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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슛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4년 4월
평점 :
『악플러 수용소』, 『노비 종친회』, 『평양골드러시』 등 표제어만으로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드라마로 제작 방영하겠다는 계약도 체결된 작품도 있다. 고호 작가의 소설에는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세상이 자주 등장한다.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문제를 상상 이외의 방법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고호가 늘 우리 사회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문학적 상상력을 높이기 때문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미 두터운 고정 팬을 이끌고 있는 고호의 신작 『레디 슛』이 또 한 번 독자들의 마음을 술렁이게 한다. 책의 표지화의 톤이 핑크빛 얼굴로 가득하다. 출판사 델피노 편집진과의 교감이 두터운 탓이리라. 강렬한 핑크빛의 얼굴은 어쩌면 탐욕, 욕망의 색으로 쓰였으리라. 거기에 주요 등장인물은 교도소이지만 참 재밌게 지낸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누구나 죄 지었기에 교도소 생활을 하지만, 모두가 재밌게는 지내지 못할 터 그들의 핑크빛 얼굴(가면)에 감춰진 욕망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탐욕의 붉은빛으로 변할 것이다. 작품 속 사건의 발단은 교도소로부터 시작되지만 책의 〈프롤로그〉는 새벽 2시 인천의 한 부둣가가 배경이다. 시간상 이 시간에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선량한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면모는 '신토불이'가 아니다. 동남아, 몽골, 러시아도 더러 섞인 데다 옷차림도 그만큼 다양하다. 공장 작업복, 트레이닝복, 고무 앞치마에 장화까지···. 예사롭지 않은 그들 앞에 나타난 검정 슈트 차림의 한 신사. 살인 등 강력 범죄의 냄새가 짙게 드리워진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를 한 손으로 살며시 쓸자 손목에 찬 리차드 밀*이 유난히 돋보인 인물이 폭력조직의 보스 포스다.
보스와 하수인들이 나눈 몇 마디 대화 속에 자루 속에는 시체가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보스의 명령에 따라 가져온 자루를 물 속으로 가라앉힌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 깊이 잠식해 버린 한 자루 속엔 누가 들어 있을까. 물결이 잠잠해질 때까지 골똘히 내려다보던 보스가 입을 열었다.
"인생 별거 없어, 저 봐. 세상에 올 때만 해도 둘인데, 갈 땐 다 혼자잖아. 근처에 어디 문 연 데 있나?
*리샤르 밀(Richard Mille)은 리차드 밀이란 발음은 영어식이다. 자동차 엔진을 보는 듯한 혁신적 기술의 시계로서 2001년 RM001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지금은 복제품이 나돌아 흔해졌지만 첫 제품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시계의 트렌드를 이끌어갈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인으로서 영국에서 공부했다고 알려졌다. 이 시계 이름은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독자 주)
출판사 측의 책 소개글에는 저자 고호에 대해 고사리 식물론이 등장한다. "고사리를 아는가? 봄철에 고사리를 꺾고 나면 꺾은 그 자리에서 아홉 번 다시 돋아난다. 고호 작가의 샘솟는 상상력은 마치 고사리의 그것과 닮았다. 이전 작품의 실감 나는 북한 사투리가 독자들을 평양으로, 또 노비 문서를 들추며 독자들을 조선시대까지 데리고 갔던 그녀가 이번에는 독자들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급 연기를 펼치는 교도소와 인천으로 무대를 옮겼다." 어쩌면 저자 고호와 자주 교감과 교류로 충분한 이해가 있는 듯하다.
자칭 '비운의 배우'인 혜수는 교도소에 복역하는 것을 삼재 탓으로 돌린다. 어중간한 똑똑함, 재빠른 눈치로 나름 편안한 감옥 생활을 하던 그녀에게도 눈엣가시가 있다. 바로 왕언니다. ‘5세 여아 살해 및 사체 유기 혐의’로 들어온 왕언니는 모범수로 나가기 전에 혜수에게 이렇게 으스댔다.
“옛날 인천 바닥에서 홍 마담이라고 들어봤냐?”
재벌가의 첩. 그러나 버림받은 뒤로 종적을 감추다가 30년 만에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는 여자. 그리고 왕언니는 그녀에게 사주를 받아 재벌의 손녀를 대신 죽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집안의 유산을 혼자 차지하려고?”
“맞아. 더 대박은 뭔지 알아? 두구 두구 두구 두구···. 그 홍 마담이 근래에 치매에 걸렸댄다. 흐흐흐.”
교도소 감방에서 혜수가 만난 왕언니는 전신에 새겨진 문신만큼이나 비호감인 인물로 5세 여아 살해 및 사체 유기죄로 복역 중이었다. 왕언니는 인천의 유명 기업 신건 그룹의 손녀 살해를 사주받았던 것. 신건 가의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외아들 내외의 교통사고, 연이은 김 회장의 죽음까지 비극적 사건과 얽혀 있었다. 설상가상 왕언니의 의문사까지. 혜수는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주인 없는 유산에서 풍기는 강렬한 돈 냄새에 곧장 새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요즘 TV나 영화에서 교도소 생활을 다룬 극들이 많이 방영·상영되고 있다. 교도소 수형자라면 으레 들어가 있는 '폭력' 부분은 줄이고, 탐욕과 법 처벌 부분은 살려서 드라마를 만든다. 이 작품도 인간의 탐욕(특히 돈 욕심)이 빚어낸 추악한 현실을 보여준다. '5세 여아 살해 및 사체 유기 혐의'는 왕언니의 죄목이다. 이 정도 되면 보통 표독한 여인이 아닐 듯한데 작품에서는 폭력성을 제외하니 평범한 '이웃집 드센 아줌마' 정도로 순화된다. 어쩌면 폭력을 없앤다면 옛날 삶의 현장에서 악다구니 써가며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 치열한 모습을 보였던 산업화 시대의 우리 어머니·아버지들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인천 한 부둣가에서 일을 묘사하던 저자의 손끝이 가르키고 있는 곳은 열흘 후의 청주 OO여자교도소. 이날 석방되는 사람들이 철커덕! 하는 쇳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물밀듯이 밀려나온다.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자 혜수만 남았다. 저자는 재빨리 그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165센티미터의 키에 야구 모자를 대충 눌러쓴 단발머리. 마중 나온 사람은 한 명 없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툭! 하고 보스턴 가방을 내려놓더니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음껏 빨아들이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이다. 대합실 속으로 스며들자 혜수는 그저 평범한 30대 여성의 모습일 뿐이다. 아무도 그가 교도소에서 이제 막 나온 사람으로 보진 않는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활기찬 인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편의점 냉장고의 엔진 돌아가는 소리와 시원한 냄새가 전율을 일으킨다. 유제품 진열대와 라면 코너에 눈이 가면서 바깥세상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낀다.
잔돈이 없다는 이유로 음료수 하나 사먹지 못하고 슬쩍 소매에 감추고 나온 혜수의 행동은 범죄 습관을 버리지 못한, 바깥세상에 융화되지 못한 혜수의 모습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아무렇지 않게 터미널 전광판을 살피던 혜수의 눈에 비친 TV 화면이 혜수의 눈을 반짝이게 한다. [속보] 인천 부두 인근 해상서 40대 여성 시신 발견.
사건 현장이 TV 화면에 비춰지고 있다. 솨아~ 인양되는시신에서 대량의 바닷물이 쏟아졌다. 시신은 마치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듯이 하얀 천에 덮인 채 구급 차량에 실렸다. 이때 TV 화면은 모자이크 처리된 사체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교도소에서 같이 생활하던 왕언이의 호랑이 문신의 일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함께 목욕하던 혜수에게 문신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돌아서서 인파를 빠져나오는 혜수의 입가에는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헛웃음이 감돈다.
여기까지 〈프롤로그〉에서 보여지는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이 등장한 모습이다. 〈프롤로그〉에서 보여진 사건이 이 작품 속 주요 사건이라고 독자들이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는 앞으로 5부에 걸쳐 벌어지는 사건의 하나의 암시일 뿐이다. 소설은 이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1부의 맨 앞머리에 저자 고호는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한다. "한 마디로 인간 세상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어리석음의 독무대라 하겠습니다."
헤수가 다시 사회로 나와 생활하려면 당연히 주거지가 급선무다. 혜수는 인천의 변두리, 전망은 바다가 보여서 그런 대로 괜찮은 그저그런 동네의 집을 임대 계약한다. 우연히 동인천여고(실재하는지는 모르지만) 9회 졸업생이라는 동기 세영을 만나게 된다. 동창이 세를 내어줄 집주인이다. 묘한 기분에 혜수의 온몸이 활활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혜수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저자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다음 표현으로 슬쩍 예측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얻는 지혜라는 게 있다. 길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해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반가운 조우가 다른 누군가에겐 고통일 수 있으니까. 가령, 과거와 단절하고 결혼생활에 찌든 기혼여성과 수년 만에 마주친 옛 미혼 친구가 딱 그렇다. 반가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안 그래도 없는 형편에 축의금을 뜯어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 살 저 살 보태서 어디에 또 말을 나를지 모르는 사람,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 버렸으니 미래를 점치는 것 또한 어려울 게 없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런데 김세영, 저 계집애는 아무래도 나이만 허투루 먹었지 싶다."(p.20~21)
이 소설의 소설 외적인 재미 중의 하나가 〈쿠키(cookie)〉의 활용이다. 쿠키란 인터넷 발달과 함께 정립된 용어로 웹사이트에 접속할 때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임시 파일을 말한다. 이용자가 본 내용, 상품 구매 내역, 신용카드 번호, 아이디(ID), 비밀번호, IP 주소 등의 정보를 담고 있는 일종의 정보파일이다.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인터넷 브라우저는 사용자가 방문한 웹주소를 지우지 않고 기억했다가 다음에 사용자가 이전에 방문한 주소를 몇 자 입력하면 나머지를 기억하여 모두 나타내어 사용자가 나머지 주소를 입력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다. 그렇게 기억된 이전에 방문했던 주소를 쿠키라고 하고, 쿠키를 통해 다시 방문할 때는 주소를 다 입력하지 않아도 되며, 아이디나 비밀번호도 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쿠키라는 명칭은 파일 용량이 작고, 이용자의 방문정보들이 마치 과자를 먹으면 으레 남겨지는 과자부스러기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이 사전은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웹브라우저는 쿠키 기능을 갖고 있으며, 네티즌이 쿠키를 받을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할 수 있는 기능도 포함돼 있다. 쿠키는 원래 네티즌들의 홈페이지 접속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웹사이트에서 쿠키를 사용할 경우 이용자는 처음 들어갈 때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다른 페이지를 방문할 때마다 ID와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쿠키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용자는 동일 웹사이트에서 다른 서비스 페이지를 방문할 때마다 회원정보를 계속 입력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특히 웹브라우저를 이용해 전자상거래를 할 경우 대부분의 전자상거래용 웹서버에서는 이용자가 쿠키를 반드시 사용토록 하고 있다.
이런 의미의 쿠키를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에필로그처럼 덧붙였다. 그것도 본문체가 아닌 변형 고딕으로 눈에 훨씬 잘 띈다. 쿠키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주 늦은 밤. 분홍색 줄무늬 윗도리, 청색 멜빵ㅈ바지, 강아지가 그려진 파란색 양말, 녹색 찐빵 모자. 그때 나의 옷차림새가 그러했고, OO각 내부 깊이 자리한 작은 방 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는 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 드라마는 우리 엄마도 즐겨 보던 것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느 여자가 철조망을 붙들고 울부짖는 모습이었는데,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그 모습이 마치 아까 본 엄마의 마지막 모습 같았다. 엄마도 날 보며 그렇게 울었다. '어서 도망쳐! 빨리!' 나쁜 아저씨들한테 끌려가면서 그렇게 울었다. 나중에 되돌아보니 그 드라마 제목이 〈여명의 눈동자〉였다. 그러니 그때가 아마 1991년 10월 내지 11월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p.326)
쿠키의 마지막 부분은 저자의 이 작품 집필 취지도 살짝 더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척 센시티브한 작가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부모와 자신 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한다. 혜수 언니는 이제 그마저도 '철륜'의 시대가 왔다며 충분히 끊어낼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한 까닭은 천륜에 버려진 나를 구원한 '인륜'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보잘 것 없는 인륜이 저주받은 천륜ㄴ보다 그 매듭이 더욱 견고할 때가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의 한켠에 혜수 언니도 자리 했었노라고, 또 언제 나와 엮은 그 매듭은 그 자리에 두고 왔을 뿐이라고 언젠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이 소설에서 쓰인 문장 가운데 얼핏 많이 들어본 문장 같기도 하고, 확실치는 않지만 생각할수록 '맞는 말' 같기도 한 문장들이 자주 발견된다. 저자의 글쓰기 능력에 따른 것이겠지만 적재적소에 사용함으로써 전체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문장들이다. 몇 개만 여기에 적어본다.
"명문 같기도 하고, 이래서 신은 공평하다고들 하는 걸까? 옥녀는 스스로 얼마나 예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미모를 이용해 먹을 머리는 없었다."(p.48)
"혜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작고 쪼글쪼글한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싶었다."(p.172)
"이번 일은 세영 못지않게, 아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극한 인생을 살아온 홍희란 자식의 목숨값을 훔치려는 일이다."(p.245)
행운을 보낸 건 여신이지만, 그 행운을 활용하는 건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p.254)
저자 : 고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자음과 모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다. 그런 고민이 만들어낸 세계로는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드라마 계약 체결)』, 『악플러 수용소』, 『과거여행사 히라이스』, 『기다렸던 먹잇감이 제 발로 왔구나(드라마 계약 체결)』, 『노비 종친회』, 『도쿄 한복판의 유력 용의자』, 『평양골드러시(드라마 계약 체결)』 등이 있으며, 사회적 이슈를 문학적으로 녹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황토현문학상, 의정부전국문학상, DMZ문학상, 국회의장상 등을 수상하였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