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의 슬기로운 생활수행
법상 지음 / 열림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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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법상의 슬기로운 생활수행』의 저자 법상은 책의 〈서문(프롤로그)〉에서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생각 속을 사느라고, 눈앞의 진짜 삶을 놓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꿈틀거리는 생생한 삶을 살지 못한 채, 생각이 만들어낸 가상현실, 가짜 삶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고 말한다. 여기서 '생각'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생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 생각의 드라마는 우리의 진짜 인생이 아니다"고 말한다. 내 생각으로 구현된, 내가 그림 그려놓은 가짜 드라마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과연 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옳고 그르고, 좋고 싫고, 혹은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났고 못났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생각으로 그림 그리듯 삶을 덧칠하지만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 완전한 삶이 드러난다. 그렇게 드러난 인생은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진부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것은 선물이 주어지는 것과 같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런 선물이다. 이 선물은 본래 우리에게 갖춰져 있다. 그러나 자기 생각 속에 갇혀 있는 사람, 생각으로 해석된 세상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해석은 나의 생각일 뿐이며, 행복은 상황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강조한다.

“스님, 더 많이 해야만 한다는 생각 없이 어떻게 살아가나요? 내가 지금 너무 가난하다는 생각이 있어야만 부자가 되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죠. 집착하지 않으면 열심히 살기 어렵지 않을까요? 집착하지 않으면 삶의 원동력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스님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일 것이다. 실제 도반들은 저자 법상의 법회에 찾아와 이 같은 질문을 쏟아낸다고 한다. 이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라고 단호히 답한다고 밝힌다. "그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분별(分別)을 강요하고, 삶에 대한 끝없는 덧칠을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희망하는 목표를 쉽게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아픔과 괴로움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내놓는다. 저자 법상은 부처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고통받던 실존적 존재였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 사랑포기, 취업포기, 양육포기, 노후포기에 이르기까지 상실이 일종의 습관이 돼버린 오늘의 우리들에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는 조용한 울림을 준다.

저자는 자기만의 잣대로 세상과 자신과의 사이에 선을 그어 분별함으로써 오히려 성취보다 포기를 자초하는 모순의 쳇바퀴를 돌고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을 통해 엉켜있는 집착의 끈을 과감히 내려놓으라는 목탁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아름다운 생활수행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저자 법상은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종교를 초월한 16만여 구독자와 오랜 세월 소통해왔다. 「하되 함 없이」의 핵심을 담았다. 매주 실시간으로 열리는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토요법회와 대원정사 일요법회는 매 회 1,000명 이상의 도반들이 온오프라인에 참여해오고 있는 마음공부 터전이라고 한다. 법상의 설법은 자상하지만 파격적이고, 쉽지만 강력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냉정하다고 알려져 있다. 법상은 법회에서 무엇을 하라고 도반들에게 지시하거나 규칙을 정해주지 않는다고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그의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저절로 괴로움이 쉬어가고 삶이 변화된다고 느낀다는 것. 법상은 우리가 부처에 기대게 하는 대신,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쥐어준다. 

이 책은 모두 6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괴로움은 생각으로부터〉, 2부 〈중도, 인연 따라 왔다 가는 것〉, 3부 〈여덟 가지 생활수행, 팔정도八正道〉, 4부 〈진실은 이미 눈앞에〉, 5부 〈삶을 놀이처럼〉, 6부 〈행복을 찾아서〉 등이다. "갓난아기들은 몸이 나 자신이라고 분별하지 않습니다. 그냥 바라볼 뿐이고, 소리가 나면 들을 뿐입니다."라는 주문(註文)을 내놓은 1부 〈괴로움은 생각으로부터〉는 「인생의 문제」 「마음이 만들어내는 환상」 「집착은 안목을 좁아지게 한다」 「생각과 분별이라는 망상」 「보이는 것이 진짜일까?」 등 5개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가 이 파트에서 다루는 문제는 우리들의 '삶'이다. 부처의 가르침 중에 '삶은 고통이다'는 것이 있다고 독자는 알고 있다. 저자는 삶의 고통에 대해 고통은 우리가 살면서 스스로 부여한 의미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부처의 말을 풀어 전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부여한 의미에 의해 고통받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 의미 있고 의미 없는 것, 고귀한 일이 있고 고귀하지 못한 일이 있다(?)는 말은 스스로 부여한 의미에 의해서 분별되고 그것이 자신에게 속한다고 믿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목탁 소리는 청아하고 듣기 좋은 소리라고 여기기에 듣기 좋고 오히려 고통을 완화해주고, 윗집 쿵쾅거리는 소리는 짜증나기 때문에 죽일 듯한 증오심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우리가 증오하고 싫어하는 것들의 가장 큰 원인은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도 전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때 스트레스는 분별심이 원인이라라고 짚어낸다. 분별심은 진실이 아니라란 말도 덧붙인다. '부자다, 가난하다'라는 것, 그것은 망상이라고 말한다. 분별에는 항상 망상이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분별망상. 이 두 가지를 한 단어로 쓰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는 '나는 괴로워'라는 말은 '나는 다른 사람보다 돈이 없어 괴로워.'란 말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옳은 게 아니고 분별일 뿐이라고 밝힌다. 분별과 집착에 빠지면 삶은 괴로워진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나는 가난해. 가난한 게 확실해. 내 인생은 비참해.' 등의 생각을 믿었단 말이다. 전혀 믿을 필요가 없는 분별심에 불과한 것을 진짜라고 여기면서, 사람들은 자기를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에 고통에 휩싸이게 되는 것임을 부처의 가르침을 전한다. 

이는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삶 자체가 그렇게 시스템화 되었다고 저자는 이해하는 것 같다. 저자는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많은 사람과의 비교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기준점으로 잡은 그 사람만큼은 내가 부자가 돼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앞만 보고 쉴 새 없이 달려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쉬는 건 곧 인생에서 뒤처지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사는 이유이다. 사실은 쉬어야만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내면이 쉴 때, 분별이 쉴 때, 올바르게 진리를 체득하는 무분별지(無分別智)에서 근원적인 지혜가 드러나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분별지만 지(智)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불교와 기독교와의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점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근원적인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삶을 보내주셨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라고 주문한다. 즉 자기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생각은 하되 생각을 믿지 마라. 집착할 것이 있으면 집착은 하되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마라. 마음을 내긴 내되 결과에 대해선 완전히 하늘에 맡겨버리라고 가르친다. 이게 '내맡김'의 자세이다. 삶에 맡긴다. 우주 법계에 맡긴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복과 지혜의 씨앗을 뿌리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통해, 열심히 연구하고 계획하고 일하는 것을 통해서 삶을 100%로 살아가는 게 지혜를 닦아가는 것이라고 지혜로운 삶을 저자는 강조한다.

1부 4장 「생각과 분별이라는 망상」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아(無我)'다. "이게 내가 아니다. 인연 따라 잠깐 인연이 화합된 것뿐이다. 부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이게 진정한 내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크다거나 작다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자기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저자의 풀이가 필요하다. "마하라는 것은 법(法)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 법이라는 말을 초기 불교에서는 다르마라고 했다. 선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 법이 마음이다. 또 본래 면목이라고도 한다. 본래의 진정한 자기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의 본래 면목, 그대로 이것을 다른 말로는 진정한 자기라고도 한다. 진정한 자기의 본래 면목. 진짜 내가 누구냐가 핵심이다." 독자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자어로, 한자어에서 다시 한글로 옮겨오는 도중에 비슷한 듯 다른 듯한 말의 성찬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부분이다. 아니면 독자가 불교 신자가 아니어서 알아듣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다시 저자의 해석에 기대어 본다. 

"마하는 진정한 자기가 누군지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는 크거나 작을 수 없다.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상이면 크다 작다라고 할 수 있다. 물건 같은 대상이면 크다 작다고 할 수 있다. 이건 크다 작다고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전부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애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법을 마하라고 한다. 자기 마음을. 사람들의 본래 면목은 어딘가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들어 있을까? 알 수 없다. 어디에 있는지"(p.54~55)

1부 마지막 장 「보이는 것이 진짜일까?」에서 괴로움에 대한 저자의 보충 설명이 이어진다. 부처가 설파한 정견(正見)은 있는 그대로를 보기만 하면 그것이 해탈이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자기 식대로 표상 작용으로 상을 취하고 모양을 그린 다음, 그 모양을 가지고 걸러서 바라본다고 지적하고 있다. 걸러진 모습을 가지고 좋다 혹은 나쁘다고 규정한다. 사실 우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못 본다. 이렇게 표상으로 걸러서 보는 마음, 그걸 허상이라고 한다. 헛된 망상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어진 해석에서 정치와 종교가 바로 우리의 관념이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지적한다. 비유하기 제일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멀쩡한 사람도 종교 하나에 빠져버리면 대책 없이 빠져든다. 상식도 안 통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극단적인 보수인, 극단적인 정치인을 모두 만나 봤지만 평소에는 멀쩡하고 무척 지혜롭고 자상하다. 그런데 정치 얘기만 나왔다 하면 극단으로 치우친 것을 자주 목격했다고 귀띔한다.

"그릇된 말은 아니데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그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발끈하기 시작한다고 에피소드를 전한다. "스님이 그럴 줄 몰랐다"고, "스님이 세상을 모른다"면서 정말 강렬하게 발끈한다고 말한다. 반대 극단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돌변해 버린다는 것. 특정 정치 세계나 특정 종교나 어떤 특정 견해에 치우쳐 있게 되면 '이 종교는 이런 것, 정단은 이런 것, 이쪽만 좋은 거야'라는 상을 스스로 취하고 있게 되면, 세상을 그 필터로 걸러서 본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그런 세상을 보는 필터를 가지고 그 필터만 옳다고 바라보는 것이다. 정치도, 정책도 다 그 필터를 통해서만 바라보게 된다고 여기서 밝히고 있다. '정견'이라는 부처의 가르침, 저자의 '필터론'을 통해 듣게 되니 비로소 부처의 가르침에 조금은 다가선 듯하다. 

3부 〈여덟 가지 생활수행, 팔정도八正道〉에서 정견(正見) 이야기가 다시 자세하게 설명된다.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견해, 바른 길이다. 경전 『중아함경』에서는 고(苦)를 소멸하기 위해서 또 무명을 끊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잠아함경』에서는 삼독을 끊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 『중일아함경』에서는 생사의 어려움을 건너기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고 저자는 밝힌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은 바르게 본다, 바르게 사유한다, 바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바른 직업을 갖는다. 이런 식의 이야기인데, 르다는 게 뭘까? 바르다는 것은 중도의 '중' 자와 같다. 중도적으로 보고, 중도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팔정도이다.

저자에 따르면 첫 번째 정견은 바르게 보는 바른 견해이다. 정견이 팔정도의 핵심이다. 정견은 어찌 보면 중도의 핵심이기도 하고, 팔정도를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면 이 공부는 바르게만 보면 완성되는 공부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인가? 분별로 보면 바르지 않게 보는 것이고, 무분별로 보면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무분별지'라는 표현도 쓴다. 이를 분별하되 분별하지 않는 지혜, 부처의 지혜인 반야지혜라고도 부른다. 저자는 분별하지만 않고 보면 이 세상에는 아무 일ㄹ도 없다. 삶은 이대로 완전하고 그냥 부처가 부처로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분별해서 보기 때문에 지금까지 중생으로서 허망한 삶을 되풀이해서 살았을 뿐이다. 분별하지만 않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자기 식대로 왜곡해서 보고 해석해서 보고 판단해서 본다. 정견은 무위법이라고도 한다. 전혀 애쓰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표제어에서도 나오지만 이 책은 '생활 수행'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을 모든 대중이 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속세의 일반 대중도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깨닫게 되면 누구든 부처가 된다는 불교에서의 오래된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지에 대한 수행자로서 도움을 주는 에세이다.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왜 멀리 떠나 명상해야 하고, 부처님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저자는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부처도 외로웠던 존재임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열반의 언덕으로 제도(濟度)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 제도해줄 수 없고, 그것은 부처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있는 그대로 일러준다. 부처의 힘에 기대어 깨달음을 얻으려고 집착하는 마음이 오히려 나와 부처를 둘로 나눠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나 자신이 곧 부처’라는 진실을 일깨운다. 나의 바깥에 있는 부처는 나를 깨닫게 하지 못하며, 바깥의 부처님은 형상의 부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부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진짜 부처는 누구일까? 법상스님은 바로 ‘자기 마음’이라고 명료하게 답해준다. 겉보기에는 스님들이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 놓여있으나, 오히려 우리들이 더 빨리 마음공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바깥을 향해 구한다면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일상 속의 자신에게 집중할 때 진짜 생활수행이 된다고 설파하고 있다.


저자 : 법상(法相)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서고금의 영성, 종교, 명상 단체와 역사 속 성자와 스승 등을 두루 찾아가 수행했다. 1999년부터 군승으로 재직하며 장병들에게 마음공부를 전했고, 인터넷 마음공부모임 ‘목탁소리’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예편하고 목탁소리 근본도량 상주 대원정사 주지로 있으며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로 14만여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를 공부하다가 발심 출가한 뒤 오랜 세월 깨달음을 찾았다. 불교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동서고금의 영성, 종교, 명상단체와 역사 속의 성자와 스승 등을 두루 찾았으며, 갈고 닦았고, 절망했다. 결국 돌고 돌아 방편을 뺀 초기불교와 선불교에 눈뜨면서 더 이상 찾지 않을 수 있었다. 스님의 설법은 자상하지만 파격적이고, 쉽지만 강력하다.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이 없음에도,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괴로움은 쉬고, 삶이 변화된다.

저서로는 『붓다수업』,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반야심경과 선공부』, 『금강경과 마음공부』, 『불교경전과 마음공부』, 『365일 눈부신 하루를 시작하는 한마디』,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날마다 해피엔딩』 등이 있다. 2005년에는 ‘한국문인’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유튜브채널: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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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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