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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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독자가 가입한 온라인 서점으로부터 책을 홍보하는 레터가 한 통 도착했다. 무슨 책인가 하고 클릭해 들어가 읽어보니 '이야미스'라는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앞뒤 맥락을 살펴가며 한참 읽다 보니 이야미스라는 단어를 아예 풀이해 놓았다. '이야미스'는 읽고 나면 기분이 언짢아진다고 해서 싫다는 뜻의 ‘이야다(いやだ)’와 ‘미스’터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일본의 신조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읽고 나면 싫은 미스터리라는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책의 저자는 미나토 가나에라는 일본 중견 작가라고 한다. 당시 일련의 몇 권 책 『고백』, 『리버스』란 책을 통해 '이야미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책 홍보차 온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이야미스란 말은 싫어하지만 '여왕'이라면 좀 달라진다"며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인터뷰의 요지는 우리 유행어로 '불편한 진실'을 책에 주제와 소재로 삼아 쓴 책이 크게 히트를 친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이 책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도 일본 신조어 '이야미스'에 틀림없다고 독자는 본다. 출판사 측도 이 점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교묘하게 파헤쳐 불편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미스’, 데뷔하자마자 이 장르의 대표 작가로 떠오른 아시자와 요의 두 번째 장편소설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이 국내에 발간됐다. 아시자와 요가 발표한 작품들은 섬세하게 설계된 전개로 정평이 나 있으며 전부 나오키상, 서점대상, 추리작가협회상 등 유수의 문학상 후보로 지목되어 일찌감치 평단과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자가 이야미스 작품이라고 한다면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독자가 읽고 나서 찜찜한 마음이 영 가시지 않기에 굳이 이 말을 써본다.

 


 

출판사 측은 앞선 소개글에 이어 아시자와 요는 사건의 극악함으로 독자를 사로잡기보다 안정감 있는 서사를 구축해 독자들을 서서히 어둑어둑한 이야기에 빠지게 만드는 솜씨가 남다르다. 각종 문학상에 지명된 저력이 있는 만큼, 이번 장편에서는 본래의 강점을 한껏 살려 두 여성 관계의 침잠에 무게를 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책은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면서도 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에가 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녀의 곁에는 결혼한 후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자원봉사를 하는 나쓰코가 있다. 오래전부터 늘 함께였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열등감과 부러움을 느끼는 한편 남편보다 더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는 데 익숙하다. 두 사람의 이상하리만치 끈끈한 관계는 사에의 남편 다이시가 사에에게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고백한 뒤 실종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더구나 다이시가 죽은 채 발견되면서 둘은 서로에게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하나씩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살해되던 순간 사에는 정말 직장에 있었을까? 나쓰코는 왜 사에가 출근한 시간에 사에의 집 앞을 서성인 걸까? 사건은 언론 취재와 경찰 탐문으로 이어지며 생생히 펼쳐진다.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겨 결말에 이르러서야 또 속았구나! 깨닫게 되었다”라는 독자 후기가 많았다는 출판사 측 이야기가 이야미스 소설임을 반증해 주고 있으리라. 이 책은 여름에 걸맞은 페이지터너 소설임에 틀림없다.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6장(章)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 작품의 〈프롤로그〉 맨 마지막 부분이다.

나쓰코는 몸을 웅크리고 오열을 토해냈다. 딸은 놀라고 무서웠는지 한순간 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엄마에게 달라붙어 한층 소리 높여 울었다. 엄마를 무서워하면서도 엄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딸. 나쓰코는 목이 콱 멜 듯 안쓰러운 마음으로 딸의 입에 젖을 물렸다. 이 아이의 앞길에 행복만 있기를.(p.15)

 

 

미스터리 소설인 만큼 스토리를 자세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이에게 천 기저귀를 채우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나쓰코의 남편과 시댁과 멀리 떨어져 살아도 되고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며 직장 동료와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가는 사에의 남편. 그런 남자들과 사는 사에와 나쓰코, 이들의 관계는 이상하리만치 특별하다. 반찬거리를 나눠야 할 때, 철야 근무를 마친 새벽녘 휴대전화를 열었을 때, 무심하게 마음을 긁어놓는 남편에게서 야속함을 느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서로였던 것. 그래서인지 사에가 쉴 수 있는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나쓰코의 집이며, 휴대전화 통화목록에 남겨진 나쓰코의 이름만 봐도 ‘피가 시원스레 흘러가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에의 여동생조차 안부를 물을 때마다 나쓰코와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에를 힐난한다. 다른 친구와의 시간을 허용할 수 없을 만큼 기실 사에는 나쓰코를 좋아했다. 내내 나쓰코가 사에의 전부였고, 나쓰코로부터 인정받으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때론 온전히 나쓰코가 되고 싶기도 했다.

남편은 아이를 키우면서 기저귀를 갈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안고 있다가도 아이가 울면 나쓰코를 불러 기저귀 갈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할 따름이었다.

나쓰코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았다. 지금도 단물만 쪽 빨아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더러워진 속옷을 빠는 것도, 다다미방에서 욕실까지 바닥을 닦는 것도 전부 나쓰코가 할 일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종이 기저귀를 쓴 건 아니잖아. 하지만 괜히 천 기저귀에 연연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 힘에도 부치니까…… 그래서.”

나쓰코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내가 딸을 위해 내내 천 기저귀를 사용하며 애써왔음을 남편도 모를 리 없다.(p.59)

 


 

저자가 첫 번째 장편 『죄의 여백』에서 살인에 얽힌 여러 용의자의 목소리를 통해 독자에게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개가 돋보였다면, 이 책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은 소중한 존재에게 제목만큼 언제까지고 불행은 피하고 행복한 순간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넘쳐버리며 파국을 맞이한 쓰디쓴 미스터리다.

시에와 나쓰코는 늘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실은 외면한 채 억지로 가족의 모습을 끼워 나가는 면모도 유사하다. 그러나 둘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일면 차이를 보인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고백한 남편을 기다리고, 그에게서 아이를 밸 기회를 엿보는 사에와 그런 사에를 ‘남자 복’이 없다며 안쓰러워하다가도 다이시 때문에 사에가 불행하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쓰코. 결국 나쓰코는 사에에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길 바라며 불행의 원흉을 대신 제거해 버린다. 살인이 일어나기까지 이야기는 2장에 불과하다.

이야기는 사라진 남편을 기다리며 현실을 부정하는 사에의 심리와 당장은 진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자신이 바라는 바를 위해 모두 짊어지는 결연한 나쓰코의 모습을 대비해 보여준다. 관계자들의 진술이 이어지며 독자들을 남은 하나의 퍼즐을 향해 다가간다. 사에는 왜 그토록 나쓰코에게 집착했을까? 나쓰코는 사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희생한 걸까? 그리고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예상했던 밑그림은 전부 사라지고 색채부터 배경, 캐릭터, 플롯까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것이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아시자와 요 미스터리의 전형이다. 일본 독자들에게서 '서스펜스의 여왕'으로 불리운다고 한다.

 


 

독자는 저자 아시자와 요의 전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를 읽은 적이 있다.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 악재가 눈덩이같이 불어나는 이야기들을 수록한 작품집이다. 별거 아닌 것 같았던 선택이 그야말로 악화일로의 시작이 되어 주인공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야기에, 예측을 불허하는 섬찟한 범죄 동기가 뒤따른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립된 인간이 범죄를 일으키게 되는 과정과 위태로운 심리를 유감없이 담아낸 것이다. 범행을 저지른 충격적인 동기를 감성적으로 풀어낸 작품집임과 동시에 독자들을 속이는 서술 트릭도 숨어 있어 미스터리를 읽는 재미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출간 후 낸 소감에서 아시자와 요는 "개개인의 힘든 삶이나 짓밟히고 있는 뭔가를 직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 ‘내가 믿는 정의’를 지킬 수 있는 건 운이 좋아서 그럴 뿐이고,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무섭기도 해서인지 작은 실수나 우연 때문에 궁지에 몰리는 등장인물을 그릴 때가 많습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단순히 극적 긴장감이 높다는 이유로 '서스펜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따른 게 아니라는 생각을 더 굳혀주는 소감 한마디였다.

나쓰코는 임신 소식을 듣고도 냉대와 무시를 일삼는 남편 다카오와 어정쩡하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형제자매도 없이 그녀만을 바라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홀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어머니처럼 아이를 지배하진 않으려 오직 양육에만 힘써왔다. 다카오의 무심함 속에 일정한 소속도 없이 오직 엄마의 이름으로만 살아온 나쓰코에게 사에라는 존재는 매일 그녀를 지탱해 준 힘이었다. 그런 사에를 위해 나쓰코는 진짜 행복을 주고 싶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독자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초점을 맞추기 힘들었다. 워낙 심리적 묘사 처리가 치밀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것까지 노련한 저자에게서 허점을 찾아내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뚜렷하게 부각시키지도 않아서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축 사에와 나쓰코다. 늘 엄마의 그늘에서 살아온 시에가 엄마 없는 곳에서 퇴근 후 만나서 이야기하는 유일한 상대가 나쓰코다. 둘에겐 어쩐 일인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는데도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친구로서 우정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엄마에게 칭찬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사에와 그런 사에에게 한없는 동정과 연민, 친절과 희생을 감수하는 나쓰코는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역시 저자의 인물 설정과 스토리와의 관계, 이를 극적으로 짜맞추는 유기적 구성 능력이 모두 어우러져 멋진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빚어냈다고 생각된다.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붙임성 있는 사에와 아내를 무시하고 집안 일도 도와주지 않는 매너 '0'점의 남편. 어느 날 다른 여자가 임신을 했다며 외도를 고백한 후 실종된 나쓰코의 남편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고. 나쓰코가 범인으로 구속되어 기소될 상황으로까지 일사천리로 치닫는다.

사건은 치닫지만 사실 사건이 벌어진 후 며칠 사이다. 워낙 심리 묘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치밀하다 못해 답답한 증인 출두 증언 기록 등을 뒤져가며 사건이 단순 살인 사건이 아님을 독자들이 인식하기까지가 끝없는 미스터리의 연속처럼 느껴지게 한다. 저자의 소설 구성 능력도 한몫 했으리라. 책에서 본문체에 비해 색이 옅은 글씨로 적혀 있는 부분이 혼자만의 생각이나 심리적 변화를 일으킴을 감지하게 해준다. 독자들이 못 느끼고 그냥 읽어도 스토리의 진전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물론 심리의 변화를 감지하면 사건의 실체에 조금 빨리 다가갈 수 있을 것이지만.

 


 

저자 : 아시자와 요(あしざわ よう, 芹澤 央)

 

198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2006년 지바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근무하다 2012년 《죄의 여백》으로 제3회 야성시대 프론티어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2016년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가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후보 및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5위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으로 제7회 시즈오카 서점대상을 수상했다. 2020년에는 《더러워진 손을 거기에 닦지 마》가 제164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고, 2023년에는 《밤의 이정표夜の道標》로 제7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 및 연작단편집 부문을 수상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뛰어난 심리 묘사와 충격적인 반전을 탄탄한 스토리로 엮어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그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역시 여성 캐릭터가 맞닥뜨릴 수 있는 뻔한 사건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결말로 이끌어 수많은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 수작이다.

 

역자 : 김은모

 

일본 문학 번역가. 1982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어를 공부하던 도중 일본 미스터리의 깊은 바다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테후테후장에 어서 오세요』,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여자 친구』를 비롯하여 아시베 다쿠의 고바야시 히로키의 『Q&A』, 미치오 슈스케의 『투명 카멜레온』, 『달과 게』, 『기담을 파는 가게』, 이사카 고타로의 『화이트 래빗』, 『후가는 유가』 야쿠마루 가쿠의 『우죄』, 고바야시 야스미의 『앨리스 죽이기』, 『클라라 죽이기』, 『도로시 죽이기』, 지넨 미키토의 병동 시리즈 『가면병동』, 『시한병동』, 누쿠이 도쿠로의 『미소 짓는 사람』, 『프리즘』, 미야베 미유키의 『비탄의 문 1, 2』,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 『마안갑의 살인』을 비롯하여,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의 ‘하야미 삼남매’ 시리즈, 『지나가는 녹색 바람』, 『검찰 측 죄인』, 『달과 게』, 『성스러운 검은 밤』, 『열대야』, 『밀실살인게임』, 『사이언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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