역자 김희진은 독보적인 우월종의 지위를 점하고, 물질적 성장과 기술적 발전에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인류의 영향력을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베르베르의 고민이 『키메라의 땅』 전반에 묻어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아포칼립스를 불러오지 않으려면 너무 늦기 전에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류가 맞이할 위기와 그 해결책을 함께 제시하면서, 베르베르는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스스로 불어온 위기를 해결할 방도는 인간의 손에 있다."고.

    얼핏 비관적인 듯하면서도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베르베르의 시선은 그가 그려낸 주인공 알리스에서도 드러난다. 알리스는 뛰어난 두뇌와 앞날을 내다보는 선구안, 굳은 신념과 의지를 지닌 특출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때로는, 특히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자신이 창조한 신인류가 예상치 못한 행보를 보이자, 과거 자신이 비판했던 구인류의 오만함과 독선 등을 완전히 떨져 내지 못한 모습을 드러낸다. 알리스가 굳건히 고수하는 생명체의 변이에 대한 이론은, 후손에게 물려주는 유전자를 통해 자연 선택이 이뤄진다는 다윈의 진화론과 달리, 살아 있는 존재가 '변화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드러낸다면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저자 :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프랑스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기도 하며,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로 선정된 바 있는 소설가이다. 일곱 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타고난 글쟁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961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났다. 「별들의 전쟁」세대에 속하기도 하는 그는 고등학교 때는 만화와 시나리오에 탐닉하면서 『만화 신문』을 발행하였고, 이후 올더스 헉슬리와 H.G. 웰즈를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1979년 툴루주 제1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국립 언론 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과학 잡지에 개미에 관한 평론을 발표해 오다 드디어 1991년 1백 20번에 가까운 개작을 거친 『개미(Les Fourmis)』를 발표, 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주목받는 프랑스의 천재 작가로 떠올랐다.

    『개미』는 베르베르가 개미를 관찰하기 시작한 열두 살 무렵부터 시작된 소설로 무려 20여 년의 연구와 관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가는 개미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12년 동안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수없이 고쳐썼다. 그는 직접 집안에 개미집을 들여다 놓고 개미를 기르며 그들의 생태를 관찰한 것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마냥개미를 탐구하러 갔다가 개미떼의 공격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베르나르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눈높이, 예를 들면 개미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세상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300만 년 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오만함을 1억만년이 넘는 시간동안 살아남아온 개미들의 눈에 빗대 경고하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열네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거대한 잡동사니의 창고이면서 그의 보물 상자이기도 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은 개미들의 문명에서 영감을 받고 만들어진 것으로, 박물학과 형이상학, 공학과 마술, 수학과 신비 신학, 현대의 서사시와 고대의 의례가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 형식을 선보인다.

    2008년 11월에 출간된 독특한 개성으로 세계를 빚어내는 신들의 이야기 『신』은 집필 기간 9년에 달하는 베르베르 생애 최고의 대작으로, 베르베르가 작품 활동 초기부터 끊임없이 천착해 온 '영혼의 진화'라는 주제가 마침내 그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된 승리자의 역사이며, 진정한 역사의 증인이 있다면 그 답은 단 하나 '신'일 것이란 가정에서 출발한다. 한국에서는 『우리는 신』,『신들의 숨결』,『신들의 신비』를 묶어서 6권으로 출간하고 있다.

    베르베르는 현재 파리에서 살며 왕성한 창작력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2008년 10월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설집 『파라다이스 Paradis sur mesure』와『카산드라의 거울』등의 작품으로 꾸준히 한국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역자 : 김희진


    성균관대학교에서 프랑스어문학과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출판 기획 번역 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한다. 『곰』, 『초속 5000킬로미터』, 『뱀파이어의 매혹』, 『송라인』, 『고양이의 기묘한 역사』, 『바스티앙 비베스 블로그』, 『대면』, 『시간의 밤』, 『우연히, 웨스 앤더슨』, 『7월 14일』, 『쿠사마 야요이』 등을 한국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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