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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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네 안에 숨겨진 힘을 발견하고, 삶을 스스로 창조하라."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한 말이다. 현대 서양철학의 문을 연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란 명저에서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버멘쉬(Übermensch)란 독일어로서, 그가 『차라투스트라~』에서 주장한 '초인(超人)'을 이른다. '초인'이란 한자말은 독일어의 뜻을 그대로 직역한 풀이가 아닌가 싶다. 초인이란 말 그대로 '뛰어넘은 인간','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이란 뜻인데 형용모순의 모습을 보이지만 마땅한 말이 없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한자어이긴 하지만 니체 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 강점기였기에 일본 철학계에서 번역한 용어인지도 모르겠다. 순우리말로는 '한사람' 혹은 '큰 사람'이란 뜻이라면 무난하지 않을까? 영어로는 'overman' 'superman' 등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 니체의 신조어임이 분명해 보인다. 

“신은 죽었다”라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공격이나 논박이 아니라 서구의 지성사를 꿰뚫는 선언인 동시에 유럽 문명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것에 가까웠다는 것이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인 것으로 독자는 이해하고 있다. 『즐거운 학문』(1882)에서 신의 죽음을 설명하는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부처가 죽은 후에도 수세기 동안 그의 그림자를 동굴에서 보여주었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이 지금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신의 그림자가 떠도는 동굴들은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자 역시 정복해야만 한다.” 니체의 이 말은 그가 특정한 종교를 공격하려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책 『위버멘쉬』는 니체가 장한 ‘초인’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풀어냈다고 역자 어나니머스(annonimous, 익명)는 밝힌다. 위버멘쉬란 기존의 도덕과 사회적 관습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책 앞 부분의 〈옮긴이의 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역자는 "위버멘쉬는 외부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모든 고통과 시련을 넘어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초인'"이라고 말한다. 

역자에 따르면 『위버멘쉬』는 니체의 대표작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을 기반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고민과 삶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지를 조명한다. 니체의 날카로운 사상을 현대적 언어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또 이책은 자기 극복, 인간관계, 감정 조절, 삶을 대하는 태도 등 현실적인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며, 독자들에게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책의 가장 앞에 위버멘쉬의 뜻이 자세하게 적혀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위버멘쉬는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을 스스로 뛰어넘고, 주어진 모든 고통과 상황을 의지로 극복하면서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최고의 자신을 꿈꾸는 존재다. 그는 낡은 도덕과 관습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자신만의 법칙을 세워 삼을 주도한다. 어떤 고난에 부딪쳐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면서 모든 한계를 과감히 뚫고 나아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이, 그가 바로 위버멘쉬다." 니체가 주장하는 초인 사상의 골자는 우리가 철저히 자기 힘으로 삶을 개척하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책 『위버멘쉬』는 니체의 정신을 반영해 실천 가능한 조언과 질문을 곳곳에 배치했다. 우리가 매일 맞닥뜨리는 삶의 선택, 관계 속에서의 갈등, 사회적 기준에 대한 의문을 니체의 시선으로 풀어보며, 이를 어떻게 자기 삶에 적용할 것인지 고민할 수 있도록 서술했다고 역자는 밝힌다. 이를 위해 니체가 던지는 메시지를 3부 나누어 관련 질문을 메시지와 함께 적었다.. 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② "당신이 만나는 모든 얼굴이 당신을 만든다" ③ "그대의 시선이 삶의 크기를 정한다" 등이다. 특히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선택할 준비를 하라고 조언한다. 이 책 『위버멘쉬』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뛰어넘는 길을 찾기를 역자는 바란다고 적었다.

책에 따르면 우리는 살아가며 수도 없이 무너지고 흔들린다. 하지만 니체는 "진정으로 나를 파괴하지 못한 고통은 결국은 더 큰 힘으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왜 이런 아픔이 내게 찾아왔을까?"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시련이 내 안에 숨겨진 힘을 끌어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 바로 이것이 1부(Part 1)의 핵심이다. 여기서는 자기 극복을 중심으로 실패와 좌절이 어떻게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지 살펴본다. 니체는 단순히 '극복하라'는 강요를 하지 않는다. 대신,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런 순간만다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2부는에서는 인간관계와 감정을 다룬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얻는 기쁨과 동시에 겪게 되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니체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관계가 때로는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가진 가치를 다시 발견하근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강조한다. 사랑, 분노, 복수심, 연민처럼 우리가 자주 마주하는 감정을 니체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며, '결국 내 감정과 행동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다.


분노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감정으로 보이지만, 때로는 스스로의 한계를 깨뜨리는 강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반면, 공감은 상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능력이지만, 지나치게 몰입하면 오히려 내 삶의 중심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니체는 감정은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느냐이다. 관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 타인의 기대가 아니라 내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 장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고 역자는 안내하고 있다. 마지막 3부에는 개인과 타인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해 보자는 제안이 담겨 있다. 우리는 도덕, 법, 관습, 선과 악 같은 것들을 마치 변하지 않는 진리처럼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니체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정말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인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낸 규칙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질문들은 결국 우리가 세상을 더 유연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고 역자는 설명한다. 3부에서 강조하는 "내 시선이 곧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메시지는, 스스로 가능성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할 것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순간, 삶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의 사상은 흔히 강하고 날카롭고 때론 가혹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메시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독설과 도전은 결국 인간이 더 자유로워지고, 더 멀리 나아가길 바라는 강렬한 열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고 역자는 강조하고 있다.

"절망과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니체는 결코 쉽고 달콤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내 안에 있는 힘을 직접 발견하고, 그 길을 열어 보라"고 권유한다는 것이다. 그 길은 언제나 고독과 시련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펼쳐진 고통과 상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반드시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넘어서는 순간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자신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는 니체가 보인다고 역자는 말한다. 이 책이 삶이 주는 모든 경험을 내 편으로 만들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독자가 이 책 『위버멘쉬』를 읽고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경이롭다'이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니체의 철학 사상은 한 마디로 정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안개가 걷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독자 나름대로 핵심어로 표현한다면 '극기' '도전' '포용'이다. 니체의 저서에서도, 해제 글에도 잘 등장하지 않은 단어를 채택한 이유는 이 책의 분류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니체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는 쇼펜하우어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실제 니체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언급했다. 인간에게는 삶을 지속하는 동안 어차피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며, 이에 맞서 이겨내는 힘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강한 나'를 만든다는 내용과도 맞닿아 있다. 이런 고통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강한 나'여야 가능하다. 그런데 강한 나를 만들려면 우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 요인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극기'다. 니체의 해설서에는 자기 극복, 인간관계, 감정 조절,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주제로 나누어 니체를 설명한다. 이 책 『위버멘쉬』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우리가 흔들릴 때, 고통을 마주할 때, 타인의 시선에 얽매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니체의 사상을 통해 조명한다. 특히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유명한 문장을 강조하며,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최종적인 결론은 독자가 직접 내리도록 유도한다. 이는 니체 철학의 핵심인 자신만의 가치 창조와도 연결되며, 『위버멘쉬』가 단순한 철학서가 아닌 삶을 위한 안내서로 기능하는 이유다. 철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역자의 말도 이해된다. 『위버멘쉬』는 우리 삶 속에서 니체의 사상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기존 철학서를 어려워했던 독자들에게도, 자기 자신을 넘어 더 높은 곳을 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강력한 영감을 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당신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면, 『위버멘쉬』가 그 첫걸음이다. 이 책의 내용이 답이라는 의미다.


이 책에 있는 몇 개의 내용을 여기에 적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1번째 「인생은 태도에 달려 있다」는 아주 간단한 문장이다. "우리는 종종 사소한 일에도 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이 일이 벌어진 게 무슨 뜻일까. 혹시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걸까 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유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삶은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다. 당신이 어떤 태도로 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우연히 길에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그 만남이 무조건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소중하게 만드는 건 당신의 선택이다. 그렇다고 너무 깊이 고민하지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내지도 마라. 세상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당신의 태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한다."(p.42)


「우리에게 중요한 건」이라는 113번째 글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랍ㅁ은 없다. 우리는 모두 흔들리고, 실수하고, 후회하며 산다. 하지만 중요한 건 흠 없이 사는 게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채워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해 가치가 정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빛날 수도 있고, 흐려질 수도 있다. (중략) 때론 넘어지고 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오직 나만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삶의 방식을 지켜나가는 게 무엇보다 소중하다."(p.253~254)


저자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869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리는 데다가 우울증까지 앓았지만 10년간 호텔을 전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이탈리아에서 여름에는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지내며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다. 그러던 중 1889년 초부터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인간에게 참회, 속죄 등을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했다. 본인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르며 규범과 사상을 깨려고 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한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주체와 세계의 지배자인 초인(超人)에 이를 존재로 보았다. 초인은 전통적인 규범과 신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의 이런 철학은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집대성됐고 철학은 철학 분야를 넘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고찰했으며, 『반시대적 고찰』(1873~1876)에서는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에서 더 한층 명백해져, 새로운 이상에의 가치전환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여명』(1881) 『즐거운 지혜』(1882)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를 펴냈는데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하여 긍정적인 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설파했다. 이 외에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어 『권력에의 의지』를 장기간 준비했으나 정신이상이 일어나 미완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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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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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고독의 이야기들』은 독자로서는 처음 보는 제목의 문학작품집이다. 책 이름뿐만 아니라 저자 발터 벤야민도 생경하다. 아렌트, 아도르노, 버틀러, 이글턴, 지젝 등 유명 문인들이 모더니티의 증인으로 추앙하는 인물이라니 독자의 짧은 문학 지식과 소양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저자의 이름으로 낸 책이 이 한 권뿐이라니 독자로서는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될 듯하다. 특히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으로 망명을 꾀하다 체포된 유대인 출신이라니 짧은 생애를 애도하고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글 42편이 글들이 행운으로 다가온다. 책 속 발터 벤야민의 글은 소설, 꿈 기록, 설화 등이지만 그것도 완성본이라기보다 구상이나 후에 다시 쓸 요량으로 우선 내용만 담은 것들도 많다. 특히 한국어 번역 출간은 이 책이 최초라고 하니 보관용 책으로도 훌륭하다. 아마 출판사 측이 양장본으로 책을 낸 것도 보관본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발터 벤야민은 언어철학, 매체이론, 문예비평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사는 내내 소설, 꿈, 설화, 우화, 비유담, 수수께끼 같은 문학작품들을 썼다고 책 뒷 부분의 〈편집자 해제〉를 통해 밝히고 있다. 그 벤야민 사상에 대해 누구보다 조예가 깊은 미국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이 책을 두고 “벤야민 읽기를 놀라운 방식으로 재조정할 굉장한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마흔두 편의 이야기는 이성의 영역과 환상의 영역 사이의 문턱을 넘나드는 꿈의 세계, 대도시 생활에 감도는 성애적 긴장감, 이동과 여행 중에 발휘되는 상상력, 어린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인간 언어의 가능성, 유희 공간 및 유희 활동의 중요성, 도박과 점술, 소망의 독특한 관계 등을 아우르며 벤야민이 사는 내내 천착했던 주제들을 탐구한다. 이 책은 각 단편이 시작되는 책장마다 벤야민이 사랑한 모더니즘 예술가 파울 클레의 회화 작품들을 수록해 이야기에 생동감을 더한다. 〈편집자 해제〉를 쓴 분들은 샘 돌베어, 에스터 레슬리, 서베스천 트루스콜라스키 등 세 명의 문학인들이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벤야민이 끊임없이 장소를 옮겨 다니는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조각조각 써 내려간 까닭에 생전에는 거의 발표하지 못했던 글들이라고 편집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제대로 편집이 가해지기 전까지는 의미 없이 흩어져 있는 파편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벤야민 연구자들의 충실한 편집과 분류, 벤야민의 사유와 예술론을 관통하는 해설, 마지막으로 벤야민이 사랑했던 모더니즘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을 글 한 편 한 편과 엮은 노력 덕분에 이 모음집은 벤야민이라는 신비로운 별자리를 완성해냈다고 책의 출판을 완성하기까지의 고충과 보람을 편집자들은 명시하고 있다.


'귀한 책'이기도 한 이 책은 표제어 '고독의 이야기들'은 2부의 한 장(章)의 제목을 따왔다. 〈고독의 이야기들〉은 「성벽」, 「파이프」, 「불빛」 등 3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성벽」의 시작 몇 개의 문장을 인용해 본다. "내가 스페인의 어느 돌담집에 살기 시작한 것은 그 일이 있기 두어 달 전이었다. 꽤 높은 산마루와 어두운 소나무숲이 집 주변을 화환처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이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해보리라 마음먹곤 했다. 숲 사이사이로 마을들이 숨어 있었는데, 마을 이름 대부분은 성인(聖人) 이름을 딴 것이었다. 마을들은 그 이름을 가진 성인이 바로 거기에 살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천국 같았다.(p.183)

저자 벤야민은 문학적 글쓰기와 비평적 글쓰기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껏 알려진 그의 많은 문장에서 문학적 섬광이 엿보이고, 나아가 그의 글 자체가 시문학 없이 생겨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알려진다. 에에 따라서 벤야민의 글을 접해본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문학작품을 쓰는 벤야민의 모습을 상상해보았을 수도 있다. ‘벤야민이 픽션을 쓴다면 어떤 작품들을 창조해냈을까?’ ‘벤야민이라면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어떤 종류의 문학으로 빚어내고 싶어했을까?’ 노벨레, 꿈 기록, 철학적 우화, 비유담, 설화, 수수께끼 문제 등을 묶은 이 문학작품집은 그 오랜 궁금증을 매력적으로 해소해준다고 해제를 쓴 편집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벤야민 생전에는 대부분 발표되지 않았던,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텍스트들이기에 출간이 더욱 특별하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 책이 지닌 또 한 가지 특별한 면모는 여기 실린 작품들이 벤야민의 아이디어, 사유의 움직임을 앞서 공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네 가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차르의 말단 관리 슈발킨과 유대교 경건파 걸인은 프란츠 카프카에 관한 에세이에 다시 등장한다. 〈두 번째 자아〉에 등장하는 ‘카이저파노라마’는 『일방통행로』 속 글을 되비추는 한편으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을, 그리고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에 배치된 자서전적 콩트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렇듯 이 책은 밴야민이 자신의 이론적 관심사들을 어떤 형식으로 연출하고 연기하고 선보였는가를 예시한다


「경고」, 「서명」, 「소원」, 「감사」 등 4가지 소재로 이루어진 〈네 가지 이야기〉 속 「경고」의 몇 문장을 인용한다. "칭다오에서 멀지 않은 유명한 당일치기 여행지의 관광 장소 중에 낭만적인 분위기와 가파른 절벽으로 인기를 끄는 바위 언덕이 있었다. 사랑을 쟁취한 남자들이 행복한 시기에 데이트를 하러 오는 곳이어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데려온 여자와 팔짱을 끼고 풍경을 보며 감탄하다가 둘이 함께 근처 식당에 들러 배를 채우곤 했다. 식당은 성업 중이었다. 명 선생은 그 식당의 주인이었다."(p.261)

벤야민이 문학적 글쓰기를 계속해나간 배경에는 자신만의 이야기 이론이 있다. 그는 ‘이야기 들려주기(구술,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론을 여러 텍스트에서 다루었는데, 「이야기꾼」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이다. 여기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경험은 민담과 동화의 형태로 대대로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대를 대대로 이어주었던 “경험이라는 붉은 실”은 전쟁과 함께 끊어졌다. 생존자들의 “연약한 육체”는 “사방을 초토화시키는 유출과 폭발의 역장”에 휘말렸던 경험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는 것.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사라지고 있는 경험의 전달 가능성을 다시 새롭게 상상한다.

벤야민이 찾은 방법은, 경험을 휘발시키는 ‘저널리즘’ 언어 대신 구술 전통을 모방해 이야기를 들려주어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텍스트들에서 구술 전통을 모방해 목소리를 겹겹이 쌓는다. 이를테면 한 선장이 한 승객에게 썰을 풀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자기가 겪은 신기한 일을 들려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지인 이야기를 전하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식이다. 

〈해제〉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는 인용, 수수께끼 같은 말, 시점들이 쌓인 세계를 창조한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의 채록과 재구술이라는 긴 전통을 연장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경험은 새로운 지반을 찾는다. 말하자면, 벤야민이 시도했던 것은 변화된 조건들 아래에서 스토리텔링의 구술성을 재활성화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참호에서 필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이야기일까? 어떤 글을 써야 이 시대가 들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벤야민의 문학적 작업물을 꿈과 몽상, 여행, 놀이와 교육론 등 3부(部)로 나눈다.



각 부의 테마를 다루는 서평도 여러 편 포함돼 있는데, 이런 종류의 글에서 벤야민은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형식을 놀라운 방향으로 (형식이 스스로 허물어질 수도 있을 지점까지) 밀어붙인다. 1부의 글들은 꿈과 몽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벤야민이 가장 초기에 쓴 글들과 나란히 그가 꾸고 기록한 꿈들이 실려 있다. 그가 밤에 꾼 꿈이 이 세계의 고통을 반영하고 과장한다면, 그가 가장 초기에 쓴 공상 작품들은 '고통 없는 세계'의 비전을 그려 보인다. 여행을 다루는 2부의 환승 이야기는 지상과 해상의 지상과 해상의 풍경을 지나는 이야기들과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는 이야기들로 나뉘어 있다. 외로워하는 여행자도 있고, 낯선 만남에서 경험을 주워 모아 나중에 누군가에게 다시 들려주고자 하는 여행자도 있다. 〈이야기꾼〉에서 지인이 장인이 되어 공방에서 지혜를 전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대 도시인의 삶의 성애적 긴장 상태는 여기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것은 벤야민의 글이 가장 초기부터 탐색한 테마다.) 3부는 놀이와 교육론을 벤야민의 사유에서 서로 얽혀 있는 두 측면으로 제시한다. 여러 편의 글이 말장난을 탐색하고 있는데, 마치 단어들이 "자석이 되어 다른 단어들을 불가항력적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기도 하다.(벤야민이 프란츠 헤셀의 『내밀한 베를린』에 대한 서평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이 책은 티어가르텐 지역 저택들의 짧은 계단, 주랑 현관, 프리즈, 아키트레이브를 단어 그대로 받아들인다. "구(舊)" 서구(西區)는 고대 그리스 로마가 되었으니, 거기서 서풍이 불어오면 사공은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실은 배를 란트베르 운하에 띄우고 느릿느릿 노를 저어 헤르쿨레스 다리까지 간다. 베를린의 다른 주거 구역들과 비교해볼 때 이 동네는 문턱들과 성문들을 통과해야 진입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도드라져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어느 모로 보나 이런 문턱에 일가견이 있다.9단, 그가 좋아하지 않는 실험 심리학이 내세우는 미심쩍은 문턱[임계점]은 제외다.)"(p.155)

벤야민의 사유에서는 말장난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한 원칙이다. 3부에는 〈행운의 손〉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도박에 관한 대화」란 부제가 붙어 있다. 주제는 '도박의 탈을 쓴 놀이'라고 편집자는 말한다. 현대인의 도덕 이야기일까? 이에 대해 편집자는 벤야민은 본능 및 직관에 대해서, 몸이 모방을 통해 얻는 앎에 대해서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의문을 갖는다. 바로 앞글 〈1분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들, 그중에서도 특히 라디오와 상호 작용하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마찬가지로 놀이하듯 다뤘다고 언급하면서다.(덧붙이면 벤야민이 듣는 사람들과 입말로 관계 맺는 능력을 연마한 것은 라디오 매체에서였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벤야민은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형식을 놀라운 방향으로, 형식이 스스로 허물어질 수도 있을 지점까지 밀어붙인다고 편집자들은 〈해제〉를 통해 강조한다. 1부의 글들은 꿈과 몽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그가 밤에 꾼 꿈이 지금 이 세계의 고통을 반영하고 과장한다면, 그가 쓴 공상 작품들은 ‘고통 없는 세계’의 비전을 그려 보인다. 꿈결 같은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으스스한 배회라는 단골 테마가 그런 고통의 반영과 과장을 보여주고, 〈어느 크고 오래된 도시에서〉나 〈저녁의 목신〉에서 묘사되는 색채는 ‘고통 없는 세계’의 비전을 배경으로 생동감을 얻는다.

여행을 다루는 2부는 지상과 해상의 풍경을 지나는 이야기들과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는 이야기들, 그리고 거기서 자극받은 성애적 동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행한다는 것은 친숙한 것들을 뒤로하고 떠난다는 뜻이다. 여행은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생활을 열어낸다. 이를테면 〈마스코테호의 항해〉에서 선상은 바다 위의 마법 도시다. 광란이 규범이고 선장은 아무 권위도 없다. 또 여행은 문턱을 가시화한다. 기차역과 항구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이다. 〈북유럽 바다〉(여행담)에서는 합리적 이성의 세계와 망상의 세계를 나누는 문턱이 낮아진다. 무엇보다 여행-이동은 어딘가로 인도한다. 〈숨기고 있던 이야기〉처럼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유인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건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 가게 된 사람은 가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많은 것을 목격하게 된다.

3부는 벤야민의 사유에서 서로 얽혀 있는 두 측면으로 놀이와 교육론을 제시한다. 여러 편의 글이 말장난과 놀이를 탐색하고 있다. 벤야민의 사유에 비추어보면, 어른들은 말장난과 놀이의 즐거움을 아이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 연장선에 도박과 점술도 있다. 「행운의 손」의 주제는 도박의 탈을 쓴 놀이다. 놀이하듯 배우는 것은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데서도 마찬가지여서, 〈1분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에서는 라디오 매체와 상호작용하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놀이하듯’ 다룬다.

이 책에 실린 마흔두 편의 글은 대개 짧다. 벤야민은 이야기 형식을 실험하며 이야기가 품은 에너지를 짧은 분량으로 압축했는데, 덕분에 에너지는 최대한 강력한 상태로 집약된다. 이미 존재하는 현실들과 언젠가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를 현실들의 농축물을 만들어 삼투시킨다. 그런 글들은 만질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세계의 무언가를 현실감 있게 보여주는 한편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우리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 때로 마법처럼 판타지처럼 압도적이고 신비한 경험이 되도록 부려놓는다.


시간 창고 안에 들어가보면 사용되지 않은 하루하루가 쌓여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수천 년 전 지구가 얼려둔 나날이. 사람은 스물네 시간마다 하루를 소모하지만, 지구는 하루를 이렇게 반년에 한 번씩 소모할 뿐이다. 이곳이 아직 무사한 것은 그 덕분이다. 시간은 바람 없는 고요한 정원의 키 작은 나무에 가 닿지 못했고, 선원들은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에 당도하지 못했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그것들 위에서 두 미광이 만나 구름을 나누어 가지듯 그것들을 나누어 가지고는 당신을 빈손으로 집으로 돌려보낸다.(p.175~176) - 「북유럽 바다」 중에서


저자 :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프라이부르크, 뮌헨 대학 등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나중에 평생의 친구이자 유대사상에서 지적 동반자가 된 게르숌 숄렘을 만난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간 그는 1919년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에 대한 연구로 베른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고 번역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4년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집필하지만 아카데미 세계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같은 해에 알게 된 연인 아샤 라치스 이외에 나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유물론적 사유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평, 번역, 방송활동을 펼쳐나간다.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유럽에서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로 이해한 그가 택한 길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고, 유대 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 신비주의와 계몽적 사유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통해 현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1940년 벤야민은 당시 뉴욕에서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원을 받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를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결한다. 그로써 그가 13년간 매달렸던 프로젝트, 즉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의 구상을 상부구조(문화) 전체에 적용하여 19세기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필생의 저작 『파사젠베르크』(Das Passagen-Werk)는 미완으로 남는다. 스탈린-히틀러의 밀약을 접한 충격에서 쓴 유물론적 역사철학의 결정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일명 ‘역사철학테제’)는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다.


그림 :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스위스 화가이다. 국적은 독일이다.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출생.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났다. 스물한 살에 회화를 선택한 후에도 W. R.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 W. A. 모차르트의 곡들에 심취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8~1901년 독일의 뮌헨에서 세기 말의 화가 F. 슈투크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1911년 칸딘스키, F. 마르크, A. 마케와 사귀고, 이듬해 1912년의 ‘청기사’ 제2회전에 참가하였으나 1914년 튀니스 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세계로 들어갔다. 동료 화가들인 루이 무아예와 아우구스트 마케와 함께 아프리카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던 클레는 여행 중에 느낀 감상을 “색채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나는 화가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구상적인 미술양식과 추상적인 미술양식 모두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미술 사조에 속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클레는 작품에서 엄격한 입방체와 점묘법, 그리고 자유로운 드로잉을 실험했으며, 그가 접했던 모든 미술 사조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특히 음악에 대한 관심은 그의 미술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빨강의 푸가」(1921)와 「A장조 풍경」(1930) 같은 많은 작품들은 음악적인 구조로 정돈되어 있는데, 마치 악보 위에 음표들을 배열하듯이 색채도 정확히 배열되어 있다.

저술로는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조형사고(造形思考, Das bildnerische Denken)』(1956), 『일기(Tagebucher)』(1957)가 있으며, 작품수장집은 스위스의 베른미술관 내 클레 재단에 약 3,000점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작으로는 「새의 섬」, 「항구」, 「정원 속의 인물」, 「죽음과 불」 등이다.


역자 : 김정아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비교문학과에서 「모든 매체는 영매다: 소설의 재현과 영화의 복제에 나타난 주-객 매개 비교」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문학, 이론, 번역 강의를 하고 있다. 「정확하고 유려하게 : 『오만과 편견』의 번역을 중심으로」, 「학교엔 귀신이 산다」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옮긴 책으로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죽은 신을 위하여』, 『감정 자본주의』, 『눈과 마음』,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 『슬럼, 지구를 뒤덮다』,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 『동물들의 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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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내력).절(절박함).미(미친 실행력) - 인생의 성공을 부르는 마법의 단어
양은우 지음 / 새빛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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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는 30대의 젊은 사람들이 부와 성공에 도전할 때 갖추어야 할 세 가지 힘을 갖출 것을 권유하고 있다. 세 가지는 인내력과 절박함, 그리고 미친 실행력(인절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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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인내력).절(절박함).미(미친 실행력) - 인생의 성공을 부르는 마법의 단어
양은우 지음 / 새빛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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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꿈꾸고, 삶의 목표로 꼽는다. 행복은 개인의 성공으로부터 오며, 목표를 위해 부단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삶의 목표인 행복은 자신의 노력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또한 합리적이다. 옛날 기준으론 성공이란 입신양명(立身揚名)이고 출세(出世)이다. 그때는 먹는 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때다. 그나마 관직에 나가면 최소한 먹을 것은 확보해서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을 때 이야기다. 우리나라도 각고의 노력으로 산업화되고 민주화된 이후부터는 출세란 말은 쏘옥 들어갔다. 성공이 출세란 의미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이란 의미로 변질된 듯하다. 

인간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의식주(衣食住)'다.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다. 지금은 엣날과 다르다. 나라 경제가 조금 좋아져서 굶주림은 '복지사회의 수치'라고 간주해서 돈을 못 버는 사람들도 굶어죽을 일은 없을 정도로 국가에서 해결해 준다. 의식주 중에 최소한 '식(食)'은 해결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먹는 것은 행복의 조건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성공의 척도는 이제 의(衣)와 주(住)의 문제로 옮겨간다. 그러나 '의'는 크게 좌우되지 않는 듯하다. 값싼 것부터 터무니없이 비싼 제품까지 다양한 데다 개성에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미흡한 것 같다. 다만 '주'의 문제는 여전히 큰 문제다. 인구에 비해 땅이 부족해서인지 주거지는 늘 모자랐고,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지금도 골칫거리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일생일대의 큰 문제다. 주거지는 특히 자녀 교육과도 관련돼 있어 좋은 곳에 집 한 채만 소유해도 옛 기준으로 보면 '부자' 축에 들어갈 정도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갈수록 커지고 성공의 기준점도 높아만 간다.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 '돈'이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가치 판단도 돈으로 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가치 기준을 '돈'으로 판단하니 어쩔 수 없다. 이젠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 지금은 얼마나 버느냐가 성공의 척도다. 사람의 욕망처럼 자본의 속성도 비슷하다. 많이 가질수록 점점 커진다. 코로나 이후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성공에 관심이 더 높아졌다. 욜로나 워라벨을 외치던 젊은 사람들도 오늘의 즐거움보다는 미래에 대한 투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이런 이유로 돈과 부, 재테크 등 부자가 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는 책과 유튜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은 인생의 성공을 주식이나 부동산, 비트코인 등 '재테크'로만 연결한다. 돈으로만 환산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공하고 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꼭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있는데도 애써 무시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자본주의 논리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따라 성공을 좇는 삶을 시작했다가 오래 가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게 현실이다. 이 책 『인·절·미』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인생의 성공을 부르는 마법의 단어」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표제어 '인·절·미'는 '인(인내력) 절(절박함) 미(미친 실행력)'의 초성을 따서 저자가 독자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만든 신조어다. 저자는 CEO 모임에서, 강연 중에 개인적 인연으로 만났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절박한 심정으로,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앞뒤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로 수렴됨을 느꼈다. "인내력을 발휘하라, 절박한 심정을 가져라, 미친 듯이 실행하라." 그들은 자신의 꿈을 이룬 방법은 다 달랐지만 공통으로 흐르는 교훈, 인·절·미를 이 책에서 이야기한다. 특히 이 책은 쉽게 시작하고 쉽게 결과를 보고 싶어 하고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3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인내력〉 편에서는 인내력이 무엇인가? 왜 필요한가? 인내력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의 차이, 인내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2장 〈절박함〉 편에서는 절박함은 왜 필요한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절박함이 만들어낸 결과들을 여러 사례들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한다. 마지막 3장 〈미친 실행력〉 편에서는 실행력은 무엇인가? 왜 필요한가? 어떻게 높일 수 있을까? 그리고 실행을 방해하는 요인들과 극복 방법들을 소개한다.

이 책 『인·절·미』는 성공한 사람들의 비결을 다루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개념적으로 정리한다. 이 책을 읽고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접목하고 응용할지의 여부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기 위해서라고 저자는 말한다. 성공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큰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록 돈이 없고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도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면 성공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저자 역시 이 책에서 성공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뒤돌아보면서 후회하지 않는 삶, 나이 들어서도 여유 있게 지낼 수 있는 삶, 누구에게도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면 성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성공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p.7~8)



역시 성공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인내'다. 인내 없이 성공 없다는 뜻이다. 어떤 목적을 갖고 일을 하는데 목적에 도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집념 어린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누군가의 '성공 신화'를 이야기할 때 어떤 노력의 과정과 시간이 얼마나 걸린 것인지보다 '성공의 크기'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간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 이해하고 판단하면 성공의 과정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야말로 '수박 겉핧기'다. 이런 관심은 한때 화제거리로 소모될지언정 자신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만 키운다. 욕망엔 과정이 없다. 욕망을 이루고 못 이루느냐에 관심을 가진다면 욕망과 결과만 보일 뿐이다. 인내와 과정, 노력의 시간 등을 알아내고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이는 우주만물의 섭리가 그렇듯이 씨뿌리고, 물 주고 가꾸는 과정 없이 가을에 열매만 기다린다면 마음대로 잘 될까? 물 주고 열매를 맺도록 돌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열매를 기다릴 수 없다. 일년 내내 직접 경작해야 열매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옛말에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다. 

인내력을 성공의 제1 조건으로 꼽는 것도 이 같은 까닭에서다. 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모두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연아도 금메달을 딴 후 "No pain, No gain."이란 격언을 사용해 소감을 밝혔다. 인고의 시간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혹독한 상황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힘, 인내력은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 모른다. 단순히 시간만 보내며 기다린다고 성공이 스스로 오지는 않는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꼭 참고 이겨내야 이루고자 했던 목표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 인내력이다. 이 때문에 인내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유가 목표가 필요하다는 역논리도 성립된다. 왜 인내력을 발휘해야 하는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가 명확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꾹 참고 견디기만 하는 것은 '곰 같은 행동'일 뿐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람의 사는 이치를 가르쳤던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중국 철학도 모두 목표를 세우고 고통을 참아내며 그 과정에 이르는 일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했다. 전쟁 중에 나온 고사성어지만 복수의 목표를 세우고 이루기 위해서는 '가시나무 장작 위에 눕는다'는 뜻이다. 복수심, 복수의 목표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인내력과 절박함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절박함을 불러오는 힘」이란 글에서 인내력은 절박한 마음이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추운 겨울날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보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없다면 두려움과 공포, 추위와 탈진 속에서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라며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춥고 배고프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이 지친 상황에서 쉽게 포기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내가 이걸 하지 않으면 죽겠구나, 이걸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하는 절박함이 있어야 정신력과 체력을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물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자신이 목표로 삼은 일에 있어 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직장인들 중에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한다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절박함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가진 역량만큼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쌓여 있을 것이고 그래서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월급도둑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만 하자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절박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리 없습니다. 그들은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일하니 월급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p.67)

저자는 독자들의 의문도 예상하고 있다는 듯이 인내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그럴 때 '지름길'이 보이는 것이다. 조금 힘을 덜 들이고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때 주의할 점은 '지름길의 유혹'이다. 공자도 나이 40이면 '불혹(不惑)'이라고 설파했다. 40년 정도 열심히 살다 보면 조금 더 쉽게 살아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유혹이 생긴다. 물론 사사로운 유혹도 포함된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일이다. 그러나 목표가 뚜렷하고 성취를 원한다면 유혹인 지름길을 과감히 포기하라는 가르침이다. 저자 역시 지름길을 유혹이라고 본다. 이 무렵 필요한 것이 '자기절제'다. 할 일을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적절히 제어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자기 통제력이란 말도 사용된다. 자기 절제력을 가진 사람들은 중도에서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인내력은 노력만으로 길러지는 게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인내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정신역량을 높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물질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다. 각종 기기와 기술의 발달이 만들어내는 빠르고 편리한 세상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다 보니 깊이 있게 사고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온갖 고통을 이겨내는 정신적 힘을 잃어버린 듯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는 힘을 잃어버렸기에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짛몌도 잃어버리고 자그마한 일 앞에서도 쉽게 좌절해 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정신역량을 높이는 훈련이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절박함'에 대해 저자는 독자들에게 응원의 말을 보낸다. "운명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운명은 그리 모질지 않다."고 귀띔한다. 누구에게나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모든 문이 닫히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절박함이 있어야 '궁(窮)'의 경지를 벗어나기 위해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변화하다 보면 통(通)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는 것이 순리라고 책에 적시하고 있다. 다만 그저 가만히 있어도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다. 절박함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고 그 변화는 새로운 길로 안내하는 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 무슨 일을 하든 대충대충 하다가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릴 것을 당부한다. 상사의 업무 지시 하나도 그런 심정으로 대해 볼라고 권유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앞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절박함을 설명하는 2장에서 일의 성과를 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몰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공은 노력의 성과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수많은 문제들과 부딪힌다. 작고 사소한 문제부터 생명이 달린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삶은 문제해결과 의사결정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고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사고(思考)가 필요하다. 그 사고의 질은 고민의 길이와 비례한다고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설명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얼마나 깊이 있게 고민하느냐가 얼마나 좋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면 좋은 사고를 떠올릴 수 있게 되고 그것은 다시 좋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몰입의 효과'라고 강조한다.



"몰입하기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은 절박함이다. 절박함이 없으면 몰입에 이르지 못하고 생각이 흩어지거나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무언가를 고민하다가도 "에이, 골치 아파. 모르겠다."며 그만두거나 "이 정도면 됐어. 이제 그만하자"라며 중간에 손을 들고 편의와 타협하고 만다. 그렇게 해도 성과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더 뛰어난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p.153)


"30대, MZ 세대들을 대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인생의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다. 진지함을 멀리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에게 "당신의 삶에는 '인절미'가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30대는 가장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이면서 자신을 위해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시기이다. 이 책은 무언가를 미주알고주알 가르치는 것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 깨닫고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포함한다. 30대는 사회적으로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들로 안정되지 못한 삶으로 인해 힘든 상황에 놓여 있을 수 있는데 이들에게 인내와 절박감, 실행력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책을 통해 막연한 위로가 아닌 실질적 조언을 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저자 : 양은우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IMF 시절, 회사의 지원을 받아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였다. 산업장학생으로 LG전자에 입사한 후 ㈜두산, CJ 프레시웨이에서 전략기획팀장을 역임하였고 ㈜동성홀딩스에서 경영전략담당 임원을 역임했다. 기획과 전략 분야에서 25년간 업무를 수행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2013년에 <관찰의 기술>로 저술활동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17권의 책을 썼다.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성장과 변화의 씨앗을 심어주고 선한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어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첫 번째 저술 도서인 <관찰의 기술>은 진중문고로 선정되었으며 <처음 만나는 뇌과학 이야기>는 세계적인 게이머 페이커의 추천도서 목록에 올라있다. <주식회사 고구려>는 세종도서로 선정되었고 <당신의 뇌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는 교보문고 북모닝 CEO 추천도서가 되었다. 이 외 많은 책들이 호평을 받고 있고 현재도 끊임없이 집필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뇌과학을 공부하고 있고 관련 서적들을 집필하는 중이다. <공부의 뇌과학><기획자의 일><워킹 브레인><소용돌이치는 사춘기의 뇌> 등의 저서가 있으며 다수의 방송에 출연하였다. 교통방송 ‘나도 모르는 뇌, 심(心)봤다’ 코너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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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이기원 디스토피아 트릴로지
이기원 지음 / 마인드마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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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사사기』의 표제어로 쓰인 '사사기(士師記, JUDGES)'는 통일된 국가 조직을 갖추기 전 일종의 과도 체제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처신하던 타락하고 범죄한 암울했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사사기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이 이방 군대를 동원하고, 또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사사를 보내 구원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반복적인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세상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원리를 배우게 된다. 이스라엘 지도자 여호수아 사후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등장 때까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이스라엘의 군사, 정치 지도자. ‘사사’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쇼페트’나 헬라어 ‘크리테스’는 원래 ‘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으로서 소송과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나 점차 그 범위와 영향력이 정치나 군사 등으로 확대됐다.

라이프성경사전에 따르면 사사기에 기록된 사사는 열두 명인데, 6명의 대사사로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이 있고, 6명의 소사사로는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 등이 있다. 바락은 여사사 드보라와 같이 활동했고, 사무엘은 사사기에 언급되지 않지만 마지막 사사로 간주되며, 사무엘의 두 아들도 사사로 불린다. 탈무드나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이 책은 사사 시대 말기와 왕국 시대 초기에 활동한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는 B.C. 7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 유다 왕 요시야 때 익명의 저자가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하나님의 경고→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가중되는 범죄→이방 군대를 동원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사사를 통한 구원→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시작되는 범죄로 이어지는 일련의 순환구조로 구성돼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범죄의 역사는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죄악성과 부패성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나 인본주의적 윤리관이 인간을 구원과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절망과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동시에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중심적(신본주의적)인 삶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자만이 오히려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소설 작품 『사사기』의 저자 이기원이 '사사기'에서 최소한의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독자가 이해하는 이유이다.


구약성서에서 여호수아로부터 사무엘 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두산백과는 설명하고 있다. 〈사사기〉는 구약성서에서 일곱 번째에 위치한다. 〈사사기〉는 〈판관기〉라고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각 부족에 의한 가나안 정복에서 시작하여 엘리야·사무엘 시대까지, 즉 BC 12∼BC 11세기에 걸친 역사 사건들을 토대로 삼고 있다. 내용은 크게 3부로 나누어진다. ① 이스라엘 민족에 의한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관한 개관, ② 판관들의 전기, ③ 부록 등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를 배신하거나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질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지방을 정복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각 부족은 자기들끼리만 각기 적당한 영토에 살았으며, 각각 다른 사정 아래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중앙집권적인 기관이 없었고 왕도 없었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동의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지도자의 소임을 맡은 사람이 판관이다.

판관은 타민족으로부터 압박을 받거나 전쟁을 할 때에는 군사령관이기도 하였고, 평상시에는 판사의 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들의 권능은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서, ‘신(神)의 심판’을 대행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헤브라이어의 판관이란 ‘판단자’의 뜻을 가지며, 재판자라기보다는 구조자·지도자·지배자라는 뜻에 가깝다. 판관 제도는 그 후 왕 제도가 형성되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판관의 활동범위는 지역중심적이고 대개 부족의 장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판관기는 이러한 판관들의 영웅담의 일면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국 건설 이전의 정복사, 사회적 여건, 부족간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본래 사사(士師)·사사기(士師記)라고 써 왔는데, 1970년대에 신·구교가 성서의 공동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그 명칭을 판관 또는 판관기로 고쳤다고 두산백과는 기록하고 있다.


이 책 『사사기』는 오랜 전쟁과 전염병이 휩쓴 후 모든 것이 궤멸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쓴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저자 이기원은 전작 『쥐독』에서 디스토피아 세계를 보여준 적이 있다. 『쥐독』은 전쟁과 전염병으로 전세계 모든 국가가 몰락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울의 이야기를 다룬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허울뿐인 정부를 대신해 도시를 통치하게 된 기업인들은 의학 분야에서 비약적 성취를 이루며 ‘영생’의 꿈을 이루지만, 그렇게 쟁취한 부와 기술은 오직 극소수의 상류층만을 위한 서비스가 되었다. 아무도 이런 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모든 게 당연하게 불공평해진 사회다. 

작품 『쥐독』 출간 후 한 인터뷰에서 2025년에 『쥐독』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소설 작품을 계속해서 출판할 계획이라고 저자는 밝힌 적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저자는 작품 이름까지 말할 정도여서(『사사기』와 『리사이클러』) 이미 거의 다 써놓은 상태가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때 저자가 밝힌 작품 중 한 작품이 『사사기』이다. 저자는 또 『사사기』의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사기』는 현실에 대한 제 의문을 녹인 소설로 ‘인공지능이 완벽한 정의를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며, 『리사이클러』는 지배계급을 위한 톱니바퀴로 쓰이는 인간이, 자신이 갖지 못할 욕망 때문에 비극을 맞는 이야기입니다."

또 디스토피아 장르가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점에서 어려움이 많고 장르의 개성이 강하다보니 장벽을 느끼는 독자분들도 있을 텐데, 디스토피아물 읽기를 망설이는 독자분들께 장르의 매력을 알려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란 질문에 "디스토피아 장르가 읽기엔 불편하고 내용이 어두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이야기이자 현실의 투영이기도 하죠. 저는 우리가 가진 현실의 문제나 진실에 대해 외면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문제들에 대해 곱씹어보며 자신의 상상을 펼쳐볼 수 있다는 게 디스토피아 장르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확고한 작품 성향을 가진 작가임을 귀띔하기도 했다.




이 소설 『사사기』에서도 대한민국은 무너지고 ‘전국기업인연합(전기련)’이 도시 통치권을 넘겨받아 새로운 형태의 도시국가 ‘뉴소울시티’를 출범한다. 최첨단 기술과 의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며 전기련의 수장으로 등극한 기업 ‘아바리치아’는 도시를 개편하고 새 시대를 열 준비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AI판사 「저스티스-44」의 도입과 혁신적인 치안 서비스로 범죄율 제로의 태평성대의 시대를 이룬다. 과거부터 쌓아온 수많은 판례와 법률 조항 데이터를 학습하고 뉴소울시티 시민들의 불만과 불신, 바람을 분석해 철저한 법의 논리로만 형을 집행하는 저스티스-44는 만인에게 평등하고도 엄정한 법의 잣대를 들이댔고, 시민들은 저스티스의 공명정대함에 환호했다. 마침내 저스티스는 죄악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정의의 시대를 열 새로운 사사(士師)로 급부상한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통솔하던 판관이자 통치자들을 뜻했는데 신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사사기’는 구약성서 서른아홉 권 중 하나로 역사 속에 존재해왔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스티스-44라는 이름은 광야에서의 고난을 끝낸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던 사사기의 사사들처럼 대한민국이라는 죄악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희망을 짊어진 존재라는 의미와 맞아 떨어졌습니다."(p.35)


어느 날, 완벽해야 할 도시에서 자동차 사고부터 아파트 폭발까지 AI의 통제를 벗어난 오작동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다수의 사망자까지 발생한 이번 사고를 조사하던 조사관 우종은 일련의 사고들에 대해 저스티스-44가 내린 판결에 의구심을 느끼고, 완벽하다고 믿었던 도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우종의 시선은 사고 현장이 아닌 저스티스의 과거 판결들을 향한다. 뉴소울시티의 거주자들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AI판사는 과연 모두의 믿음처럼 공정한 판결을 하고 있는 걸까? 과연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직감이나 심증 같은 것들을 철저히 배제한 판결이 언제나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완벽한 정의’라는 환상에 물들어 맹목적 신봉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종은 자신과 비슷한 의구심을 가진 감사부 직원 영무, 사회부 기자인 재민과 합세해 더욱 적극적으로 저스티스-44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우종과 영무는 저스티스-44의 서버 건물에 잠입해 지난 판결에 대한 데이터를 찾고, 기자인 재민은 저스티스-44의 완벽함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기사를 작성해 도시를 술렁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신성모독적 활동을 해 나가면서도 이들이 진정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저스티스-44와 도시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기사가 나간 그날 밤 재민이 살해당한 채로 발견되면서 이들의 믿음은 무참히 짓밟힌다.


우종의 머릿속으로 사건 직후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강한 폭발에 날아간 철제 문짝. 처형이라도 당한 듯 모니터 패널에 처박혀 있던 박도경의 상반신. 저스티스-44의 판결처럼, 이건 정말 오작동 사고가 맞는 걸까?(p.136)


인공지능이 아무리 빅데이터를 축적한 지혜의 총아라고 해도, 인간만의 감각인 촉과 데자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 감각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할 순 없다. 인간의 촉 역시 경험이라는 알고리즘에 의해 도출된 일종의 값이다.(p.192)




저자 이기원은 전작 『쥐독』을 통해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기술의 위험성에 대해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이번 작품 주제는 다르지만 삶과 기술의 딜레마에 대해 통찰한다는 점에서 그의 고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독자는 이해된다. 특히 이 작품 『사사기』는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천착하는 작가의 고뇌와 문제의식이 가감 없이 발휘된 소설이란 문단의 평가다. 저자는 『사사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아무리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방대한 데이터가 응축된 사법체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이나 인간 특유의 인식체계에서 발견하는 심증까지 찾아내고 반영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건 거짓이야. 진실이 아무리 잔인하더라도 사람들은 진실 속에 살고 싶어 해. 오직 진실만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걸 마주하게 하거든.”(p.303)


인간의 탐욕은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이나 뉴소울시티나 마찬가지였다.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일 뿐. 정의로워서, 도덕적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p.327)


저자 : 이기원


타인과의 대화, 누군가와의 접점, 무언가와의 연결고리가 모두 끊어진, 때론 외롭고 때론 두려운 공백의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는 무의미하고 부질없는 시간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작가 이기원에게는 그런 시간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과 맞닿아 있는 연유다. 담배 연기와 짜장면 냄새 가득한 만화방에서 만났던 우라사와 나오키, 추운 겨울 춘천 시내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비디오테이프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인디아나 존스]를 만났던 1985년의 여름날 같은 순간들. 그리고 그런 생각 안으로 죽음에 대한 사유가 비집고 들어왔다. 죽음이 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거기서 우리는 진정한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을지, 수많은 고민과 반문 끝에 마침내 『쥐독』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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