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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 - 2023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지원사업 선정작
윤관 지음 / 헤르츠나인 / 2023년 7월
평점 :
오래만에 공감과 감동이 되는 시를 읽었다. 독자는 시를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 시집 『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의 시는 여러 편이 쉬운 언어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단어로 쓰였다. 일부러 멋내는 언어도 없고 평범한 언어가 대부분이다. 물론 시인들이 특별한 언어로, 특별한 시어를 따로 쓰진 않는다. 현대의 독자들은 난해한 시어나 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상이 글자보다 훨씬 널리 퍼져 있는 시대, 글로 쓴 시들이 어렵다면 누가 읽기를 좋아하겠는가? 그런데도 난해한 시는 나름대로 선택되기도 한다. 형상화를 매우 뛰어나게 해서 가치를 인정받는 시도 있다. 아무튼 현대의 시는 난해하면 읽히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집의 저자 윤관은 이 책을 펴냄으로써 '시인'이란 호칭을 처음으로 얻게 됐지만 그는 시인 이전에 일상적인 '생업을 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래서 '시를 쓴다'가 아니라 '일기를 쓴다'고 표현한다. 시집을 펼쳐 들면 한두 편의 시를 먼저 읽지만, 그 '맛보기'가 끝나면 대체로 시인의 시 세계가 궁금해진다. 독자만의 시 감상법은 아닐 것이다. 시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와 비슷할 것이라 독자는 생각한다.
시인은 〈들어가며〉에서 시집을 내게 된 소감과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을 설명한다. "우주는 나를 제외한 세상이었습니다. 우주는 너무나 광대하고 무변하여 그것을 짐작하고 정의 내리는 건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를 통해 보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어 시인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조차 나를 통하여 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세상은 없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나를 키우면 세상이 커지고", "나를 가두면 세상은 감옥"이었다고 말한다. 이젠 시인은 자신 있게 말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대단한 것의 일부로 끊임없이 경험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때부터 삶은 견딜 만한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시인은 ‘나조차 섞이지 않는 나’의 시선으로 우주를 둘러본다. 온통 귀하고 귀하다. 내 아내, 내 아이, 내 어미, 내 아비 그들의 작은 마음조차 귀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귀하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시인 윤관은 시를 ‘안과 바깥을 이어주는 거대한 침묵 속에서 떼어낸 아주 작은 것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쓸모를 지닌 것’으로 바라본다. 윤관의 첫 시집 『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가 꼭 그렇다고 소개한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 누구나 경험하는 평범한 정황이라는 보편의 바깥을 가로지르는, 윤관의 안쪽에 드리운 특별한 감각은 일상어의 낯선 구성과 문장의 극적인 배열을 통해 미학적 가치를 부여한다. 안쪽에서 자란 깊은 사유는 내밀한 감정의 소요를 치밀한 관찰을 통해 시세계에 담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쓸모의 다리를 놓아준다. 그런데 이는 윤관만의 것은 아니다. 역시 시집을 출판한 전문가로서의 평가다.
시인은 지금의 자아와 처음의 자아가 다름을 인정한다. 세상에 섞여서 달라진 자아 이전의 원래 자아 찾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찾아가는 여정과 흡사하다.
두껍아, 두껍아
한꺼번에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어둠처럼
나의 전부를 주마
헌것도 새것도 아닌
처음의 나를 다오
처음의 내가 생각나질 않아
내가 섞이지 않은 나
처음의 나를 다오(p.59~60) - 「두꺼비집」 중에서
출판사 측은 또 이 시집 읽기의 또 다른 방식을 귀뜀한다. 이에 따르면 윤관의 시에 흐르는 뚜렷한 정서이긴 하지만, 무릇 시인이라면 마땅히 발현하는 ‘문학’의 방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윤관을 읽어야 하는지, 왜 윤관을 시인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시정신을 ‘배제의 존재’에서 찾고자 한다. ‘윤관은 일기 쓰듯 시를 쓴다’는 최돈선 시인의 추천사에도 불구하고, 윤관의 시가 일기가 아닌 것은 바로 배제의 존재라는 시정신이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적 자아로부터 떠오르는 모든 것을 하나씩 배제해 간다. 가족, 욕망, 사랑, 이별, 우정, 찰나의 감각, 바람, 커피…. 이 배제하는 과정이 시로 태어나고, 결국 모든 걸 다 배제하고 난 나머지는, 무한한 우주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로서 윤관 자신이다. 그리고 기어이 그러한 자신조차 ‘내가 섞이지 않도록’ 처음의 내가 되고자 무(無)를 향한 갈망을 쉬지 않고 염원한다. 그래서 이 시집의 제목이 『내가 섞이지 않은 나無』가 된 것이다.
잊혀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꽃 지고 알았다
작은 오솔길오 숲이 걸어가는 소리
산 전체가 묻히는 아득한 역광
그 무게 없는 쓸쓸함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가장 오래 머물렀음을(p.61)
- 「잊혀지는 것」 중에서
꿈을 꾸었다
내가 깨끗이 사라지는 꿈이었다(p.99)
- 「완전변태」 중에서
삶은 한 번뿐이고
순식간에
사라진다고(p.27)
- 「바람의 경전」 중에서
나를 제외한 전체와 전체에서 배제된 나, 전체와 나를 이어주는 것은 바로 인연. 윤관은 아무리 소소하다 하더라도 인연을 깊이 바라본다.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리움조차, 여전한 갈등조차 인연의 마음으로 깊이 바라본다. 거기서 오래도록 성숙한 깨달음이 연꽃처럼 환하게 떠오른다. 윤관에게 인연은 바로 안과 밖을 이어주는 것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쓸모인데, 그의 시가 바로 윤관의 내면과 세상을 이어주는 인연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하루」에서 반전을 만난다. 윤관의 시가 쉽게 읽힌다는, 또는 반면에 깊은 사유와 깨달음 담은 시라는 양쪽의 편견을 불식한다. 개성 있는 시어, 반짝이는 문장을 넘어, 글이 흐르는 리듬과 사유의 충돌이 빚어내는 말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시간은 늘 흐르고
멈춘 채 흔들린다, 나는
깊어지는 고요를 감당할 수 없어
입자 고운 커피를 내리고
그대에게 편지를
그 편지는 기억이 겪어야 하는 미래
당신은 과거를 찢어내고 있겠지(p.36)
- 「좋은 하루」 중에서
자칫 길을 잃을 것 같은 현란한 사유의 행보 속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감각의 향연은 과연 무슨 생각으로 시를 지었을까 싶은 순간에 물 흐르듯 흐르는 언어의 리듬으로 속도감을 부여하고, 과감한 생략으로 시적 엇박자를 부여하며 흥미를 이끈다. 한 연으로 구성한 시 속에 이 엇박자를 배치한 것 자체가 뛰어나다. 시라는 것이 어떤 문법에 의해 구축된 의미의 완성이라기보다 시적 미학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표현이라고 했을 때, 독자로 하여금 추상과 구상 사이의 절묘한 긴장을 체험하게 하는 이 감각은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시적 자아로서 부끄러움 뒤에 숨는 윤관은 실제로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좋은 하루」에서 슬쩍 자신감을 드러내는데, 사실 시집 곳곳에 자존의 자락을 안개처럼 깔아놓았다.
다만 내가 좋아 나를 쫓았고
내가 쓴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아
누군가를 속일 일도 사라져갔다(p.128)
- 「생각벌레」 중에서
말이나 글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으며
표현하지 못한 것들의 서러움이 밀려온다(p.69)
- 「나는 시를 꿈꾸지 않는다」 중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힘을 가진, 그리고 오래도록 생각의 층위를 다지며 사유와 실천의 인연을 이어온 자의 당당함이다. 그의 생각 어느 하나라도 순간적으로 떠오른 게 아니다. 오래오래 익은 것들이다. 시인은 그 무르익은 것들이 썩어서 그 어떤 사소한 것의 거름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 : 윤관(윤여성)
생업에 종사하며 일기 쓰듯 시를 씁니다. 1971년 태어났고, 대전에 삽니다. 적정선의 고민과 넘어지지 않을 만큼의 무게를 지고 날마다 걸어갑니다. 나는 이 길과 그 길을 걸어가는 작고 속된 이를 사랑합니다. 예전에 품었던 희망과 꿈들은 아득하지만, 이젠 중심도 변두리도 아닌 나로 살고 싶습니다. 이 한 권의 시집에 내가 남아 있습니다. 남겨진 나를 읽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모두가 인연입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