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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신 날
김혜정 지음 / 델피노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 『눈이 부신 날』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들어 있다. 표제어는 다른 소설집이 그렇듯이 책 속의 한 작품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눈이 부신 날'. 눈이 부신 날은 대개 우리 삶에서 예상치 못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 날을 표현할 때 자주 쓴다. 이 소설집은 저자 김혜정의 첫 번째 작품집이라고 한다. 기획해서 쓴 것으로 읽힌다. 아홉 편의 작품 모두에서 눈 부신 날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동안 눈 부신 날은 한두 번쯤 일어나는 게 보통 아닐까? 이 말은 더 생각해 보면 누구든지 자신에게 눈 부신 날은 한두 번쯤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눈이 부신 날이라 기억할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의 하루로 기억할지 다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눈이 부신 날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앞날이 즐거움과 행복감으로 충만할 것이란 예견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그리고 사모하던 이성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든지, 자신이 하는 일의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뤄낸다든지이다. 더러는 복권 당첨날을 눈 부신 날로 기억할 수도 있다.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 일어나면 눈 부신 날로 기억하기 알맞을 것이다.
표제어로 쓰인 작품 「눈이 부신 날」에는 배우가 되기를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지혜'(예명: 성이린)가 4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유명 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는 과정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에게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함께 성장한 남자 규호의 끊임없는 독려와 우정이 있었다. 규호는 이 소설의 화자(話者)이자 성이린 배우의 오늘이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무대 설치업체 엔지니어다. 그는 영화배우 시상식 무대의 설치 작업을 하면서 성이린과의 과거를 추억한다. 그의 기억 속의 지혜는 아름다운 친구로서, 사랑하는 연인이 되기를 꿈꿔왔다. 마침내 성이린의 영화 〈눈이 부신 날〉에서 신인상을 받는 날까지 무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나타나지 않는다. 성이린이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와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덧붙이는 마지막 인삿말이 규호에게 '눈이 부신 날'이 된다. "그리고···. 지금의 배우 성이린이 아닌, 오랜 시절 아무것도 아니었던 '박지혜'를 믿어준 그 친구에게도 지금의 감동을 전해주고 싶습니다."(p.113)
이 책에는 오늘의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훤해진 정수리를 보고 대머리가 될까 걱정하던 새신랑 정훈(「뿔」), 지방대를 졸업하고 취업 전쟁을 치르느라 자신의 취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선아 (「아티스트」), 바람이 난 남자친구랑 6년 연애를 뒤로한 채 파혼한 가은(「옳고 편안하게」), 무대 뒤에서 일하는 무대 설치 기사 규호(「눈이 부신 날」), 5년 만에 뇌종양 재발 판정을 받은 누리(「1%의 로봇」), 두통을 달고 사는, 식품회사 소비자 상담실 전화상담원 민아(「사랑한다는 말」), 남자친구의 친구들로부터 귀머거리라고 차별받던 청각 장애인(「내가 헤비메탈을 듣는 방법」)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주위이고, 그들은 곧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눈이 부신 날』의 소설 아홉 편은 각기 다른 색깔로, 완곡하게 때로는 그 누구보다 파격적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세상의 냉소와 질타에 괜스레 쪼그라들던 마음을 멀리 던져버리고 지금의 자신을 자랑스럽고 특별하게 여기고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고 눈 부신 날일지 모른다. 이 책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꽤나 선명하다.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개성과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이 자기를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새롭고 좋아 보이는 다른 이의 모습을 추앙하며 똑같이 달려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저자는 아프게 찌르고 있다. 대단하지 않은 ‘나’라고 하더라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저자 김혜정은 교통사고로 11살에 척수 장애를 얻어 지체 장애 1급이 되었다고 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저자는 자신의 장애가 불행과 불편 그 어디쯤 존재한다 여기고 오늘도 보조기구에 의지한 채 한 글자 한 글자 바위에 새기듯 작품을 써 내린다. 이 때문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따뜻하되 독립적이고, 남다른 부드러운 인간애가 넘친다. 또 상상은 근사하고 끝이 없으며 또 치밀하고도 단단하다.
이 작품집을 통해 선보인 소설들은 하나같이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고, 친구이고, 선량한 시민이다. 때문에 적어도 이 소설집에는 경쟁 사회에서 난무하는 배신과 아귀다툼, 생존이라는 이름의 무한 경쟁과 끝간 데 없이 치닫는 폭력성, 또 환락과 유희의 그림자는 없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소민적 삶 속에서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인간들이다. 따뜻한 시선의 저자이기에 기술적인 그런 멋들어진 수식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시종일관 정직하고 슴슴한 말투로 일상을 그려낸다. 섬세하고 따뜻하다. 이 시선은 저자 특유의 차별화된 필터로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일깨우고 있다. 물론 「바람이 지나가면」, 「1%의 로봇」, 「우주의 휴식」과 같은 예상치 못한 소재와 플롯들로 무장한 작품들은 장편소설이 아닌 소설집을 읽는 재미 또한 제공한다.
저자의 인생관이 무엇인지 몰라도 글에 씌어진 바로는 돈보다 앞서는 것이 개인의 건강한 행복이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애가 전 작품을 통해 잔잔하게 흐름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간결한 표현은 독자의 맑은 정신을 돕고, 깨끗한 영혼에 동화된다. 이것이 저자의 작품이 잘 읽히는 비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자신의 삶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란 예상은 저자의 과거를 들추지 않아도 독자들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듣도 보도 못한 병명이 튀어나오고, 2060~70년대의 이야기를 앞당겨 펼쳐 놓아도 인간 자체의 본성이나 병에 대한 고통은 짙게 배어나온다.
「1%의 로봇」은 오늘날 상위 1%의 사람들의 앞날을 예견하듯하다. 돈과 기술로 영원히 살기 위해 사이보그를 거쳐 로봇이 된다. 2060~70년대라면 앞으로 40년 후의 이야기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일부를 영구 사용하도록 간단한 수술로 대치시켜가며 마지막엔 본성을 잃어버린 로봇이라는 의사로부터의 판정을 받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끔찍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참혹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현실을 그리듯이 담담히 표현해 낸다.
"저도 바뀌어버린 내가 놀라웠습니다. 이 모든 게 나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빼내 준 첨단 의료기술 덕분이었어요."
이탈리아 이집트, 미국, 브라질, 이집트, 러시아.
저는 그곳에서 나와 같은 이유로 사이보그가 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병들고 다쳐서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몸을 버리고 사이보그로 살기를 택한 사람들. 그들은 유명관광지, 내가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 커피나 브런치를 즐긴 카페, 거리 곳곳을 평범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누비고 다녔어요."(p.157)
의학 박사이자 교수인 장누리 환자의 몸 일부분이 된 사이보그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는 우선 사이보그 시스템은 기계라고 말한다. 성능이 뛰어나지만, 사람의 온전한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이보그 수술은 99%의 회복 성공률을 보이는 현대의학이 낳은 아주 성공적인 시스템이지만, 그 수술을 받은 환자들 중 1%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 학회에 보고된 내용을 의사는 장누리에게 설명해준다. 의지대로 잠을 참거나,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섭취할 수 없게 된다는 부작용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게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말 그대로 진짜 로봇이 된다고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그럼, 제가······, 그 1%가 된 건가요?"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저자가 상황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이어간다. 환자 장누리의 상태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이유다. 교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쓱, 올리며 말했어요. 몸을 사이보그로 만드는 이 시대의 라식수술은 의료용 특수 안경을 10분 정도만 쓰고 있으면 기존의 각막에서 새로운 사이보그 각막으로 바꿀 수 있는 간단한 수술이었습니다. 그런 간단한 수술을 의사가 아직 받지 않고 불편한 안경을 계속 쓰고 있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는 거겠죠.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한 저자의 불안감이 드러난다. 사랑한다는 말이 진정으로 감정의 표현이 아닌 성희롱의 하나로 오용할 때 어떤 결과를 빚을까. 1인칭 소설로 이 작품에서 '나'가 주인공이고 화자이다. 작품 속 모든 사건과 분위기 설명은 '나'의 시선에 따라 기술된다. 이상한 것이 항상 보인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한 걸까. 아니면, 그 이상한 것을 이제는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저 하늘을 바꿀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핑크색 하늘"을 두고 '나'의 고민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별빛마저 잠드는 밤부터 새벽까지. 나는 식품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처음은 양식재료 회사에 1년 계약직으로 일했고, 이 회사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지는 2년 정도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소비자 상담실에서 전화를 통한 고객들 상담 업무를 맡고 있다. 소비자 상담실이라는 곳이 보통은 민원 상담실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제품이나 상품에 항의하는 전화가 많다. 때문에 칭찬을 받으며 상담을 마치는 일은 거의 없다. 종일 험악하고 싸늘한 이야기만 들으며 피하지도 못한 채 한 자리에 버티는 기분은 모두 잘 아는 스트레스 쌓이는 부서이다. 여러 가지 처방책을 갖고 하루하루 버티지만 일상이 쉽지 않은 임무다.
몸살기에 조퇴한 날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몸살로 열에 들뜬 눈이 잘못 비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몇 번이고 다시 하늘을 바라봐도 내가 본 것은 분명했다.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쳐다본 하늘은 핑크색이었다.
"김민아 환자분, 링거 빼 드릴게요."
누군가 내 손목을 살며시 잡는 느낌이 느껴져 화들짝 놀라 손목을 급히 빼내자 "많이 놀라셨어요? 저는 간호사예요."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아까 그 여자 간호사와 같은 하얀 옷차림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덩치가 큰 남자다. 링거를 빼고 스티커를 붙이는 등 간호사는 뒷마무리를 하고 있다. 애써 외면한 채 서둘러 가방을 챙겨 주사실을 나섰다. 그때, 내 뒤로 그 남자 간호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예쁜 김민아 환자분! 사랑합니다!"
어머, 미쳤나 봐. 왜 저래? 물론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잘 챙겨 먹고 기운 내라는, 나를 토닥여주는 말도 감사하다. 그런데, '사랑합니다'라니. 나를 언제 봤다고, 얼마나 봤다고 사랑한다고 하냐고! 이건 분명히 나를 희롱하는 거야!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병원에 전화해서 항의할까. 아니면, 112에 신고할까. 그러다가, 이내 머뭇거렸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상담 전화의 인사는 '사랑합니다'라는 공통된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그 사랑한다는 인사말은 상담원의 정신건강을 해치고 다수의 고객들도 부담스러워 한다는 이유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로 바뀌었다. 그러나 고객들의 장난스럽거나 험악한 말투로 시비 걸듯 항의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영주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런데 이 친구로부터 온 카톡에는 예전과 다른 낯선 문구가 발견된다. - 고마워, 친구, 사랑해(하트 이모티콘). 전화를 걸었다. "근데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평소의 영주라면 너야말로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버럭 소리를 지를 거라고 생각했다. 잘해줘도 지랄이냐고, 짜증을 낼 터였다. "약 먹고 푹 쉬어. 우리 민아, 아파서 어떡해···."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첫사랑과 재회하고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후 하늘은 다시 파랗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이었다. 분홍색이 아닌 하늘색.그 하늘 아래에서는 예전처럼 아무나 나를 붙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편안했다."(p.228)
저자 : 김혜정
11살 무렵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척수 장애를 얻어 1급 지체 장애 판정을 받았다. 홈스쿨링으로 검정고시를 봐 초중고를 마쳤고, 경희사이버대에서 일본학을 전공했다. 몸이 불편한 덕분에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과 깊이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제12회 동서문학상에서 단편소설 「엘리베이터」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21년 첫 소설집 「한밤의 태양」을 출간했다. 오늘도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필사적인 노력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