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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2 ㅣ 조선 천재 3부작 3
한승원 지음 / 열림원 / 2024년 11월
평점 :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우리 역사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실학자로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가 우리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귀양살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귀양살이는 그에게 깊은 좌절도 안겨주었지만, 최고의 실학자가 된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고 '다산 연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다산의 학문과 사상은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성실'을 제일로 친 사람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평생을 통하여 중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탄생한 것이다.
“사실에 의거해서 진리를 찾는 ‘실사구시’의 삶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은 “인민의 영혼을 일깨워주는 꼭두새벽의 쇠북 소리”이자 “잘못 흘러가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주는 관개 사업”이었다. 1권 「유배지 장기에서」란 제목의 장(章)에서 저자 한승원은 유배지에서 다산의 '관개 사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선비의 사업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잉잉거리면서 꽃을 찾아가서 꿀고 꽃가루를 머금어다가 통 속에 저장하고, 애벌레를 먹여 키우는 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어여쁜 아가씨와 사랑에 깊이 빠지듯이, 책 저술하는 사업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자. 금방 날이 저물고 바미 짧았고, 배고픔과 추위도 잊을 수 있었다. 사약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1권, p.312)
다산은 “‘세상을 올바르게 경영하는 지표’, 즉 가장 진실한 예”를 쓰고 싶어 했고,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신실한 의지였다. 남인이었던 정약용을 노론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주던 정조가 승하하자, 정약용은 한때 천주교에 이끌렸던 과거를 빌미로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 길고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을 보낸다.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예가 아니면 보지 않고 예가 아니면 듣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자기 성찰에 투철한 참 선비 학자” 정약용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 “기구하고 신산한 운명을 어떻게 무엇으로 이겨냈을까.”
저자 한승원은 정약용의 지난하고도 치열한 일생의 운명을 따라 짚으며 그에게서 “갇혀 사는 사람의 아프고 슬픈 절대 고독과, 그 고독을 이겨내려는 고귀한 분투와 꿈꾸기와 도학자의 여유”를 깨쳤고 정약용과 하나가 되어 그가 삶에서 품었던 꿈과 우정을 이 소설 작품을 통해 소생시킨다.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었지만,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된다. 승승장구하던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정계에서 배제되고 잊혀져 갔다. 사실 정약용은 관직에 나간 지 2년 만에 당색으로 비판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가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산시문집』 제4권에는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정약용의 시가 전해진다.
운기(雲旗), 우개(羽蓋) 펄럭펄럭 세상 먼지 터는 걸까 홍화문(弘化) 앞에다 조장(祖帳)을 차리었네
열두 전거(?車)에다 채워둔 우상 말(塑馬)이 일시에 머리 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龍?)가 밤 되어 노량(露梁) 사장 도착하니 일천 개 등촉들이 강사(絳紗) 장막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화관(于華館)으로 가셨을까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衣裳)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 모습 그대로 있건마는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 『다산시문집』 제4권
유배 생활 처음에는 천주교도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천주교인이라는 소문으로 나자 모두 정약용을 모른 척했다. 유배지의 어려움 속에서도 승려 혜장 등과 교유하고, 제자들을 키우며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담배 역시 유배의 시름을 덜어주는 벗이었다.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무른 곳이 사의재(四宜齋)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 기거하면서 예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과 목리의 이학래집으로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1,000여 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유교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의 이른바 주석 학문인 경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 2권에는 정약용과 혜장의 만남 이후 그들이 나눈 『주역』에 관한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바야흐로 주역에 심취해 있는 혜장은 선배 학자들의 주역론을 열심히 찾아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도와 낙서의 이론과 주자의 『역학계몽』도 읽은 듯, 그들의 이론을 자기 이론인 양 말하고 있었다. 무슨 책을 읽든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고, 선배 학자들의 결함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하고, 자기만의 특이한 주장을 펼 줄 알아야 하는데, 혜장은 『주역』에 관한 한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는 법인데, 그것은 그 도둑이 도둑질의 즐거움에 취해 있는 까닭이고, 취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도둑질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까닭이고, 아직 도둑의 도를 터득하지 못한 까닭이이고, 그 도둑의 성정이 주정적일 뿐, 이지적이고 창조적이지 못한 까닭이다. 이런 도둑질의 방법 여기저기에 허술한 점이 많으므로 쉽게 꼬투리가 잡히기 마련이다. 도둑으로서 도통하려면, 강희맹의 가르침을 익혀야 한다."(2권, p.147)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57세에 해배되어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해배되었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지냈던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자신이 지은 많은 저술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하기위해서였다. 초로의 나이에 더 이상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저술들을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경세(經世)의 길이었다.
이후 자신의 호를 다음 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즐겨 사용한 것 역시 그런 의미였다. 그는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해 “육경과 사서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고, 일표와 이서는 천하와 국가를 위함이니, 본말이 갖추어졌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육경과 사서에 관한 저술이 근본이라면, 『경세유표』와 『목민심서』·『흠흠신서』는 경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다. 해배 이후 학문적 교제를 했던 대상은 신작·김매순··홍길주·김정희(추사) 등 당시 저명한 노·소론계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정권을 잡은 노·소론계였지만 고정된 정론이나 학설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경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경세관을 펼쳐 나갔다.
정약용이 가진 국가개혁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국가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에서 그는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 종합된 개혁사상을 전개하였다. 정약용의 개혁안은 장인영국(匠人營國)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체국경야(體國經野)라 평가할 수 있다.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체국)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경야)을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이다. 『주례(周禮)』의 체국경야 체제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이 소설 작품 『다산 1, 2』는 「떠나가는 나그네」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아들이 읽는 그의 유언장 내용이 소개되면서 기어코 독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대부분의 유배생활인 관료로서의 생활과 평상시의 인격, 그리고 집안 식구들에 대한 세세한 관심과 애정은 그가 남긴 500권의 장서에 담기지 않았지만 저자 한승원의 이 소설 작품은 포착해 낼 수 있다. 유언장의 주요 내용은 자신의 주검을 염하는 방법부터 순서까지 자세히 적혔고 이에 필요한 수의의 옷감까지 일일이 지정할 정도로 긴 시간 읽게 한다. 그만큼 평소에 예(禮)를 중시하고, 유교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일상을 어김없이 철저한 성격을 분명하게 묘사하는 저자의 속뜻이 담겼으리라고 추측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물론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섞여 있고 절차에 대한 무지로 독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분위기만 보아도 독자들의 감동을 자아낼 정도로 저자 한승원이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란 추론까지 가능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산은 아들의 유언장 낭독을 하는 동안 숨을 거두며 육체에서 이탈한 혼이 천국에서 마중 나온 이들과 조우한다.
한 무리의 하얀 도포 차림을 한 사람들은 이벽과 정약전·정약종·이가환·이승훈·황사영·김범우·윤유일 등이다. 이벽이 다산에게 한 말이 오랫동안 독자들의 뇌리에 남을 명장편을 연출한다.
"정공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정공이 자리 잡은 새 세상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아래쪽에 강의 물너울을 거느린 거대한 천지 우주의 치마폭 같은 다산성의 세상 한복판입니다. 동암에는 서재가 있고, 서암에는 차실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는데, 암자의 주지가 곡차를 즐길 줄 아는 화통한 스님이랍니다. 이 초당에서 저술하며 사시다가 답답해지면, 암자의 주지하고 술 대작도 하시고, 밭도 일구시고, 저 아래로 내려가서 낚시질도 하시고······."(2권, p.307)
저자 : 한승원(韓勝源, 호 : 해산海山)
자신의 고향인 장흥, 바다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애환과 생명력, 한(恨)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작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교사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하다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목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뒤 소설가와 시인으로 수많은 작품을 펴내며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김동리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 한국 문단에 큰 궤적을 남겼다. 소설가 한강, 한동림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장흥 바닷가 해산토굴에서 집필중이다. 그의 작품들은 늘 고향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펼쳐진다. 그 바다는 역사적 상처와 개인의 욕망이 만나 꿈틀대는 곳이며, 새 생명을 길어내는 부활의 터전이다. 그는 지난 95년 서울을 등지고 전남 장흥 바닷가에 내려가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소설집 『앞산도 첩첩하고』 『안개바다』 『미망하는 새』 『폐촌』 『포구의 달』 『내 고향 남쪽바다』 『새터말 사람들』 『해변의 길손』 『희망 사진관』,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일』 『동학제』 『아버지를 위하여』 『까마』 『시인의 잠』 『우리들의 돌탑』 『연꽃바다』 『해산 가는 길』 『꿈』 『사랑』 『화사』 『멍텅구리배』 『초의』 『흑산도 하늘길』 『추사』 『다산』 『원효』 『보리 닷 되』 『피플 붓다』 『항항포포』 『겨울잠, 봄꿈』 『사랑아, 피를 토하라』 『사람의 맨발』, 『달개비꽃 엄마』, 산문집 『허무의 바다에 외로운 등불 하나』 『키 작은 인간의 마을에서』 『푸른 산 흰 구름』 『이 세상을 다녀가는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바닷가 학교』 『차 한 잔의 깨달음』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 시집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 『달 긷는 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이별 연습하는 시간』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꽃에 씌어 산다』 등이 있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