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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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의 역사를 통해 개인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프라이버시는 ‘혼자 있을 권리’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끌어냈으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와 충돌할 경우 사생활이 함부로 이용되는 것을 막는 노력은 언제나 경계 밖에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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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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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이 책 『사생활의 역사』의 표제어로 쓰인 '사생활'은 영어로 '프라이버시(privacy)'로 표현되는 단어다. 이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가족을 비롯한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일이나 관계를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빈센트도 「혼자 있을 권리의 시작, 중세 시대」란 제목의 1장(章)에서 '사생활(프라이버시)'이 개인에게 국한된 개념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이에 따르면 프라이버시의 어원인 '프리바투스(privatus)'라는 라틴어에는 공권력의 통제를 받는 집단의 문제와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동체의 문제가 구분된 합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이런 구분이 무시될 때가 있었다. 그 시작은 변호사인 새뮤얼 워런과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1890년 《하버드 로 리뷰》에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발표하며 프라이버시를 '혼자 있을 권리'로 정의하면서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사생활'이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사회 문제가 된 것은 중세 시대부터라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 의견이다. 14세기 중세 런던의 빽빽한 거리에서 벌어진 분쟁은 수도 없이 많았다. 런던에서는 12세기부터 방해죄가 존재했는데 여기에는 사적인 방해와 공적인 방해가 모두 포함된다고 저자는 풀이하고 있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방해를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재판소에 소를 제기할 수 있었다. 재판소 심리에서 쟁점이 된 것은 '사적인 가정생활이 보호받아야 한다'였다.(p.14)

두산백과에 따르면 프라이버시란 개인이 사생활에 대한 부당하거나 원치 않는 타인의 개입을 받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서구 근대 역사의 산물로, 프라이버시에 대한 요구는 17세기에 처음 관찰되었고 18세기에 프라이버시 권리의 제도화를 위한 초석이 마련되었다. 영국의 1689년 권리장전과 프랑스의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의 선언이 선언한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체·안전의 자유 등에는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19세기 중산계급 가정의 형성은 프라이버시의 발전에 있어 중요했다. 중산계급 가정을 통해 ‘사생활’에 대한 개념이 구체화되었고 실재하는 것이 됐다. 금전적 여유가 되는 중산계급에게 가정 생활은 매우 실재적이고 실질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신보다는 가족과의 밀접한 관계를 삶의 중심에 두었다. 가정의 영역을 보호하고 유지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는 남성 가장의 관리 하에 개인적 지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사회적·정치적 실권자가 그것에 개입할 권리는 없었다.

20세기에 이르러 프라이버시는 공적 영역으로 확대됐다. 아동 방치의 증가는 국가가 가족의 사생활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는 1908년 어린이 법안과 1918년 산모와 아동 복지법이 제정됐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동 성적 학대는 1908년 '근친상간처벌법'의 제정으로 공권력의 개입을 받게 됐다. 가족의 생활 환경 또한 1919년 도시계획법, 1923년과 1924년 주거법에 의해 정부의 관여 대상이 됐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프라이버시는 사적 열망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재정비 되어갔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은 그 누구도 프라이버시에 대한 임의적인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고, 유럽연합의 기본권 헌장의 제8조항은 모든 개인은 자신의 사생활, 가정 생활, 개인적인 서신을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프라이버시는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1969년 제리 로젠버그*의 《프라이버시의 죽음》은 국립 컴퓨터 시스템이 개인과 단체의 정보를 무한으로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경고했다. 1973년에는 스웨덴의 정보보호법을 시작으로 프라이버시의 위기에 대응한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1983년 인터넷의 등장 그리고 1993년 범세계통신망의 등장과 그에 따른 개인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다시 한 번 프라이버시의 위기가 제기됐으며, 2006년 데이비드 홀츠만은 《프라이버시 로스트》를 통해 빠른 기술 발전의 속도에 힘입어 법 체계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빨리 무너지고 있는 프라이버시의 위기를 경고했다.


*로젠버그(Rosenberg) : 미국(유대계)의 부부.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 에셀 로젠버그(Ethel Rosenberg) 모두 뉴욕에서 출생했다. 남편은 전기 기술자, 아내는 타이피스트였다. 결혼(1939) 후에 뉴욕에서 기계상을 경영했다. 1950년 이들 부부는 원자 폭탄 설계의 스파이(원자 폭탄 설계의 비밀을 소련에 제공) 용의자로서 연방 검찰청에 체포되고, 에셀의 친동생의 밀고라는 유일한 증거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3년간의 옥중 생활에서 부부는 최후까지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고 세계의 각층인으로부터 구명 운동도 있었으나, 결국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두 부부 사이에 10세와 6세의 두 아들을 남겼는데 부부를 위해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운 변호사 블로크(Emmanuel H.Block)는 그 후 원인 불명의 사망을 했다. 부부의 옥중 서간 『죽음의 집의 편지(사랑은 죽음을 넘어서) Death House Letters(1953)』는 각국어로 번역됐다.(인명사전, 2002)

반면 폐쇄적인 가정의 영역과 그 안에서 일그러지는 인간을 우려하는 관점은 사생활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옹호했다. 1967년 에드먼드 리치는 현대 사회의 가정이 고립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로 인해 가정은 바른 사회의 기본 단위이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불만족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정신적, 감정적 건강을 위해 개인의 삶이 은밀하고 폐쇄적인 가정 생활에 지배되지 말아야 한다는 시각이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측과 대립을 이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문〉을 통해 프라이버시의 역사는 소음과 침묵의 기이한 혼합물이라고 정의한다. 또 프라이버시의 개념에 대한 문헌은 많지만 확정된 결론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저자는 이 책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프라이버시의 발전에 관한 설명을 제사함으로써 보다 명확한 시간적 관점을 제공하고자 한다고 저술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책의 출간에 맞춰 내놓은 출판사 소개글에는 사회적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의 프라이버시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을까?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이 책이 중세부터 현대까지 변화무쌍했던 프라이버시의 역사를 흥미롭게 추적하는 책이라고 밝힌다. 이에 따르면 ‘혼자 있는 시간’이 다양하게 실천되어온 모습을 신선하게 풀어낸 『낭만적 은둔의 역사』의 저자인 역사학자 데이비드 빈센트가 이 책에서는 적극적으로 사생활을 지킨 개인의 노력을 이야기한다. 조용한 고독이 필요해진 시대, 혼자인 삶이 많아지는 시대에 사람들에게 품격 있는 인생의 레퍼런스가 되는 내용이다.

『사생활의 역사』라는 제목답게 책은 중세 시대와 풍요로운 19세기를 거쳐 1, 2차 세계대전과 70년대 이후 대두된 디지털 혁명, 2000년대의 소셜미디어까지 개인과 세상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프라이버시의 개념은 오래된 역사만큼 다채롭게 변화해왔다. 중세부터 근대까지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개인을 중심에 둔 문화와 관습의 차원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로는 시민의 권리로 확대되는 양상을 띤다. 한 예로, 14세기 런던에서는 ‘방해죄 재판소’에서 각종 사생활 침해에 대한 개인과 개인의 소송이 줄을 이었다. 700년 전에도 방해받지 않는 삶에 대한 갈망은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혼자 있을 권리’가 좌절될 때 개인은 적극적으로 맞서 왔으며 이는 조지 오웰의 예언적 소설 『1984』와 에드워드 스노든 사건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살펴본 1장, 2장 「군중 속에서 나를 지키다」, 3장 「19세기의 풍요가 불러온 감시자들」, 4장 「전쟁이 개인의 사생활에 끼친 영향」, 5장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 등이다. 저자는 연대순으로 프라이버시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은둔과 고독을 추구한다."는 기저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또 인간은 외롭다고 토로하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외로움을 갈망하는 모순적 존재다. 이러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이 사생활을 절실하게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이는 프라이버시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사생활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격렬하게 싫어하여 줄소송을 감행했던 14세기의 이사벨이나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런 점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논리 전개에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을 완독하면 사적인 시간과 공간이 몇 배 더 소중해지고 더욱 간절해질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고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생활이 공동체의 규범과 가치에 의해 제한되었다고 한다. 신(神)의 존재를 믿는 시대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란 하찮거나 숨겨야 할 나쁜 비밀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프라이버시가 정식으로 사회 문제로 부각되는 시기는 인간 중심의 세상 즉, 르네상스와 근대 이후부터라고 추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근대에 들어서야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강조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개인의 사생활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는 법적, 사회적 차원에서 보호받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관행으로 발전했다. 이는 서양의 시대 구분에 따른 경우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논어』에 이미 "군자는 혼자 있을 때일수록 개인의 몸과 마음 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2,500년 전의 일이다. 프라이버시를 강조하는 말은 아니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대목이어서 프라이버시와는 다소 결이 다르지만 사생활도 중요한 덕목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가르침의 전통은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문화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책의 성격상 프라이버시의 역사적 쓰임새에 대해 상당 부분 기술했지만 집필 의도는 마지막 장에 집중되어 있다고 독자는 이해한다. 4장 「전쟁이 개인의 사생활에 끼친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대적 현상과 분석을 통해 프라이버시의 역사를 기술했다면 5장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은 현대 사회의 사생활도 아직 완전하게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개인의 사생활은 자본과 계급, 사회 환경에 밀접하게 연결돼 있으며, 이는 소셜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매체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소셜미디어는 개인의 정보와 사생활을 공유하는 플랫폼이지만, 동시에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은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사생활의 개념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가 세계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원인은 첫째,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인권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다른 소중한 가치와 충돌할 때 프라이버시의 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둘째, 디지털 혁명으로 이는 개인의 정보 통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가져왔다. 디지털 혁명의 영향은 처음부터 막연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인식됐다. 이전의 기술 혁명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개인정보 관리를 국제화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었지만 그런 발전만으로는 단일하고 포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p.240) 개인의 정보가 온라인에서 쉽게 유통되는 시대에 사생활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사생활의 역사는 개인과 사회 간의 복잡한 관계를 반영하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해왔다. 5장 발제문에서 저자는 프라이버시의 종말은 1960년대 중반 시작되었다고 전제한다. 1960대 중반부터 미국의 의회 청문회가 사생활 침해에 대한 대중의 우려에 바탕해서 열렸다. 1969년 경제학자인 제리 로젠버그의 책 『프라이버시의 죽음』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국가 컴퓨터 시스템이 개인들의 다양한 활동에 관한 정보를 부지불식간에 저장하고 서로 결합하여 버튼 하나만 누르면 찾아낼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담았다. 개인의 공간과 정보 통제의 중요성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사생활의 역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란 믿음에 기초해서다.

1970년 영국에서 국가시민자유협의회 후원으로 작성된 디지털 데이터뱅크에 관한 보고서는 사회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는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프라이버시의 종말이 예견된다고 밝혔다. 컴퓨터의 정보 처리 및 저장 능력이 감시 체제의 중심부가 되어 사회를 투명하게 바꿔놓을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정, 개인의 재무 상태, 개인의 인간관계가 수많은 임의의 관찰자에게 그대로 노출될 것이라는 얘기였다.(p.217)

- 「조지 오웰, 스노든, 다음은?」 중에서


프라이버시 위원회 보고서, 일명 ‘영거 보고서’를 발표한 노동당 정치인 케네스 영거 경은 ‘혼자 있을 권리’라는 대담한 선언이 영국에서 새로운 법률 제정의 토대가 될지 회의적이었지만,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권고 사항은 모두 감시를 피하고 사생활이 함부로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개인을 고려한 것이었다.(p.227)

- 「모두가 프라이버시의 죽음을 외치다」 중에서


저자 : 데이비드 빈센트(David Vincent)


유럽의 역사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 석학. 영국 노동 계층 연구를 시작으로 점차 주제를 확대하여 개인 삶의 다양한 면모를 사회학적, 역사학적으로 탐구하며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대중의 문해력에 대한 변천사, 개인과 국가의 관계 변화, 중세 이후 변화되어온 프라이버시의 개념, 팬데믹 이후 사회 변화 등 개인의 삶에 밀접한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그의 연구는 정치 제도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등 거대 담론과 개인의 감정과 일상 사이를 오가며 연결 고리를 찾는 것으로서, 결과물은 책과 강연 등으로 보통의 역사가와 달리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영국의 공립 방송통신대학교인 개방대학교(Open University)에서 오랜 기간 연구와 교육을 이어온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영국 왕립 역사 학회와 왕립 예술 학회의 회원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예술, 사회과학 및 인문학 연구 센터에 연구 교수로 재직했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낭만적 은둔의 역사》가 있다.


역자 : 안진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대학원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했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헤르만 헤르츠버거의 건축 수업》 《고잉 솔로: 싱글턴이 온다》 《타임 푸어》 《마음가면》 《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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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 프로메테우스의 꿈과 좌절
테리 이글턴 지음, 박경장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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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에 따라 새롭게 건설된 구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체제가 이론대로 실현되기 어려운 국가 체제란 사실만 확인한 채 도입 100년도 안 돼 무너졌다. 20세기 초반 노동자 농민이 모두 농노의 상태로 전락하는 동안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 러시아는 부정부패에 휩싸여 있었다. 서유럽은 물론 튀르키에와도 늘 대립 관계에 있어 누구 하나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널따란 알래스카 주를 미국에 판매(1867)해 전쟁 자금과 권력 유지에 사용하는 등 대다수 국민들은 농노의 상태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굶어죽는 자가 도시에서도 속출했다고 한다. 지배 계층의 무능과 권력욕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요소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시즘의 기본적 토양이 제정 러시아에서는 이미 충분히 갖춰진 셈이다. 레닌이 이끄는 좌익의 다수파(볼셰비키)가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하고 '노동자 농민'의 나라라는 '소비에트 연합' 정부를 세웠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왕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혁명 다음해(1918) 처형당했다. 

이 책 『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는 지난 100여 년간 마르크스에게 들씌워진 철저한 몰이해와 극단적 곡해를 벗겨 내려는 저자 이글턴의 극진하고 핍진한 노력의 소산이다. 이 책은 그동안 부르주아 반동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행되어 온 ‘마르크스(주의) 비판 10가지’를 뽑아서 이글턴이 직접 재비판·반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 이글턴은 논리와 분석을 근간으로 하는 철학자의 방식이 아니라 유머와 위트가 서린 비유로 종횡무진하는 문학비평가의 방식으로써 마르크스의 핵심 쟁점들을 시의적절하게 전달하고 있다. 자칫 지루하거나 딱딱하게만 느껴질 세간의 정치·경제 비판에서, 이글턴은 아주 활력 넘치는 필치로 읽는 내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생동감을 더해 준다. 출판사 측의 소개글에 적힌 내용처럼 이글턴은 우리 시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문화)평론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글턴은 1943년 영국 샐포드에서 태어났다. 영국 신좌파의 대부이자 문화 연구의 창시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제자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옥스퍼드대학교와 맨체스터대학교 영문학 교수를 거쳐 현재 랭커스터대학교 영문학 석좌 교수로 있다. 19세기 이후 영미 문학을 주로 연구하며, 문학사상론,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이념·종교 등의 분야에서 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2011년 첫 판을 펴낸 후 이번 출간된 책은 개정판이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이 개정판 번역본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서가 인용된 경우에는 영어 원서를 독어판 원전과 일일이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번역의 정확성을 기했다. 둘째,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각 장에 대제목과 소제목을 넣고, 삽화·사진 등도 추가하여 흥미를 돋우었다. 책 내용에 좀 더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첫 출판된 데에는 영국 BBC방송이 1999년 뉴 밀레니엄 시대로의 진입을 앞두고,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를 묻는 조사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1위로 선정됐다고 보도한데 힘입은 바 크다. 곧 이어 미국의 TIME지도 마찬가지 결과를 발표했다. 이 책의 저자 이글턴은 마르크스 사후 100년간은 전 세계 절반의 국가가 그의 사상을 실험했고, 나머지 절반의 국가는 그를 거의 악마의 화신처럼 여겼다고 말한다. 단연코 인류사에 마르크스만큼 절대적으로 신봉되고 절대적으로 불신된 사상가는 없었다. 그만큼 그는 몰이해되고 곡해되었다는 주장이다.

독자들이 보았다시피 이 책의 표제어를 수식하는 문구에 그리스 신화의 인물 '프로메테우스'가 들어 있다. 원전인 그리스어에서 프로메테우스란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제우스가 감추어 둔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줌으로써 인간에게 맨 처음 문명을 가르친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불을 도둑맞은 제우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판도라(Pandora)라는 여성을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에게 보냈다. 이때 동생인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는 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 사건이 일어나고, 인류의 불행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비밀을 제우스에게 밝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코카서스(캅카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은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를 토대로 저자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는 현재 도전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올바른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10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어에서 언급한 10가지가 각 장에 하나씩 배정된 셈이다. 즉 비판성 가제 혹은 공인된 이론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우선 이 책의 각 장의 제목을 보면 마르크스주의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가설이나 비판성 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독자가 임의로 번호를 붙여 나열해본다. ① 마르크스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② 마르크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다 ③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 아니다 ④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다 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환원론이 아니다 ⑥ 마르크스는 기계적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⑦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강박증이 없다 ⑧ 마르크스주의는 폭력 혁명을 옹호하지 않는다 ⑨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 ⑩ 마르크스주의는 급진적 운동에 기여했다 등이다.

저자는 이번 개정판 〈서문〉의 첫 문장을 "2011년 이 책이 출간된 후 마르크스 사상은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 극적으로 확인되었다."고 썼다. 마르크스가 이루려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정부가 실패했다고 공감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저자는 무거운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저자가 마르크스를 보는 시각은 평등과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전제를 목표로 착각하는 데서 온다고 강조하는 듯 보인다. 저자는 이어 쓴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자유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 영역과 이른바 '시민 사회'(사회적·경제적 존재를 의미하는)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 영역, 예컨대 투표함에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고 자율적이며 각각 한 표로 집계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실제적인 분열과 불평등, 그리고 종속성을 은폐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이런 조건들로부터 정치적 차원이 추상화되어 시민들이 스스로 창백한 가짜 인간(simulacra)이 되는 것과 같다 민주적인 자치정부가 시민 사회 자체-예를 들어 노동자의 자주관리-로 확장되어야만 그 간극이 좁혀질 것이다."(p.5)

즉 마르크스에게 자유민주주의 정치 영역은 완전히 실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 책 출간 이후 서구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단지 정치 그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좌파가 아니라 우파의 포퓰리즘이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모순의 한 극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사실 저자는 2011년 초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로 알려진 역사적 대상의 정체-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법칙으로 작동되며 어떻게 종식될 수 있는가-를 최초로 규명했다"고 밝혔다. 뉴턴이 중력 법칙으로 알려진 보이지 않는 힘을 발견하고, 프로이트가 무의식으로 알려진 보이지 않는 현상의 작용을 밝혀냈듯이, 마르크스도 우리 일상생활의 이면을 파헤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알려진 감지할 수 없는 실체를 드러냈다고 저자 이글턴은 말했다. 이 방면에서 보여 준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의 비범한 풍부함과 생산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르크스주의 유산에 나란히 놓여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게 저자 자신의 생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소외, 사회적 삶의 '상품화', 탐욕과 공격성과 무분별한 쾌락주의와 점점 확산되는 니힐리즘 문화, 인간 실존에 대한 의미와 가치의 꾸준한 내부 출혈 같은 문제들에 대한 지적 노의 중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크게 빚지지 않은 것을 찾기란 어렵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1장 「마르크스주의는 끝나지 않았다」의 발제문은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공장과 식량폭동, 광부와 굴뚝청소부, 만연한 빈곤과 집단 노동계급의 세계와 어떤 관련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점차 계급이 사라지고, 사회적으로 유동적인 후기산업 사회와 분명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너무 완고하거나 겁이 많거나 착각에 빠져서 세계가 영원히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의 신념이라고 지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사회계급론은 21세기 탈산업화시대엔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다는 일반적이 비판이 거세다. 이 비판에 대해 이글턴이 말하는 역비판의 핵심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역사 체제 가운데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이 체제에는 이상하게도 정태적이고 반복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자본은 여느 때보다 더욱 집중되고 약탈적이며, 노동계급은 양적으로 늘어나고, 부와 권력은 엄청나게 불평등하며, 국가는 점점 억압적으로 되어 갔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내적 모순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거의 두 세기 동안 성찰하고 비판해 온 문제들이다. 그러므로 자분주의 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1장의 요지이다.

독자는 '마르크스'나 '공산주의'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대학 시절 접한 적이 없다. 당연히 그럴 것이 군사독재 시절 공산주의나 마르크스에 관한 책은 북한의 김일성 사상의 책과 다름없이 금서로 지정돼 출판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서 가운데는 언급한 내용 이외에 중국 공산당이나 마오쩌둥 사상도 금서였고, 심지어 우리 반체제 인사들이 저서 가운데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쓴 책은 쉽게 읽을 수 없었다. 90년대 군사독재가 끝난 무렵에야 상당히 자유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실패한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회 비판 여론에 의해 관련 책은 잘 출판되지 못했다. 이젠 팔리지 않아서 출판사 측에서 출판을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군부독재를 거치고 나서야 이념이나 사상 면에서 크게 자유스러워졌다. 거기에 혼신을 다해 산업화에 매진한 세대들은 OECD 가입, 금융실명제, 해외 여행 자유화 등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행복한 느낌을 만족해 했다. 그러나 지나친 과신이었을까? 다시 교과서에서나 듣던 IMF를 겪고 나서야 현실 경제, 자본주의 경제 등이 걱정하던 부익부빈익빈의 부정적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행히 온 국민이 함께 IMF 위기를 극복하고, 스포츠 부분에서의 도약, 국가 경제력 강화 등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틈내서 읽은 책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허점과 부정적인 면을 하나둘씩 깨닫게 해주었다. 아직 사회주의 체제에 머무르며 국방력만 강화하는 북한, 부분적 경제 개방 정책으로 30년만에 국가 경제력 2위로 올라선 중국, 연방체제는 무너졌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미국과 맛서고 있는 장기 집권하고 있는 푸틴의 러시아 등의 소식은 우리의 경제력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글턴의 저서 중 『더 리얼 씽』이란 문학비평서를 읽은 기억이 있다. 이글턴은 『더 리얼 씽』에서 '미(美)'라는 것이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한 부르주아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 '미'의 범주가 현대 유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예술이 부르주아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의 핵심에 놓이게 되면서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회적인 삶의 현상은 사물화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전통적인 철학의 개념인 정체성 개념은 더 이상 가치에 관한 담론들의 적절한 출발점이 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 따라서 그러한 담론은 관념주의적인 것이 되고 만다. 가치라는 것은 그 자체에 기초를 두거나 직관에 의거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데, '미'의 개념은 그 두 가지 방식에 중요한 모델이 된다는 등의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문학을 평가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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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공허한가 - 문제는 나인가, 세상인가 현실의 벽 앞에서 우리가 묻지 않는 것들
멍칭옌 지음, 하은지 옮김 / 이든서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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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는가? 누구나 한 번쯤 성찰을 겸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자신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이유를 살펴볼 때도 필요한 질문이다. 이 책 『우리는 왜 공허한가』는 사회는 갈수록 풍요롭고 인간에게 편리한 각종 재화를 제공하는데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불만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물론 각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적용해 산출할 방법은 없다. 즉 우리가 주로 느끼는 마음의 병이라고 일컫는 우울, 불안, 불만, 공허감, 무관심 등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짚어내는 데는 이유가 같을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에 비해 무기력감(공허감)을 느끼는 빈도가 잦고,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개는 현대 사회가 예전에 비해 빠른 속도로 변하고 복잡해진 데 따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근·현대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지나치게 빠른 사회 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워 부정적 감정이 오래 쌓이다 나타나는 것이란 해석이 일반적이다. 이는 의학자나 심리학자들도 과학적으로 분석해낸 일이니 굳이 부정할 이유가 없을 터다. 

이 책은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개인의 어려움을 조명하며,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효율성과 생산성에 초점을 맞춘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도구화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책임은 모호해진다. 돈과 외모가 본질보다 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인간과 삶의 의미가 변질되고, 자아 중심적 삶과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개인은 분열과 갈등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저자 멍칭옌은 풀이한다. 저자는 중국 정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대 사회학의 유망한 학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현대인이 직면한 부조리에 대한 그의 예리한 분석과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이 책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손꼽힐 정도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가 직면한 13가지 문제를 화두로 삼으며, 편안한 대화처럼 이야기를 건네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구체적으로 현대인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본다. 게임 중독, 외모 강박, 탈맥락화, 알고리즘의 지배, 우울감에 갇힌 일상, 도구로 전락한 집, 물질적 욕망의 과잉, 고령화와 같은 현대 사회의 구조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현대인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그 책임을 타인과 시스템에 떠넘기며 무력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자는 타고난 재치와 예리한 통찰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독창적 판단과 해석에 그치지 않고 뒤르켐, 베버, 푸코 등 세계적 석학들을 논의 속으로 소환해, 함께 문제의 본질을 탐구하며 깊이를 더한다.

현대인들은 왜 삶의 의미를 잃고 온라인 게임에 빠지며, 외모에 불안함을 느끼고, 내 집 마련에 집착하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다. ‘사회병리학’이라는 명칭으로,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책은 단순히 학문적인 연구 성과를 나열하는 대신, 앞서 언급한 우리의 일상과 직접 맞닿아 있는 13가지 사회 현상을 탐구한다. 저자는 현대 사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외모 강박, 알고리즘에 잠식된 일상, 끊임없는 소비 욕망, 스마트폰 중독 등 현대인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낱낱이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 그리고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사회학이 제시하는 관점과 통찰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안경’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각자가 자신의 방식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저자는 현대인의 삶이 복잡한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한계 속에서 갈등을 겪는 현실을 짚어내며, 이러한 문제를 사회학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균형을 찾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저자와 함께 문제를 탐구하다 보면, 저자가 ‘나의 행복에 함께 기뻐하고, 나의 슬픔에 함께 울어준다’는 깊은 공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책의 〈추천사〉를 통해 중국 정법대학 정치학과 리쥔 교수는 "나와 내가 속한 사회의 문제를 열심히 생각한다고 해서 당장 해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치열하게 고민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르다. 이것이 과연 나에게 정말 문제인지, 그게 만일 문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결하고 벗어나야 하는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삶은 천지 차이"라고 전제한다. 

추천사에 따르면 게임 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뭘까? 게임의 매력이 도대체 무엇인지 중독된 사람도 잘 모르고 중독되지 않은 사람도 잘 모른다. 사이버 폭력이 쉽게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인이 야만적이어서? 아니면 사이버 공간에서 우리가 쉽게 야만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이것은 과연 우리의 문제일까, 아니면 인터넷의 문제일까? 이건 나의,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자 시스템의 문제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로 사회 체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견해가 담겼다. 저자는 사회학의 '3대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은 물론 미셸 푸코, 노베르트 엘리아스, 피에르 부르디외, 게오르그 짐멜, 장 보드리야르와 같은 사회학의 거장들, 그리고 겸직 사회학자로 활동했던 알렉시 드 토크빌, 지그문트 푸로이트, 귀스타브 르 봉 등의 유명 인사들을 책 속으로 초대해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탐구한다. 리쥔 교수가 쓴 〈추천사〉에는 근·현대의 저명한 사회학자들이 이름이 열거된다. 이 책이 그만큼 우리 사회 현상의 깊은 곳까지 다루고 있다는 반증이다. 다만 독자들이 이 책을 앍는다고 자신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며 그냥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모범답안'은 아니더라도 해결의 열쇠를 쥘 수도 있다는 말을 암시하고 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사회학을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이 책은 복잡한 수학적 모델이나 추상적인 이론을 내려놓고,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어떤 문제되는 사회 현상이 일어난다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에 대한 답은 대부분 "나의 잘못이 아니다."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주장한다면 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하는 원인은 태어난 가정, 거시적인 정책, 주변 사람들이다. 흔히 '집에 돈이 없어서', '전체적인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서',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는데"라는 물음은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부정문과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이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그저 무기력하게 그 상황에 항복하고 싶지 않은 두 마음이 동시에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마음이 희망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만, 또 근심 걱정의 원흉이 되기도 한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더 높은 곳을 향해' 가라고, 이로써 신성한 자아의 가치를 실현하라고 채근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에서 참혹한 현실을 경험하고 이내 좌절한다. 그렇게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와 의미 없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사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다른 대상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외침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움직이는 기본적인 로직에 관한 읊조림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 사회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과 같다. 이 시스템은 매우 복잡한 분업 체계를 통해 돌아가는데 '효율화, 규격화, 전문화'된 것이 특징이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전례 없이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 지식, 지식재산권이 곳곳에 넘쳐난다. 이런 현상으로 현대 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첫 번째 특징은 '사람의 도구화'다. 복잡한 분업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업무의 중복성(전문성) 때문에 존재의 의미를 가끔 상실하기도 한다. 현대 시스템에서 사람들은 무언가에, 누군가에게 필요한 '도구'로서의 운명을 살아가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전 사회적인 '소외화'다. 소외화란 그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현대 사회는 뭐든지 '돈'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것이 단지 '절대적인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같은 이치로 현대인은 직업과 교육, 심지어 결혼과 가정의 존재 의미와 본래의 목적을 다르게 이해한다. 이렇듯 본질이 변질된 세상은 모든 것이 '실용성'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며 이런 상황에서는 '도구'와 '목적'의 자리가 종종 뒤바뀌거나 엉뚱한 위치에 놓이기 일쑤다. 세 번째 특징으로 저자는 '모순과 분열'을 꼽는다. 현대인은 그 어떤 시대보다 '신성한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아실현',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며, 그것이 성공하는 인생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살다 보면 내 능력과 의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렇듯 이론적인 '이상'과 현실의 '한계'가 동시에 나타나는 삶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심각한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무한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일단 현실을 보면 이 '전능한 개체'는 삶의 곳곳에서 위축됨을 경험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개인의 의지와 역량을 제한하는 것일까? 저자는 간명한 열쇠를 내놓는다. 한계는 '사회'와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로 인함이다. 태어난 가족이 그 이유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류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집'과 '가정' 때문에 삶을 제한 받는다고 한다. 제도와 환경을 이유로 꼽는 사람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지닌 규칙과 질서 때문이라고 탓한다. 모순적이다. 모순적이란 말은 역설적이게도 현대 문명의 도래로 생겨난 학문 체계, 즉 사회학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운명과 관련 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뒤르켐이 강조했던 것처럼 인류는 현대 문명의 시작으로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들어섰고, 앞에서 언급한 '사회 분업화'가 본격적으로 탄생했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소외화' 현상과 '물신숭배'는 이제 현대인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렸다. 도구적 이성이 만들어낸 '이성의 새장'을 염려했던 베버의 예언처럼 '시스템 안에 갇힌 노동자'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렸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은 3부 1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추상의 시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2부 〈현대인의 공허, 그리고 그 너머〉, 3부 〈존재의 가벼움, 관계의 무거움〉 등이다. 13개의 장에는 「현대인의 공허」, 「게임 중독의 심리」, 「‘알고리즘’-디지털 식민지」, 「21세기의 ‘파놉티시즘’」, 「사이버 폭력」, 「외모의 올가미」, 「‘도장 깨기’ 식 여행」, 「우리가 짊어진 시대의 짐, 집」, 「잔혹한 상아탑의 현실」, 「소비주의-현대 사회의 민낯」, 「고령화와 시스템의 위기」, 「우울은 인류 사회의 전염병」, 「무의식중에 자꾸만 하게 되는 비교」 등을 다룬다. 

우리는 종종 불안과 혼란 속에서 자신의 문제가 너무 특별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책은 개인의 문제가 곧 사회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현대인의 고단함과 좌절은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겪는 현상임을 이해하게 된다.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 책은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 자신의 삶을 통찰하고 싶은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 그리고 당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이 친절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 : 멍칭옌

중국 정법대학 사회대학원 박사 지도교수. 2003년 난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후 중국 정법대학과 칭화대학에서 각각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4년 7월부터 지금까지 중국 정법대학 사회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표작 『원류: 사물의 기원과 발전』이 중국 대표 온라인 서점 당당왕에서 사회학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팟캐스트 ‘동창시땨오’에서 「사회병리학」, 「산하기」 코너의 패널로 활동 중이다. 오디오 플랫폼 ‘히말라야’에서 진행하는 「인문 교양 상식 100강좌」의 사회학 코너를 담당했으며, 팟캐스트 ‘칸리샹’의 「현대세계 500년: 무엇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는가」의 시즌1 강의를 맡아 진행했다.


역자 : 하은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국제회의 통역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삼성전자 중국 법인에서 동시통역사로 일했으며, 국내 유수 기업에서 출강 및 기타 번역, 통역 업무를 담당했다. 사랑하는 남편, 두 딸과 긴 중국살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중국어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말하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 『가장 빛나는 나이에 싸구려로 살지 마라』, 『기분 좋은 말투 품격 있는 말투』,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청소년 논어』, 『밥 먹여주는 경제학』,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경제학』, 『상위 1%는 빨리 걷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8가지 일에만 집중하라』,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라』, 『감정대화』, 『하버드 인맥 수업』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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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보다 재미있는 디자인
최경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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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미술보다 재미있는 디자인』이 독자의 관심을 끈 이유는 '미술'과 '디자인'이 태생은 같다는 점에서 설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상업 미술의 영역에서 출발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사실 이 두 용어는 거의 같은 의미로 시작했지만 미술이 디자인과 다른 점을 순수예술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디자인과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예술이냐, 상업 이미지냐의 문제였다는 점이다. 디자인이란 용어가 예술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디자인이 소비되는 곳에 중점을 두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19세기까지 디자인이란 표현이 예술의 영역에서는 낯설지만 구분되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기업이나 상품의 이미지를 홍보해야 할 필요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상업 혹은 산업 디자인이란 표현이 잘 쓰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사회에 접어들면서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본격 상업 이미지나 제품 이미지에 쓰이기 시작했다. 책의 저자 최경원도 같은 맥락에서 디자인이 출발했다고 말한다. "디자인은 대부분 기업의 이미지나 광고, 패키지 등 상업적인 공간 안에서 상업적인 기능을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친근하면서도 재미있고, 상업성을 넘어서는 뛰어난 가치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미술 작품 못지않게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p.5)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디자인을 살피다 보면 디자인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실험적이고, 예술적일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저자는 이를 통해 대중에게는 디자인의 예술적 매력을, 디자인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들에게는 디자인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영감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서양에서 미술과 디자인은 둘이 아닌 하나였다. 미술이 디자인과 분리되어 고고한 예술의 세계를 지향하게 된 것은 폴 세잔 이후 현대 미술에서부터였다. 20세기 들어서는 미술이 순수의 꽃을 한껏 피우면서 지금까지 음악이나 문학 등과 더불어 중요한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는 동안 미술과 분리되었던 디자인은 자본주의 사회가 본격화하면서부터는 상업성의 첨단에서 더욱 세속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나아가 상업성이 오히려 디자인의 주체적 가치가 더 지켜지고, 예술이 되지 않을수록 사회적 공헌이 커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디자인과 미술의 극명한 차이는 20세기 들어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 더욱 부각됐다고 저자는 지목한다. 바로 '대중의 엘리트화'이다. 세속의 중추가 되는 게 대중이라 할 수 있는데, 20세기 후반부로 갈수록 대중은 예전의 왕족이나 귀족들보다 더 뛰어난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었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자본이 독점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견제하기도 하고, 복지와 사회적 불균형을 지적하면서 더 이상 세속이 세속으로 머물지 않게 만드는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세속에 머물러 있는 디자인에도 당연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실 속에서 이런 대중과 함께하다 보니 디자인도 자연스럽게 질적으로 발전하고 변모하게 된 것이라고 저자 최경원은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뛰어난 교양과 취향을 가진 대중의 성향에 맞추면서 디자인도 순수미술 못지않은 가치를 표현하고 대중을 가치로 감동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순수미술이 초월적인 예술의 세계에 머무는 사이에 현실 속에서 뛰어난 예술성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디자인이 미술보다 더 뛰어난 예술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미술과 비슷하게 시각적인 언어로 가치를 표현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인에서 그것을 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을 증거로 내세운다. 디자인은 대부분 기업의 이미지나 광고, 패키지 등 상업적인 공간 안에서 상업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친근하면서도 재미있고, 상업성을 넘어서는 뛰어난 가치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미술 작품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의 그래픽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일본의 그래픽 디자인은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경쟁력도 있고, 예술적 가치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디자인의 예술적 가능성을 확인하고, 디자인적 감동을 즐기는 데 아주 적합하다. 저자의 이같은 주장은 일본 문화나 일본 문명 자체를 크게 평가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주장하기 어려운데도 오랜 시간 디자인 연구를 해온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해준다. 실제 일본의 디자인 수준을 알지 못하면서 피해 의식인지 보복 심리인지 일본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하류 취급하는 독자에게 충격을 주기까지 한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미니멀함에 담긴 풍성한 가치〉, 2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디자인〉, 3부 〈시각언어의 힘〉, 4부 〈깊은 문화적 향기를 가진 디자인〉 등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에는 일본의 디자이너와 디자인 작품을 설명하면서 일본 디자인의 발전과 변화를 짚어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 디자인을 살펴보다 보면 디자인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실험적이고, 예술적일 수 있는지 이론이 아니라 직접 보면서 느낄 수 있다. 이를 통해 디자인이 미술품 못지않게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려주며, 디자인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들에게는 디자인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영감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저자는 집필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어엿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요즘 정치권의 느닷없는 비상사태로 국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충분히 극복할 힘과 능력이 있는 국가로 국제 사회는 전망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 다소 진정되기는 한 듯하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현실 때문에 내부적으로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한 나라의 규모의 경제가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고 자긍심과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고맙기만 하다. 이 책은 디자인과 미술, 그 중에서도 디자인(일본의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책을 펼쳐 일본의 디자인에 관한 책이라는 점을 확인했을 땐 다소 실망하기도 했다. 독자 개인적으로 과거 우리가 일본에 당한 수치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가 우리보다 못하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야 할 듯하다. 과거에는 문화의 주도국이 중국이었고 대륙 끝에 있는 우리와 바다 건너 일본은 교통과 지형의 거리만큼 우리가 앞섰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무인정치를 했던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나서면서 일본은 근대화가 우리보다 수십 년 앞섰다. 그들은 서구 특히 대영제국의 문화를 배우고 학문도 익혔다. 근대화가 빨랐고 동양에서 유일한 선진국 대열에 일찍 들어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옛 생각만으로 우리보다 뒤진 문화 수준이란 말은 그야말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식일 터다. 이 생각은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디자인은 미술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디자인이 가장 필요했던 분야는 예술적 의미보다 상품이나 브랜드 가치를 올리려는 기업들의 요구에서 크게 확대되고 발전돼 온 사실도 분명한 듯하다. 미술이 디자인과 분리될 때 미술은 순수미술로, 상업성 디자인은 예술 분야에 끼워넣지 않았을 것이란 말도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미술도 현대에 들어 사실적 그림보다는 도형이나 이미지 또는 느낌을 화폭에 담는 흐름에 들어서서는 디자인과 분리할 수 없는 모습을 띠고 있다. 디자인이 순수미술의 흐름을 따라간 것인지, 미술이 디자인처럼 변해간 것인지는 일반 독자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예술을 소비하는 대중들이 디자인도 예술이라고 느끼는 한 그것은 예술이 되는 현대에 구분할 이유는 없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런 인식에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 더 쉽게 이해되고 의미 파악에도 그림 감상 못지않은 즐거움을 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는 「디자인은 재미있다」란 제목의 〈서문(들어가며)〉에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어떤 디자인이 좋은 것인가?」, 「왜 디자인이 미술보다 더 재미있을까?」, 「일본 그래픽 디자인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 「앞으로 디자인은 어디로 나아갈까?」, 「즐거운 디자인은 쉽지 않다」란 소제목으로 구분해 디자인의 이해를 돕고 있다. 미술은 물론 디자인에도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서문〉만으로도 초보가도 읽기 쉽게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수미술과 디자인의 차이, 굿 디자인, 디자인이 재미있는 이유 등 디자인의 이해를 충분히 돕고 있다. 「어떤 디자인이 좋은 것인가?」에서 저자는 기능이 뛰어난 디자인을 좋다고 하는 것은 기능이 주는 만족이 다른 것에 비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쓸모 있는 물자가 부족할 때 대개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하는 저자는 기능주의 디자인은 물자가 부족한 저개발 상태나 개발도상국일 때 많이 선호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가 선진국에 들어서면 기존의 디자인의 정의는 정당성을 잃고 새로운 정의로 빠르게 전환한다고 설명한다. 

물자가 풍족해서 삶을 편하게 해주는 디자인이 많아지면 기능적으로 좀 불편해도 기능 이외의 다른 가치를 원하게 되는 인간의 예술의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보면 욕구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란 설명을 덧붙인다. 즉 실용적이지는 않아도 가치가 있는 디자인이 중요해지는 이유를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미학적으로 말하자면 효용성보다는 미적 감흥이 중요시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디자인이 미술보다 더 재미있을까?」. 책에 따르면 순수미술은 화랑이라는 특정한 공간 속에서만 작동하는데 디자인은 일상생활 곳곳에서 우리의 삶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디자인이 미술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그만큼 재미있고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디자이너가 좋은 디자인을 많이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중이 자신의 삶 속에서 재미와 예술을 원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화랑에 있는 작품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서 표현되는 예술성에 환호를 보낸다. 그러니 다자인이 미술보다 재미있어 보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한 가지 독자의 눈을 끌었던 부분은 일본 디자인의 수준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디자인에서 회화와 비교되는 것이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픽 디자인은 상대적으로 제작이 용이하기 때문에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고차원의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들이 큰 문제 없이 바로 표현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러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그래픽 디자인이 시대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디자인 전 분야 중에서도 앞서나간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 그래픽 디자인은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매우 현대적인 그래픽 디자인 스타일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세계 그래픽 디자인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문화적 정체성이 분명하다는 것. 오랜 역사와 독자적인 개성, 국제적인 인지도, 디자이너의 경쟁력 등 여러 면에서 오래 전부터 세계적인 인정을 받아왔다 까닭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디자인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현실을 지적한다. 저자 역시 근대 이후 형성된 좋지 않은 관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가 배제된다면 문화적으로 우리와 일본의 위치가 다를 이유가 없다는 저자의 지적은 감춰진 채로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듯하다. 독자는 이런 현실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와 맞닿아 있다고 이해한다. 이 책에는 일본의 저명한 디자이너와 작품이 적지 않게 소개된다. 대부분 20~21세기 일본의 디자인을 대표하는 작품과 디자이너들이다. 독자의 관심을 가장 먼저 끌었던 작품은 깔끔한 술병 디자인이다. 토 타쿠 작(作) 「TAKARA SHOCHU SUPER JUN」이다. 디자이너 토 타쿠의 소주 술병 디자인 작품으로 보인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하고 정갈한 술병의 모양이 안에 들어있는 술을 마치 새벽의 이슬같이 깨끗하게 느끼게 해주는 패키지 디자인이다. 옆에서 보았을 때 각이 진 둥근 병의 모양은 청결함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는 듯한 긴장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병에 최소한의 라벨만 붙여 놓아서 병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맑고 투명한 느낌이 최대한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정갈함, 청결함은 동아시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중요한 미학적 가치로 여겨졌다. 더없이 맑고 깨끗한 자연에 대한 지향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의 미학이 지향했던 가치였다. 그런 자연의 순수하고 청결한 가치를 편안하고 수수하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된 상태로 지향하거나 보존하려는 경향은 일본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술병의 디자인은 동아시아적인 미감에 입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본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p.43)

흰색 사각형에 검은색 글자들이 줄을 맞추어서 배처럼 되어 있는, 긴장감 넘치는 라벨의 디자인도 심플하면서도 순수한 청결함에 대한 긴장된 지향을 잘 보여준다. 그냥 보면 단순한 모양의 술병이지만 이 안에는 동아시아적인 미적 가치와 일본적 미적 가치들이 녹아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심플한 디자인이 단지 심플함에서 그치지 않고, 깊은 미적 가치를 환기하고 있다.


저자 : 최경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디자인학부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등에서 한국 문화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2010년에 현디자인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 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디자인 브랜드 ‘훗컬렉션’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의 비밀 우리 미술 이야기』(전3권) 『끌리는 디자인의 비밀』『Great Designer 10』『디자인 인문학』 『알레산드로 멘디니』『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 Good Design』『디자인 읽는 CEO』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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