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전 시집 : 카페 프란스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정지용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집 『정지용 전 시집-카페 프란스』는 한때 이름 없는 시인이었던 정지용의 시집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하던 시인으로 해방 후까지 시작과 시집 발간에 몰두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시단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활동하며 적지 않은 시를 남겼다. 한국문단사에도 큰 업적을 남긴 당시 우리 시단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일도 많지만 6·25전쟁 중 납북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과 사망이 확인되지 않을 때까지는 시인의 이름은 '정O용'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그는 시인이지만 정치색이나 친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 어쩌면 북한 인민군이 자신들의 선전용으로 납치해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지용은 특히 윤동주와의 관계가 돈독했고, 윤동주보다 연배여서 선배로 많은 역할과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 윤동주의 시집 발간에 앞장 서고, 윤동주의 일제 때의 행적을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쓴 시보다 윤동주의 시집을 펴내는 데 더 힘을 쏟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했으며,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 한 주인공이었다. 이동원,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유명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윤동주가 가장 존경한 시인이자 일본 도시샤 대학의 선배이기도 하다. 정지용은 해방 후 경향신문 주간으로 재직하면서 윤동주의 시를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 윤동주의 시집이 나올 때 윤동주를 대신해서 〈서문〉을 쓰기도 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정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은 1935년 발간됐다. 이 시집 『정지용 전 시집-카페 프란스』 1부에 그대로 전재됐다. 이 시집은 윤동주 시인의 유품으로 남겨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를 아꼈다. 책에는 1936년 3월 19일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친필로 쓰여 있다. 윤동주 시인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문단사에 따르면 정지용 시인은 절제된 언어와 우리말을 감각적으로 활용한 신선한 시 작품들을 발표하며 이후 한국 시에 확연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책에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들을 원본 그대로의 표기를 살려 실은 이유도 그에게서 탄생한 시에 담겨 있는 풍성한 우리말을 가능한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한 데 목적이 있다고 출판사 측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과 다른 표현에는 각주로 설명을 해 놓아 이해에 어려움이 없도록 출판사가 배려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 시집 『정지용 전 시집-카페 프란스』는 1부 〈정지용 시집〉, 2부 〈백록담〉 그리고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잡지 등에서 새로 발굴한 작품과 〈미수록 작품〉들로 구분하여 실었다. 1부에는 우리 전통의 서정성과 이국정취가 배합된 시들이 좀 더 특징적이라면, 2부는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이 그려져 정지용 시인의 변화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신앙이 드러나는 작품들을 통해서는 그가 받아들인 천주와 성모에 대해서 느끼도록 해 준다.

우리는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처음 알게 됐다. 그가 납북된 이후 그의 시를 소개하는 것도,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매우 어려웠던 남북의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우리 역시 납북인사인지, 월북인사인지,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여부가 드러나지 않은 인사들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에 일어난 분단의 비극이 여실히 반영된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이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사상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는데도 말이다. 시 「향수」는 이동원과 박인수 교수가 듀엣으로 노래해(1995) 히트곡이 되면서 조영남 등 많은 가수가 부르게 된다. 가장 유명한 노랫말이 된 시가 되었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당시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그의 삶이 여실히 전달되는 감상을 하게 되면서 마음의 위로도 받을 것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들을 주로 발표했지만 향토색 짙은 우리의 언어와 사투리, 자신의 신조어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등 시작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한국시사는 그의 시를 크게 세 시기로 특징이 구분한다. 첫 번째 시기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으로, 이 시기에 그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형상화한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개척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다듬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여 다른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을 받는 「향수」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두 번째 시기는 그가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했던 1933년부터 1935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그는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여러 편의 종교적인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반」, 「불사조」, 「다른 하늘」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36년 이후로, 이 시기에 그는 전통적인 미학에 바탕을 둔 자연시들을 발표했다고 한국시사는 기록하고 있다. 「장수산」, 「백록담」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자연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하여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해서 산수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지용은 이처럼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분단 이후 오랫동안 그의 시들은 다른 납북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 수많은 문인의 청원으로 1988년 3월 비로소 해금되어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이 1회 수상자로 선정된 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향수」 중에서

 


 

이 책의 표제어가 된 「카페 프란스」는 정지용이 지상(紙上)에 발표한 최초의 작품이자 그가 쓴 초창기 시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향토적 서정의 상징인 「향수」와 상반되는 모더니즘의 색채를 띠고 있다.

 

옴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쟈. - 「카페·프란스」 중에서

 


 

2부 〈백록담〉의 표제어가 된 '백록담'은 한라산 백록담을 보고 쓴 시로서 우리 국토와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기상을 노래한다. 이 시는 장시이자 산문시다.

1.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 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통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백록담」 중에서

 

또 다른 장시 「슬픈 우상」 역시 산문시다.

 

이밤에 안식(安息)하시옵니까.

내가 홀로 속에ㅅ소리로 그대의 기거(起居)를 문의할삼어도 어찌 홀한 말로 붙일법도 한 일이오니까.

무슨 말슴으로나 좀더 높일만한 좀더 그대께 마땅한 언사가 없사오리까.

눈감고 자는 비달기보담도, 꽃그림자 옮기는 겨를에 여미며 자는 꽃봉오리 보담도, 어여삐 자시올 그대여!

 

그대의 눈을 들어 푸리 하오리까.

속속드리 맑고 푸른 호수가 한쌍.

밤은 함폭 그대의 호수에 깃드리기 위하야 있는 것이오리까.

내가 감히 금성(金星)노릇하야 그대의 호수에 잠길법도 한 일이오리까. - 「슬픈 우상」 중에서

 


 

저자 : 정지용(鄭芝溶)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옥천보통공립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2년 고교생 때 첫 작품 풍랑몽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전쟁으로 인해 폭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6년 일본 유학중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9인회를 결성하고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1935년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 〈문장〉의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뒤에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 생생하고 선명한 대상 묘사에 특유의 빛을 발하는 시인 정지용. 한국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상을 비롯하여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 한 시인이었다.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의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동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탄생한 그는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전쟁 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현재 장남 구관과 장녀 구원만 생존해 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느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다.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고, 구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며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서는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일하고,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하였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