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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 다시 돌아가 널 살리고 싶어
우대경 지음 / 델피노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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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중년의 나이가 된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들어가면 선생님으로부터 '효(孝)'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효의 기본은 당연히 성공해 편안하게 잘 사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로 늘 선생님의 훈시를 들었다. 그러나 '효'는 부모의 바람이지만 부모가 강요하듯이 직접 가르치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을 다해 부모를 섬겨라' 하는 것이 유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춘추시대 공자부터 이를 가르쳤다고 하니, 누구든지 부모에서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고, 마땅한 일이었다. 이는 사회 윤리로 자리잡고 법에서도 이를 감안한 많은 조항이 생겼다고도 들었다. 서양의 경우 '효'에 대해 우리처럼 선생들이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당연한 규범이고 의무로 생각지는 않은 것 같다. 서양에는 '효'라는 단어가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다면 반대의 개념인 가장 큰 불효는 무엇일까? 불효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부모는 부모 앞에 먼저 죽는 일이라고 했다. 아니 그렇게 배웠다. 어려서 한학이나 천자문을 배울 때, 이를 테면 조선시대에는 몸,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먼저 죽는 것은 가정하기 싫을 정도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을 안기는 일이다.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이런 효도니 충성이니 하는 삼강오륜을 따로 가르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 중심의 사회에서 너무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굳이 학교에서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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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날로 다시 돌아가 널 살리고 싶어』는 학교 폭력, 그중에서도 '범법 소년' '촉법 소년'의 범죄를 다룬다. ‘촉법 소년’은 형벌을 받을 범법행위를 한 만 10세 이상∼14세 미만의 형사미성년자로, 형법 제9조에서 ‘14세가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형사책임능력이 없기 때문에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더라도 형사처벌을 하지 않고, 가정법원이 소년원으로 보내거나 보호관찰을 받게 하는 등 ‘보호처분’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에서는 처분 규정도 두고 있는데, 촉법 소년은 ‘소년법’에 따라 소년보호재판을 받게 되며, 이를 통해 ‘보호처분’에 처해진다. 보호처분은 ▷보호자 또는 보호자를 대신하여 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자에게 감호 위탁 ▷수강명령 ▷사회봉사명령 ▷보호관찰관의 단기 및 장기 보호관찰 ▷아동복지시설이나 그 밖의 소년보호시설에 감호 위탁 ▷병원, 요양소 또는 의료재활소년원에 위탁 ▷1개월 이내의 소년원 송치 ▷단기 및 장기 소년원 송치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소년의 보호처분은 그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또 소년법에서는 ‘19세 미만의 자'를 소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년범은 연령에 따라 범법 소년(만 10세 미만), 촉법 소년, 범죄 소년(14세 이상∼19세 미만) 등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만 10세 미만의 범법 소년의 경우 아직 어려서 일체의 법적 처벌이 내려지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이 연령 제한을 더 낮추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높아가는 것 같다. 이 소설은 14세 미만인 '촉법 소년의 살인'을 다룬다. 주인공 은서는 14년 촉법 소년에게 무자비한 행위로 아들을 잃는다. 살인자 문종오는 만 14세 미만의 촉법 소년으로서 어떠한 범죄를 저지르든지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한다. 이에 따라 은서의 아들 지혁을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는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야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 알 것이다. 평생이 지옥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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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에게 살인자의 친구 형태가 찾아오고 낡은 일기장을 내민다. 거기에는 13개의 메모 형태의 짧은 일기(?)가 있고 그 일기를 읽을 때마다 그 순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살인자의 친구 성태의 모습으로. 그렇게 해서 아들을 죽인 문종오를 막기 위해 엄마 은서는 과거로 돌아간다. 일기장에는 모두 13개의 메모가 있는데 문종오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일기와 저지르던 날의 일기, 그리고 그 후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은서는 그때 그때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날로 돌아간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서 살인자를 아예 죽이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때마다 새하얀 빛이 나면서 현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매번 과거로 돌아는 가지만 상황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된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고통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저자 우대경은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아픔과 슬픔을 표현하는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말한다.
출판사 측은 부모를 잃은 사람을 이르는 '고아'라는 단어가 있는 데 반해, 자식을 잃은 부모를 이르는 말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라며, 가까운 단어 참척(慘慽)이란 표현을 찾아 설명한다. 그러나 '참척'도 자손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뜻할 뿐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단어 중 어떤 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는 것이 그 슬픔의 깊이가 얕음을 의미하지는 않을 터. 참척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하지 않아도 뚜렷이 공감할 수 있는 몇 가지 슬픔 중 하나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말 그대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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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작품에서는 이런 슬픔을 간직한 주인공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지만 작품은 온통 슬프고 아프기만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금방 손에 잡힐 것 같던 희망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기도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과 마주하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길을 만들고 희망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의 복수를 더욱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악을 악으로 처단하지 않고, 악을 법으로 응징한다는 것.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한 범죄자에게 법을 이용해 마땅한 벌을 받게 만드는 서사는 실정법에 따라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저자는 이 책 초반부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지나가듯 복선을 슬쩍 내비친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찰나의 순간으로 은서가 모두 보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패를 다 보여준 셈인데, 구성의 묘라고 할까, 아니면 복선에 그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 읽고 난 후에 판단할 일이다. 처음에는 미스터리하게 보이던 일기장의 문장들과 설정들도 사건이 진행될수록 딱딱 맞아 떨어진다. 작가가 단순히 상상력만 발휘한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스토리 구성을 유기적으로 잘 맞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시공간에서는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를 다녀오는 등 시공간을 초월하는 일이 상상 속에서 빈번이 일어나지만 독자들의 설득력을 얻으려면 유기적 구성이 필수적이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일이나 사건은 우연으로는 가능하지만 필연이 동반되지 않으면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에는 실패할 터이니 저자의 구성력이 이를 만회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흥미와 카타르시스는 공감하는 독자들의 몫이지만. 어느 정도의 재미와 쾌감을 선사하는 것 같다. 소설 전개상 갈등 부분도 뚜렷하다. 은서는 어떻게든 돌아가서 죽음을 막고 복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뜻대로 일이 진전되지는 않는다. 이로 인해 독자들의 시선을 더 잡아끄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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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소년법을 악용한 촉법 소년의 살인이라는 무겁고 조심스러운 소재를 퍽 과감하고도 섬세하게 다뤘다는 게 출판사 편집진의 전언이다. 이에 따르면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애절하고도 아련하게 새겼고, 소년법을 악용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고통이 지면을 통해 느껴질 정도로 실감 나게 표현했다. 끝내 통렬한 응징과 복수로 향하는 길을 더없이 통쾌하게 그렸다. 허투루 버릴 것 없는 대사와 치밀한 스토리는 수많은 복선을 내포하고 있어 내내 몰입하게 만들면서도, 작품 새새 따뜻함과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기어코 독자의 예상을 뒤집고 마는 반전을 선사해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한다. 이 소설은 장르소설의 실험적 정신, 판타지 문학의 즐거움과 환상적 느낌, 그리고 카타르시스가 있는 작품의 전개와 갈등, 반전, 결말의 완벽에 가까운 구성력으로 한층 돋보인다. 속도감 넘치는 전개, 예측불허의 반전, 매혹적인 상상력은 판타지 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이다.
이 소설은 촉법 소년에 대한 기준이 오래 전 제정된 채 이후 개정되지 않아 오늘날 촉법 소년의 연령을 더 낮추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에 시사하는 바 크다. 인터넷 등으로 너무나 많은, 아직은 배워야 할 게 훨씬 많은 아이들이 법의 허술한 부분을 악용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악행을 하고 나서도 죄의식이 없다는 것은 여론에 힘을 실어주는 현상이다. 학교 폭력의 수위도 점점 올라가고, 연령도 크게 내려가 초등학교에서도 학교 폭력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은 사회가 그만큼 어지러워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고 소수의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혹시 모를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말아야 한다는 법의 정신을 함부로 폄훼할 수도 없는 입장이니 신중하게 고려해 적절한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론은 이미 농익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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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그런 의미에서 판타지 소설로 쓰였지만 우리 사회가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를 짚어내는 또 다른 취지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독자 혼자 만의 생각은 아닐 터, 소년 범죄에 대해 사회 지도층의 신중한 고려를 촉구하는 의미로도 읽힌다. 소설 속 종오가 그렇듯이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미성숙한 상태의 아이들이 저지른 범죄라고 해서 오래된 법으로 사회 분위기를 설득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법을 악용한다는 것은 또다른 의미의 범죄인데 이는 법의 처벌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만 적절한 대책이나 법 개정을 요청하는 이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게 독자의 생각이다.
에리는 그가 문종오임을 알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서웠다.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다. 사람 셋을 죽인 살인자는 좀 더 괴물 같을 줄만 알았다.(p.293)
“교활한 토끼는 굴을 여럿 가지고 있는 법이거든요.”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 에리가 활짝 웃었다. 은서가 힘겹게 따라 웃으며 에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p.313)
저자 : 우대경
부산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낮에는 아이들과 뛰놀며 배우고,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상상을 즐기고, 상상이 문장이 될 때 설렌다. 지은 책으로는 장편소설 『죽어도 죽지 마』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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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