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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김정금 지음 / 델피노 / 2023년 9월
평점 :
'보험 사기'란 소재는 그리 흔하지는 않다. 보험 사기 범죄는 늘어도 범죄와 범인이 금세 잡히고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서인가? 보험 사기는 경제사범적 성격을 띄지만 대부분 형사 범죄가 연루되어 있어, 물증을 남기기 때문이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보험 액수도 커지기 때문에 고액 사기인 경우가 많아 전제 보험 사기 액수는 늘어나는 모양이다. 이 소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란 표제어가 말해주듯 미세한 차이를 짚어내야 하는 수사의 역할이 중요하게 떠오르지 않나 싶다. 소설의 주인공 김지섭은 보험조사원(손해보험사의 위임을 받은 손해사정 회사의 보험조사원)이다. 보험금 지급 요청이 접수되면 보험금 지급 결정을 위해 사고 현장이나 병원을 방문하여 사고의 고의성 여부를 조사하는 일을 한다.
수사 형사처럼 엄격하고 치밀한 조사 업무가 그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고객에게 뇌물을 받는 것은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사 결과를 조작해서 보고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2023년 현재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가 1조 원을 넘어섰다. 이는 ‘보험사기’가 더 이상 특별한 몇몇의 이야기가 아님을, 누구나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방증한다. 특히 이 소설 작품은 있지만 없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 모든 범죄는 가장 약하고 외로운 이들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이들을 통해 가장 낮고 약한 곳의 외로운 자들이 누구보다 먼저,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다. 개인에서 나아가 한 가족을 파멸로 이끄는 보험사기의 비극을 여과 없이 그려낸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매우 시의적절한 소설로 우리가 주변에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만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소설의 시작부터 저자 김정금은 주인공 지섭을 돈에 양심을 파는 파렴치한 성격의 소유자로 설정한다. "돈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진다. 지섭은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봤다. 뒷좌석에 흰 봉투가 놓여있었다. 조금 전에 면담한 고객이 열린 창문으로 던진 것이다. 그에게 보험금을 지급해달라는 일종의 뇌물이었다."(p.9)
사무실에 돌아온 지섭은 흰 봉투의 내용물을 가늠해보고 한 달 급여의 절반쯤 되는 액수에 만족감을 표시하며 막 들어온 김 과장과 업무적인 대화를 나눈다. 김 과장은 업무 차 경찰서에 다녀온 길이다. 김 과장이 내뱉은 말에 지섭은 귀가 쫑긋한다. "오는 길에 경찰이 했던 질문들을 곰곰이 돌이켜 보니까 말이야. 그 사람이 죽은 게 아닌가 봐." 이게 무슨 말인가? 사망진단서를 첨부하지 않으면 보험 조사 자체가 안 되는 일이다. 김 과장은 사망진단서만 보고 조사한 것이어서 사망진단서가 허위였거나, 죽은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짐작한다. 그럼 보험 사기? 김 과장은 조사를 위해 경찰서를 방문한 것이 아니고 참고인 조사를 위해 조사를 받고 온 것이다. 대화를 마친 지섭은 회사 전산망에 접속해서 배당목록을 확인한다. 진행하는 건은 10건, 그중에 이번 주 안으로 종결해야 하는 건은 1건, 오늘 새로 배당된 건도 1건이다.
피보험자 박연정의 〈수임 의뢰서〉를 훑어본다. 보험 약관에서 말하는 급격하고도 우연한 외래 사고가 맞는지 사고 경위를 확인해 달라는 단순한 건이었다. 다음은 보험 청구서로 눈길을 준다. 청구한 금액이 3억 원이나 된다. 3억 원을 지급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그의 손에 달렸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보험사에서 조사를 의뢰한 이유가 바로 일반적이지 않은 가입내용 때문이었다. 보통 고객은 보험 만기가 80세, 100세인데, 박연정은 30세였다. 그뿐만 아니라 보험에 가입한 지 3개월 만에 중대 사고가 일어났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보험조사원의 촉으로 께림칙하다는 느낌이다.
지섭은 고객 ‘박연정’의 사고를 조사하면서 묘한 의문에 빠진다. 보험청구서에 적힌 전화번호도 휴대폰 번호가 아니라 지역 전화번호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 입원 중인 병원으로 전화 주세요'를 발견하고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한다. 간호사로부터 전화를 전해 받은 박연정은 "뭐가 잘못됐나요?"라고 되레 묻는다. "아뇨, 잘못된 건 아니고,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라 연락드렸습니다." "네? 조사요? 조사는 왜 하는 거예요?"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고 현장이나 병원 방문이 필요할 경우 조사를 진행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지섭은 다짐하듯 말을 추가한다. "만약 동의하시지 않으면 보험금 지급은 지연될 거고요." 지섭은 조사를 진행하려면 먼저 고객을 만나 뵈어야 한다고 고지하고 시간을 묻는다. 의외로 박연정의 답변은 간단 명료하다. "아무 때나 괜찮아요."
다나음 재활요양병원 703호실로 오라는 박연정의 대답을 뒤로 전화를 끊는다. 김 과장이 모니터를 응시한 채 중얼거린다. "우리가 보험회사에서 수임료를 받는데, 공정할 수가 있나?" 매사 진지한 김 과장을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이어 김 과장은 보험회사의 처사에 불만스러운 말을 토해낸다. "공정한 심사를 하겠다고 손해사정 회사에 위임할 땐 언제고, 조사 결과에 개입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두 사람은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업무를 하기 때문에 공적인 대화와 사적인 대화도 나눌 사이다. 그러나 서로간에 부정한 일을 공모하진 않는다. 적어도 직업상 부정한 일은 곧 뇌물 받고 편파 조사를 하는 일이기에 보험조사원의 자격이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사실일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김 과장의 고객과의 만남에서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고 설령 준다 해도 거절할 성격임을 드러낸다. "난 고객한데 커피 한 잔도 얻어먹고 싶지 않아. 내 돈으로 계산하고 말지. 그거 다 뇌물이잖아. 괜히 커피 한 잔 얻어먹고 조사하다가 뭐라도 나오기라도 해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하잖아 커피 한잔에 발목 잡히긴 싫어."
지섭은 서류 가방에 넣어둔 흰 봉투가 내심 신경 쓰였다. 고객이 건넨 돈 봉투를 받는다는 건 조사하다 보험금 지급할 수 없는 사유를 발견하더라도 그 사실을 보험회사에 숨기고 보험금 지급에 결격 사유가 없다는 결과를 내놔야 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 과장이 덧붙인 말에 지섭은 양심에 찔리지만 내색하지 않고 모니터만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인다.
"보험회사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사는 우리가 객관성을 유지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양심은 잃지 말아야지. 보험회사에나, 고객한테나 말이야. 안 그래?"(p.23)
다음날 연정을 찾은 지섭은 업무적으로 필요한 말을 물어 확인하고 사고로 다쳤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을 순서에 맞춰 노련하게 해나간다. 당연히 사고 경위에 대해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다치신 거죠?"
"이불을 털다가 아래로 떨어졌어요."
"집이 몇 층이에요?"
"9층이요."
"난간이 있었을 텐데요?"
"창틀로 올라가서 까치발을 들었거든요."
연정이 한 말을 받아적으면서,
"큰일 날 뻔하셨네요." 중얼거리듯 말했다.
"다행히 이불이 나무에 걸렸거든요."
지섭은 조사를 계속하면서 처음 만나 답변을 들을 때와는 다르게 ‘박연정은 이불을 털다 창밖으로 떨어진 것일까? 스스로 뛰어내린 것일까?’란 의문을 갖게 된다. 연정의 명확하지 않은 사고 경위 설명과 하나씩 드러나는 의문의 스토리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킬수록 지섭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섬뜩한 진실에 한발씩 다가선다.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보험조사원의 입장에서 경찰보다 정확하고 날카롭게 사건을 수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경찰의 수사 내용을 보험조사원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보험을 둘러싼 사기 사건의 진실을 파내기에는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 지섭의 능력을 더 확대시킨다. 저자 김정금은 사전에 주인공 지섭을 뇌물 받는 파렴치한으로 그려낸 데에도 저자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독자들은 진실의 절반쯤 왔다는 신호로 받아들여도 좋다. 저자는 거액의 보험금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을 철저하게 고발하기 위해 어느 정도 부정한 인물 지섭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범죄 미스터리 소설답게 말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단서를 찾는 독자들의 숨소리조차 빨아들일 만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사건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기보다 아예 복선이나 스토리에 도움이 될 만한 장치들을 곳곳에 숨겨둔다. 사건의 묘사나 심리적 묘사 등은 사실적으로 묘사해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전형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범죄 소설을 완성시켜 간다. 독자들은 숨겨진 단서들을 하나씩 모아 퍼즐을 맞춰가는 내내 이야기에 푹 빠져 끝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라. 당신 주변에 보이는 이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로맨틱 판타지인 전작 『은하수의 저주』과는 완전 다른 장르인 범죄 미스터리 소설을 선보인 저자의 실험 정신과 장르 확대 열정은 그가 앞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소설을 계속 보여줄 것이란 기대를 갖기에 충분하다.
숨겨진 반전과 급박한 장면 전환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두는 데 성공한 이 소설은 빠른 사건의 전개, 독자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설득력 있는 돌발 상황을 모두 인정하게 하는 능력은 그의 빼어난 소설 구성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독자는 믿는다. 자칫 건조하고 우연이 섞인 스토리를 짜임새 있는 유기적 구성으로 극복해 낸 것이다. 특히 전반부는 빠른 호흡의 범죄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후반부터는 보이지 않는 범죄자에게 쫓기는 스릴러로서의 색깔도 작품의 매력 포인트라는 출판사 측의 평가도 진한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지섭의 시점으로 끌어가던 스토리가 후반 절정의 순간에는 조은희의 시점으로 바뀌는 것도 주의해 볼 사안이다. 자칫 주의가 산만해지고, 소설의 흐름을 망칠 수도 있는 실험적 작품은 역시 저자의 노련한 구성 능력으로 일시에 성공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흐름을 놓치기 쉬운 미스터리 범죄 소설을 리얼리즘 사회소설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은 저자의 글솜씨가 여과없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멋지고 흥미로운 소설임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망설이지 않고 추천하고 싶다.
저자 : 김정금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를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두려움이 앞섰다. 눈앞에 높은 벽이 세워진 것만 같았는데, 어느 순간 『고잉홈』과 『은하수의 저주』를 쓸 때와는 다른, 글쓰기의 재미를 알게 됐다. 이야기의 힘을 알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글쓰기를 멈추지 못할 것 같다. 지금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공상으로 다음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인스타그램 주소 @j_gold_writer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