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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 윤동주의 시를 일본 교과서에 수록한 국민 시인, 개정판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윤수현 옮김 / 스타북스 / 2024년 2월
평점 :
독자는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윤동주는 안다. 우리나라 시인들 이름은 많이 알지 못하지만 윤동주는 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순수 청년'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 가 시를 쓰고 문학을 했지만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스러져갔다. 다행히 그가 남긴 많지 않은 시들은 일제 강점기를 헤쳐 나온 시인들의 힘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윤동주는 〈별 헤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시〉 등을 남겨 우리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 시인이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 〈별 헤는 밤〉 중에서
함께 나란히 유학 길에 오른 동향의 죽마고우 송몽규는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지만, 절망적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윤동주의 가슴속 말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남긴 시는 일제의 폭압을 견뎌내며 결국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다. 원고더미 속에 그대로 잠자고 있다가 해방 후 그의 형처럼 뒤를 돌봐주던 〈향수〉의 시인 정지용에 의해 첫 시집이 출간됐다. 위의 내용이 우리가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윤동주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에 의해 시인 윤동주와 그의 시가 4편이나 일본 교과서에 실렸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이고, 충격적이다. 시인 윤동주가 왜 일본 교과서에 실렸을까? 의아하고 궁금하다. 이 책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우리나라와 많은 인연이 있는 일본의 여성 시인이다. 그는 한글과 한국, 그리고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의 '국민 여류시인'이라고 한다. 국내 시인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시인이지만, 이바라기 노리코에 대해 몰랐단 점은 독자가 시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셈이다. 부끄럽지만 그의 시집을 읽고서 그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특별한 인사말을 남기고 2006년 타계했다. “그 사람이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생각해 주셨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오랫동안 당신께서 베풀어 주신 따뜻한 교제는 보이지 않는 보석처럼, 나의 가슴속을 채워서 빛을 발하고, 나의 인생을 얼마만큼 풍부하게 해 주셨는지…. 깊은 감사와 함께 이별의 인사말을 드립니다. 고마웠습니다. 2006년 3월 길일." 시인은 이 인사말을 생전에 써 두었음을 밝히고, 세상을 떠나게 됨을 알리고 있다. '연, 월, 일'을 빈칸으로 남기며 병명(자주막하출혈)과 당부말을 함께 남겼다. "내 의지로, 장례·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이 집에는 제가 살지 않으니 조위품이나 꽃 같은 것들을 보내지 말아주세요. 반송 못하는 무례를 더하게 됩니다."란 짧은 글이지만 독자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토록 시를 사랑한 사람이였나 싶다. 마치 시처럼 세상을 떠나는 모습이다.
그가 윤동주와 한글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문학적 행적에서 드러나지만 그의 시에서도 "충분히 그럴 것 같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서 독자는 제국주의의 일본이 국민들에게 남긴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독자는 발견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 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중략)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1945년 일본이 패전했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고 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그 이듬해 그녀는 지금의 토호대학인 제국여자약전 약학부를 졸업했다. 말이 대학이지, 여학생들은 전쟁에 동원되어 해군 약 제조공장에서 일하는 이른바 ‘군국주의 정신대 소녀’나 다름없었다.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동인지 《카이》를 창간하고, 1955년에 출간한 첫 시집 『대화』에 수록한 시에서부터 넘치는 상상력을 보여 주었다.
이바라키 노리코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시인이 32살 때에 20대 초기를 회상하며 쓴 시로서 일본의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다. 온 거리가 대공습으로 와르르 무너진 건물 안에서 천정을 보았을 때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였다는 증언으로 시작하는 이 시에는 죽어가는 사람들, 전쟁에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이 전쟁을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는다. 남자도 흉내 내기 힘든 대담한 표현이다. “비굴한 도시를 으스대며 쏘다녔다”는 표현처럼 그녀는 자유롭게 활보한다. 뒤늦게라도 청춘을 즐기고 싶다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시인은 역경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노래로 이 시를 승화시키고 있다.
민윤기 서울시인협회 회장(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시 한 편을 통해 1억 일본인들을 패전국 상처에서 구해 히망의 길로 인도했다"고 전제하고 《요미우리신문》이 극찬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속에는 식민 지배 시절 조선의 아픔과 연민이 담겨 있는 시가 많다."고 말한다. 또 노리코는 윤동주의 사진을 우연히 접하고 맑고 청아한 모습에 반해 그의 시를 읽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 한국과 교류했다고 밝힌다.
시인 민윤기는 시집 뒷 부분 「부록 2」에 "한국인들을 볼 때마다 곧고 맑은 결정처럼 단단하고 굳센 사람들이라고 느낄 때가 많은데, 모국어를 향한 마음이 그 중심적인 핵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는 이바라기 노리코가 생전에 한글날을 맞이하여 기고한 글 일부를 소개한다. 10월 9일 한글날 《월간시》는 10월호 프런트 스토리로 그의 '한글 사랑' 이야기를 실었다고 전한다.
「부록 2」에 따르면 이바라기 노리코는 200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일본 시는 희로애락 가운데 노(怒)가 없다. 그러나 한국시에는 그 노가 있다.", "일본에는 서정시인만 있다. 시인의 사회적 영향력도 한국에 비해 미약하다."는 말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서정시인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그런 문학 풍토나 문단의 행위를 비판하는 대표적 시로 평가받는다. 이 시뿐만 아니라 이바라기 노리코가 발표한 많은 시는 역사적인 어둠과 비극적 현장을 생생하고 분명하게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의 수많은 사람들이 대지진의 도쿄에서 왜 죄 없이 살해되었는가?"(〈장 폴 사르트르에게〉)라며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증언한 시도 발표했다. 이 시는 "잘 안 되는 것은 모두 저놈들 탓이다"라며 일제 강점기 시절 유대인 못지않은 박해를 받다 온 한국인이 당한 아픔을 어느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인식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 속에도 패배주의적인 비장감은 없다. 오히려 낙관적이다. 밝다. 바로 이런 점 덕분에 전쟁의 풍경을 숨 막히는 비극적 어둠으로 표현하는 다른 시인들과 달리,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전후시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었다는 평을 얻었다.
「부록 1」에는 이바라기 노리코가 윤동주 시인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직접 읽고 느낄 수 있도록 일본 교과서에 실린 그녀의 수필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 전문을 번역해 실었다. 이 수필에서 이바라기 노리코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20대의 젊은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청결한 시풍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사람이 오래 살다보면 많은 일을 겪게 되며넛 이처럼 영혼까지 맑아지는 시를 쓰기는 어려워진다.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에게는 젊음이나 순결을 그대로 간직한 맑고 깨끗함이 후대의 모든 독자들까지 매료시켜 언제나 수선화 같은 상큼한 향기를 풍기게 한다. 윤동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고 하지만 사고나 지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6개월 전인 2월 16일 만 스물일곱의 나이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말았다."(p.104)
이바라기 노리코는 이 수필에서 윤동주는 죽을 때 한국어로 크게 외친 후 숨을 거두었다고 밝힌다. 그녀가 직접 찾아다니며 밝힌 윤동주의 옥사 행적이다. 간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큰 목소리로 외치다가 절명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에 더불어 노리코는 "부연하자면 윤동주는 분명히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한다면 이 시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동주의 사인은 일본인 스스로 그 전모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는 노리코의 주장은 1984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완역 출간한 이부키 고의 노력을 전한다.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배경을 알기 위해 그가 유학했던 도쿄,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 후쿠오카 형무소 등 그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며 80대가 된 전직 특별 고등 형사와도 만나는 등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윤동주의 옥사에 대한 진상을 끝내 밝혀낼 수 없었다고 시집에 적어놓았다는 사실도 전해준다. 그러나 노리코는 언젠가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 옥사의 전모가 한 점 의혹도 없이 소상하게 밝혀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고 고백한다.
이 시집에는 시 35편이 4장(章)에 나뉘어 실려 있다. 4개의 장의 제목은 〈1. 네 감수성 정도는〉, 〈2. 내가 가장 예뻤을 때〉, 〈3. 처음 가는 마을〉, 〈4. 식탁에 커피 향 흐르고〉 등이다. 각 장의 표제어는 시의 제목이 그대로 쓰였으며, 다나카 가즈오는 「후기를 대신하여」를 통해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의 마음을 읽다』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데, 멍청하게도 거기에 이바라기 노리코 자신의 시가 없다는 것을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야말로, '자신의 생각을 깊게, (중략) 우물을 파듯 파 내려가면 지하에 흐르는 공통의 수맥에 닿듯이 진체에 통하는 보편성에 도달한다'(『시의 마음을 읽다』에서 인용)는 시인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엔가 제 손으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을 편찬하며 이 『시의 마음을 읽다』에 필적할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꿈꾸게 되었습니다."고 썼다. 이는 노리코 시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극찬한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저자 : 이바라기 노리코(いばらぎ のりこ,茨木 のり子, 본명 미우라 노리코)
일본 현대시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로 유명한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는 전후(戰後)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이바라기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한국어를 직접 배웠을 뿐 아니라 동시대 한국 시인들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였고, 시와 수필을 통해 한국 문화를 알리기도 하였다. 윤동주의 시와 생애에 대해 쓴 수필은 일본에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이바라기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알게 되었고,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한국 문화를 몸소 체험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수필집 『한글로의 여행』(1986)은 한국 문화 입문서로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역자 : 윤수현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여 통번역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업에서 다년간의 실무 경험을 거쳐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한일통번역과를 졸업했다. 윤동주100년포럼에 참여하여 『장 콕토 시집』『폴 발레리 시집』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전문 통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