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희순
권은혁 지음 / 좋은땅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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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요즘 시를 잘 읽지 않는다. 아마 나이듦에 따라 감성이 무뎌진 탓 아닐까 생각해서 회피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어쩌다 시를 읽어도 예전처럼 촘촘히 읽지도 못한다. 생소한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일부러 채택한 단어가 아닌데도 예전처럼 은유나 상징어에 대한 감수성이 많이 떨어진 게 사실인 것 같다. 아주 단순한 제목의 이 시집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어려운 단어도 없는 데다 일상적인 단어마다 옛 추억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남자 이름이다. 표제어 '소녀 희순'은 시인의 엄마이다. 저자 소개란을 읽어보고서야 알았다. 처음엔 처음 보는 시인의 이름이라 별 생각 없이 읽었다. 분명 시어로 쓰인 단어들이 독자의 어릴 적과 결혼할 때까지의 감성을 건드리는 단어들로 가득하다. 시인이 여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그런 인식 아래 읽어나갔다. 습관대로 〈들어가며〉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말이 "나는 엄마다."이다. 이젠 시인이 여자라고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이어지는 말, "사랑하는 남편과 날 닮은 아이들. / 내 꿈은 우리 네 식구 오순도순 평범하게 사는 것 그뿐이었다." 책 머리에 쓰는 '소박한 꿈(오순도순 평범하게 사는 것)'이 무너졌다고 한다. 무슨 일이 생겼다.

읽어보면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다. 마지막 줄에 가면 "내가 되고 싶다. / 미치도록 소녀이고 싶다."이다. 소녀 때의 힘들었지만 아련한 추억은 곧 이은 시들에서 나타난다. 이 소녀의 이름이 '희순'이고 시의 화자(話者)다. 지금은 결혼하고 자녀도 낳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겨 남편을 날마다 보고 싶다며 그리며 산다. 어렸을 때 소녀 희순이 엄마 희순이 되고, 그 자녀가 결혼하고... 할머니가 다 된 엄마 희순은 자꾸 옛 생각을 더듬는다. 그 옛날이 독자가 어렸을 때 겪었던 많은 부분이 평행이론처럼 맞아 떨어진다. 소녀 희순은 육남매 중 둘째다. 어쩌면 집안이 어려워 부모가 모두 생활 전선에 뛰어든 바람에 제대로 보살필 수 없어 외할머니 댁에 의탁한 듯하다.

 


 

외할머니께 팔려 가던 날, 어머니는 나에게 당부했다. "할머니께 미움받지 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마당에 나가 잡초라도 뽑으렴."

나는 가족들이 보고 싶은 날이면 잡초를 몽땅 뽑았다. 하지만 잡초는 나의 외로움과 같아, 아무리 뿌리를 뽑아도 내일이면 또 다른 싹을 틔웠다.

- 「잡초」 중에서

 

아버지는 형제 중 가장 공부를 잘했던 나와 미술에 꿈을 가진 넷째 동생을 서울 친구분 댁으로 유학 보냈다.

(중략)

한 날은 하교 후 세탁소 문을 열었는데, 그날은 아주머니가 잣이 박혀 있는 새빨간 배추김치를 안주로 둘둘 말고 있었다. 내가 그 김치를 얼마나 집중해서 봤는지, 고춧가루 크기가 '아주머니 몸뚱아리만큼 크구나' 생각하며 군침을 삼켰던 기억이 난다.

아주머니는 김장김치를 했다며, 일 층 집 안 거실 냉장고에 많이 두었으니 언제든지 꺼내 먹으라 했다.

 

며칠 후, 두 분은 저녁 늦게 외출을 하셨다. 이때만을 기다린 나와 동생은 방에 나뒹굴던, 일부러 버리지 않고 있던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주워 들었다. 마치 도둑이 된 것처럼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일 층으로 향했다.

주인댁 집 문이 열리고, 부잣집 금고처럼 보이는 영롱한 냉장고가 보였다. 그때부터 김치의 짜릿한 향이 나와 동생을 미친 듯이 설레게 했다.

- 「서울 유학」 중에서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비슷한 시절을 건너온 독자에게는 감성이 많이 닳아진 만큼 추억이 곱게 포개져 있었나 보다. 이 두 편의 시를 읽고서도 눈물이 핑 돌 만큼 짙은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대부분 못 살았을 시절이라 집안에 냉장고가 웬말, 흑백TV를 안방에 설치한 것이 독자가 태어나서 우리 집의 가장 큰일로 생각되었을 때다. 까맣게 잊었던 추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배어나온다.

이 시집은 이렇게 1부를 통해 가족 관계와 어렸을 적 가족들과의 추억 등이 잘 버무러져 독자의 감성을 건드린다. 세월이 지나고 소녀도 자라고 '사랑'을 앓았을 터, 그때의 심상도 시에 나타난다. 무슨 연애를 어떻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랑을 했을까만 독자의 관심사가 된다. 사랑은 모두 모두 다른 색, 다른 형태를 띠고 있으니까.

 

언제부턴가 난 당신을 알았고

언제부턴가 난 당신을 그렸습니다

(중략)

언제부턴가 난 당신이 보고파졌고

언제부턴가 난 당신이 좋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꿈속에서 당신을 만났고

아름다운 색도 칠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인 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 「사랑의 시작」 중에서

 


 

사랑은 각기 다른 색으로 각기 다른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지 모르겠다. 실제 연애할 때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판단이 안 설 때도 종종 있다. 안 보면 보고 싶으니까 사랑이다고 한 말도 있다. 받은 것 없어도 한없이 주고만 싶은 게 사랑이라고 말한 사람도 주위에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아직도 사랑이 뭔지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된다. 독자나 시인이나 그 점에서만은 같은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평범했다.

유달리 잘하는 것도 없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었다.

손재주가 좋거나 말을 유창하게 잘하지도 못했다.

일탈하거나 어디서 나서는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

당신을 생각하는 일 외엔 소질이 없다.

- 「당신을 생각하는 일 외에 소질이 없다」 전문(全文)

 


 

2부의 마지막 시엔 시인의 '사랑'에 대한 경험과 사유에 대해 아낌없이 풀어썼다. 마치 사랑이란 문학적 표현 같기도 하고, 철학적 사유의 결과을 말하는 것 같다. 소설로 읽어도 어려운 사랑을 시의 형식을 빌어 써놓으니 두 번을 내리 읽어도 말뜻은 알겠지만 맞고 틀리고의 개념마저 사라진다. 어쩌면 시인처럼 절절한 사랑을 못했던 것 아닌가 하는 때늦은 후회감이 들 정도로 '너무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듣는 사람마저 헷갈리게 적었다. 사랑의 정의(定義)에 대한 말 같기도 하고, 경험을 핑계로 문학과 철학에 비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과 종교를 끄집어내고... 독자에게도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수백수천 년 전부터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려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우리는 사랑에대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비너스와 아도니스」라는 서사시에서 사랑에 대하여 설명했다. '사랑하는 아도니스가 죽었으니 사랑의 신, 나 비너스는 다음과 같은 저주의 예언을 하노라(이하 생략)'

셰익스피어는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그렸고, 시공을 초월해 사랑은 똑같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도 사랑을 정의할 수는 없었다. /

어떤 이에게 사랑은 봄비처럼 따뜻한 것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칼바람이다. 우주와 신비와 자연은 비교적 수백 년 전보다 많이 입증되고 조금은 이해가 되지만 사랑에 관해선 그렇지 못했다. 사랑만큼 이해하기 힘든 것이 또 있을까? /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이유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와 표현만으로는 사랑을 모두 표출할 수 없다. /

사랑은 자신만의 종교를 갖는다. 전 세계 모든 종교를 망라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랑'이다. 평생에 걸쳐 종교를 통해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이렇듯 신이 종교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오로지 사랑이다. 모든 인간이 사랑에대해 깨닫는다면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신을 이해할 수 없듯이.

- 「신의 언어, 사랑」 중에서

 


 

4부에 가서도 시인의 사부곡(思夫曲)은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살아 있는 한 계속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인은 셰익스피어도, 어떤 철학자도 정의 내리지 못하는 사랑의 정의를 이미 마음속으로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의 웃은 얼굴이 기억나지 않으면

그만 울어도 된다 했는데

내게는 너무도 가까운 기억입니다

(중략)

과거는 가깝고 미래는 먼 것이라던데

몇 시간 후인 내일보다'

이십 년 전이 더 가까운 것은

너무합니다

- 「어느 시인의 말」 중에서

 


 

출판사 측에 따르면 이 시집은 둘째라 항상 언니의 물건을 받아 사용해야 했던 희순 씨에게 아버지가 사 준 빨간 구두, “네 엄마 보고 싶지?”라고 물었던 아버지의 말에서 묻어 나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집에 오는 길에 식을까 봐 품 안에 소중히 숨겨 온 치킨 등 제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된다. 『소녀 희순』은 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읜 희순 씨는 자신을 소녀라 불러 주는 이를 잃은 상실감에 아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 간다. 이는 아마 두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희순 씨는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을 주워 먹으며 두 아이들이 스스로 컸다고 말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랑이었음을 안다.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장해 간다. 사랑은 신의 언어이기 때문에 아마 인간인 우리는 평생을 사랑에 대해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누군가에게 평생 소녀로 남고 싶다는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저자 : 권은혁

 

소녀의 아들.

2016년 제32집 《내성의 맥》 〈봄〉으로 등단.

문화관광협회 이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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