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대지 - 간도, 찾아야 할 우리 땅
오세영 지음 / 델피노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김정호가 전국 방방곡곡을 도는 험난한 여정 끝에 지도를 만들었다는 우리가 위인전에서 읽은 내용에 기초를 두고 제작된 영화다. 김정호(1804~1866 추정)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조정(정부)이 해야 할 일을 개인의 의지로 이뤄낸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다. 19세기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역대 최고의 '지도쟁이'이자 '지도꾼'이다. 한반도를 지도 위에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지도를 통해 대중에게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실용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한국 지도의 발달사라는 관점에서도 그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영화의 내용은 김정호가 지도 제작을 위해 눈비를 맞고 배고픔에 허덕이며 전국을 누볐다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어느 선까지는 사실일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할 사업을 국가가 나서서 하지 않은데 개인으로서는 사비를 들여야 지도 제작이 가능했을 터, 김정호에게 그만한 돈이나 지위가 있을 리 없다. 그는 양반 계급이라면 으레 남아 있을 족보나 어느 기록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중인 계급의 이름 없는 사람이 지도 제작을 해낼 만한 재산이 있을 리 없다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나 김정호는 지도 제작이 평생 해온 직업이고, 따라서 지도 제작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지도에 미친 '지도꾼'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도 제작은 국가적 사업이다. 국가가 지도 제작에 나서야 제대로 된 지도를 얻을 수 있는 대형 국책 사업이다. 그것은 현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방과 국토 개발 등 큰 국가적 사업 등도 지도가 있어야 제대로 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토 전반에 대한 지도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개인이 나서서 다른 지도 제작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일 것이다. 만일 당시 조정에서 지도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관원이나 지리에 밝은 학자들을 충분히 동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그럴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조선은 국방에 관해서는 '0점'을 줄 수밖에 없는 국가인 이유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사대하는(섬기는) 한 나라가 망할 일은 없다고 믿는 국가가 조선이다. 사대주의가 국시로 돼 있는 조선이기에 지도의 필요성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500년 넘은 조선이 두 번의 외침에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국가 안보 차원의 지도마저 갖추지 않았던 나라가 조선이다.



김정호가 업적을 이룬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판단은 지금의 지리학자들도 짐작만 할 뿐이다. 그가 영화에서처럼 눈비를 맞고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전국을 누볐다는 이야기는 현재로서는 근거가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기반을 두고 있는 설정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이름을 남긴 곳은 많다. 당시 조선은 국가가 최고의 지도 제작에 필요한 인적·물적 기반과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에 개인이 쉽게 나설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김정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생 지도 제작을 생업으로 삼은 데다, 지도 제작에는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에 결국에는 〈대동여지도〉를 완성해 낸 인물만이 가능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김정호가 생각해낸 방법은 기존 지도를 확인하고, 자료로 활용했을 거란 짐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도의 제작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이 있었기에 자료 수집도 쉬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호는 국가가 생산한 기존 자료를 십분 활용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기존의 지도를 참조하고 보완 내지는 수정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도를 저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려낸 것이다. 사실 기존의 지도만 갖고는 조금의 지리적 지식을 더한다고 정확한 지도가 제작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당연히 당시 김정호로서는 구체적인 지리 지식을 담은 지리지의 도움도 빌려야 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기존의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의 도움을 더해 〈청구도〉와 〈동여도〉란 지도를 만들고, 나아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고 현재의 지리학자들의 추정이다. 김정호가 기존 지도와 더불어 지리지에도 많이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동여도지〉나 〈여비도지〉 같은 지리지를 집필한 데서도 추론 가능하다. 지리지를 많이 읽어보고 참고하다 보니 기존 지리지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고, 이에 따라 기존과 다른 새로운 지리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여행에 주로 의존하여 지도를 제작했다면, 지리지를 만드는 데 그렇게 공을 쏟지는 않았을 것이란 반대적 가설이 성립되는 이유다.

이 책 『잃어버린 대지』는 김정호가 그리고 쓴 지도와 책을 바탕으로 간도 지역이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자 하는 한 지리학자의 여정을 소설로 담아내고 있다.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가 백두산과 주변 지역을 상세히 조사하고 기록한, 그러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 제26권 「변방고(邊防考)」를 추적하며 겪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 『잃어버린 대지』는 우연히 미국에서 전해진 “리뷰 오브 코리안 보더(Review of Korean Boader)”란 영문 문서에서 그간 전설처럼 전해지던 「변방고」의 실체가 확인되면서 주인공 윤성욱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과연 「변방고」는 어디에 있을까? 또 어떤 내용이 쓰여 있길래, 왜 사라진 것일까.



『대동지지』는 김정호가 1861∼1866년께 편찬한 지리책으로 32권 15책이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대동지지』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2첩을 간행할 무렵 32권 15책의 필사본으로 전국 지리지이자 역사지리서이다. 김정호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 등 주로 지도의 제작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제작한 지리학자이며, 『대동지지』는 그가 마지막으로 편찬한 지리지이다. 현재 완질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 김정호의 친필본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이용해야 한다는 신념을 「청구도 범례」등 여러 곳에서 피력하였다. 지도는 한눈에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정보를 수록하는 데 한계가 있고, 지리지는 많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록할 수 있지만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호는 평생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동지지』의 가장 앞쪽에는 김정호가 참고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조선측의 자료가 43종이나 되고 중국측의 자료는 22종이다. 이는 김정호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했는지 보여주는 부분임과 동시에 조선의 지리지를 집대성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목차 다음 부분에는 대표적인 순우리말의 지명유래에 대한 소개와 한자로의 표기에 대해 기록해 놓았는데, 그가 참고한 상당수의 한자 지명이 원래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임을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국 지리지로는 경도(京都) 및 한성부(漢城府)가 1권, 경기도가 2∼4권, 충청도가 5∼6권, 경상도가 7∼10권, 전라도가 11∼14권, 강원도가 15∼16권, 황해도가 17∼18권, 함경도가 19∼20권, 평안도가 21∼24권까지 수록되어 있다. 하천에 관한 내용인 산수고(山水考)는 25권으로, 국경 방어에 관한 내용인 변방고(邊防考)는 26권으로 편제되었지만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수도인 한양에서 전국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를 정리한 정리고(程里考)가 27∼28권에 수록되어 있고, 28권에는 역참(驛站)과 관련된 내용인 발참(撥站)과 연변해로(沿邊海路)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총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한 방여총지(方輿總志)가 29∼32권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대동지지』 제26권이 「변방고」이고 내용은 없이 편제로만 남아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집필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잃어버린 대지』는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역사적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은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워 역사적 장면 사이사이에 개연성 있는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현대판 스토리로 풀어낸 역사 팩션(Fact+Fiction=Faction)이다.



현재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인식되고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영토였으며, 여전히 북간도 지역에는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 있다.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란은 조선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소설 『잃어버린 대지』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간도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조명하는 역작으로, 독자들에게 잃어버린 땅 간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묵직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간도 땅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1712년(숙종 38)에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에 있는 문구를 근거로 삼는다.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 중국(淸)과 조선의 국경은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으로써 분계선을 삼는다"고 새겨져 있다. 간도는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 곧 토문강 동남에 있는 땅이다. 여기서 토문강(土門江)은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송화(松花, 쑹화)강의 한 지류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후일 두만강으로 착각했거나 고의로 변경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조선 숙종 때 규정한 이후 '토문'은 우리 민족이 계속 살고 있고(현재까지) 중간중간에 국가간 영토 문제로 부각됐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이 간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지배했던 시절,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경선 재협약 등이 어우러지면서 애매해진 상태다. 이 때문에 『대동지지』 제26권이 「변방고」가 이 소설을 이끌고 가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저자 오세영은 책 뒷 부분에 있는 〈작가의 말〉을 통해 "간도는 1964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체결한 조중변계조약에 따라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두만강 너머의 북간도에는 지금도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전제한 뒤 이곳의 영유권 다툼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조중변계조약은 1909년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기초했고, 간도협약은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조선과 청나라가 국경을 정한 감계를 참고했다. 그리고 두 감계는 1712년의 정계비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밝힌다.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강을 두 나라의 국경으로 정했는데 토문강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간도가 조선 땅인가 중국 땅인가가 결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간도협약을 주도했던 시노다 지사쿠는 나중에 줄기차게 '간도는 조선 땅'임을 역설했다고고 한다. 지사쿠는 당시 통감부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이었으며 후일 경성제국대학 학장을 역임하는 저명한 일본의 역사지리학자이다고 덧붙인다.



소설의 주인공 윤성옥은 독일 홈볼트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한 지 5년째인 유학생이다. 홈볼트 대학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배출한 학교로서 사상과 철학 분야에서 명망이 높지만, 윤성옥이 전공하고 있는 역사지리학도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하루빨리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가지고 귀국해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를 꿈꾸는 유학 생활이 만만치 않다. 늘어나는 경비도 문제지만 대학 강단의 자리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이다. 지도교수 깐깐하기로 소문난 베른하르트와의 만남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철저히 준비해도 될까말까한 논문 심사의 날도 하루하루 줄어감에 따라 초조함은 늘어나지만 준비에 매진한다. 논문의 주제를 「리히트호펜이 동양지리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로 정했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1860년대 초반에 독일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동북아시아를 방문하고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고, 귀국해서는 여기 홈볼트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소설 속에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서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을 연결했던 실크로드는 바닷길이 열리고, 하늘길이 뚫려서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로와 함께 '신실크로드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문을 위한 자료집 독파를 하던 윤성옥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리히트호펜보다 먼저 일대를 조사한 사람의 흔적이다. 그 사람이 가진 자료의 방대함과 과학적인 조사에 리히트호펜이 크게 놀랐다는 내용이 윤성옥의 눈을 잡아 끈 것이다. 리히트호펜은 동북아시아 조사 때 "동쪽에서 온 지리학자"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었다. 동쪽에서 온 뛰어난 지리학자? 그가 누굴까. 당연히 서양학자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문맥으로 봐서 중국인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인? 하지만 자료에 적힌 1864년은 일본이 아직 중국에 진출하지 못했을 때다. 그럼 조선인? 윤성옥은 설마 하면서 자료로 눈길을 돌린다. 

동쪽에서 온 지리학자가 동북 3성 중에서 길림성 일대를 집중적으로 탐사하고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세밀한 조사와 과학적인 기법에 경탄했음을 리히트호펜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누구며 무슨 목적으로 길림성 일대를 탐사했을까. 히리트호펜이 감탄을 아끼지 않는 걸로 봐서 예사 인물이 아닐 것이다. 혹시 자세한 내용은 없을까. 강한 호기심을 느낀 윤성옥은?



이 소설의 특성상 윤성옥의 다음 행동은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글로서만으로도 어떤 내용일지 훤히 궤뚫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쓴 역사소설은, 혹은 팩션은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어떻게 꿰맞추느냐만 남아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니까. 또 저자 오세영은 팩션을 이번에 처음으로 쓴 것은 아니다. 이미 『베니스의 개성상인』, 『구텐베르크의 조선』, 『소설 자산어보』 등을 집필해 독자들의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작가 아닌가. 

그렇다고 내용에 대해 전혀 기술하지 않을 수 없어 페이지를 건너뛰어 책의 한 부분만 발췌해 여기에 싣는다. 


"도댜체 탐사자는 누구며 1864년에 백두산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그 의문은 다음 장에서 풀렸다. 탐사자는 국경표지석에서 정한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 청나라가 주장하는 강이 아닌 훨씬 북쪽의 강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적고 있었다. 

1864년······ 백두산······ 국경표지석······ 하면 '리뷰 오브 코리안 보더'는 정계비에서 토문강의 위치를 추적하는 탐사를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라면······ 아무래도 기리고차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기리고차는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가할 때 사용했던 도구로, 후일 실제 거리가 110.95km인 경도 1도의 거리를 108km로 측정했을 정도로 정확한 기구였다. 그리고 1864년은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와 짝을 이루는 대동지지를 저술한 해다. 하면 김정호가 토문강을 답사했단 말인가. 

"······!"

윤성옥은 터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잊고 있었던 리히트호펜의 논문이 떠오른 것이다.(p.81)


저자 : 오세영


195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경희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흩어진 기록을 모으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사서의 행간을 채우는 일을 즐겼던 오세영에게 역사를 이야기로 꾸미는 역사 작가는 잘 어울리는 직업인 셈이다. 오세영에게 역사는 내일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소설은 역사를 쉽게 풀어쓰는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그는 역사학계에서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문단에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러나 시대와 삶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소재를 발굴해서 독자들을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베니스의 개성상인』,『구텐베르크의 조선』, 『원행』, 『만파식적』, 『타임 레이더스』, 『화랑서유기』, 『포세이돈 어드벤처』,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콜럼버스와 신대륙 발견』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