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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노비 종친회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2년 9월
평점 :
이 소설 『노비 종친회』는 사회 풍자 소설이다. 지금은 사라진 '노비'로 어떻게 사회를 풍자하느냐고 되묻는 독자도 있겠지만 지금 현재에도 노비제도의 흔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성(姓)씨가 흔적을 남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 민주주의가 정착된 대한민국에서 왜 갑자기 노비 문제를 끌어들였을까? 저자의 의도는 쉽게 짐작 가지 않지만 책을 잘 읽으면 노비 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한 제도였는지 확인하게 해주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이런 신분 제도를 정치가 사라지고 부정과 부패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되짚어봄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간접 비판의 작용을 하고 있다.
21세기 지금은 사라진 노비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했는지를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대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비판을 가한다. 다만 역사 소설처럼 당시로 시점을 옮기지 않고 현재 이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사실 노비제도는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생긴 제도라 한다. 고대뿐만 아니라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으로 차지하려는 땅은 대부분 농작물 수확이 좋은 곳이고, 교통도 사통팔달로 두루 발달한 곳이다. 부강한 나라의 조건이 넉넉한 식량과 건강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때는 군인이고 평시에는 농부였다. 전쟁 때도 징집되지 않는 사람은 귀족, 여자, 그리고 노비다. 아마 전략물자 수송이나 후방 잡무에는 노비들도 참여했을 것이다. 양반제도로 설명되는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양반과 중인(글도 배우고 기술직 등에 종사하는 귀족 다음 신분), 상민(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 그리고 천민으로 나누었다.
이 신분제도는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 유교 국가 조선으로 국호와 국가 이념만 달랐지 신분 제도는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조정의 부패를 없애겠다고 들어선 조선은 초기엔 지배 계급인 양반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이 조선을 이끌어가는 관료(문관과 무관)들이다. 그들은 책 읽고 과거 급제해 벼슬하거나 힘 있는 양반의 자제는 그마저도 없이 관직에 채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제도도 시험 문제 유출이라든지 폐해가 커짐에 따라 조광조가 중종 때 개혁을 시도하면서 과거보다는 관리 채용이 추천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는 과거의 부정이 너무 극심해 자기들끼리 과거에 나올 시제(문제)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는 식으로 부정행위가 극심했다고 한다.
이런 양반 계급의 숫자가 두 차례 전쟁의 여파로 나라 재정이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워지자 전후부터 이른바 '공명첩' 발행으로 실제 벼슬을 하지 않는 양반이 양산됐다고 한다. 일정의 재물을 바치고 양반의 성씨와 양반이라는 증서를 받았다는 것. 당연히 양반의 숫자는 조선 후기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아져, 21세기인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95%가 자신이 양반 가문이라고 한다. 이는 되새겨보면 당시 중인과 평민, 노비였던 많은 이들의 후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서서 "나는양반이다"고 할 사람도 없지만 구태여 스스로 나서서 양반이 아닌 핏줄의 진실에 대해 누가 나서겠는가? 이 소설은 이들이 벌이는 웃지못할 헤프닝을 소재로 대한민국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험난한 20세기를 이겨내며 민주주의, 산업화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깊숙이 박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병폐인 '부익부빈익빈'의 악순환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지적되고 있다. 이 같은 경제 체제는 전체적인 나라의 부나 국민의 경제가 확대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또 다른 신분 차별이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민족 자본도 없고, 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산업화하고 시장 경제를 따른 데 대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어서 누구의 잘못으로 탓하기도 어렵다는 점이 또 하나의 문제이다. 역작용으로 자본과 노동이 분리돼 신분화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돈'이 최고의 가치다. 돈이 나라의 강약을 결정하고, 국민의 삶의 질도 결정한다. 누구나 돈을 벌면 조선시대 양반 계급이 되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누가 규정짓지 않아도 상민(일반 국민)이나 천민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회다. 이 역시 사회 문제가 될 우려가 크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이겨 냉전을 끝내는 데 가장 큰 힘이 됐고, 세계인의 '신앙'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가진 '돈'에 의한 신분 차별화를 막지 못한다면 언제든 또 다른 악재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양반이니 천민이니 가르는 신분 차별이 우리 국민 의식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본주의는 더 깊숙한 체제로 굳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그 누구도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이 소설은 사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양반과 상민의 이분법적 차별이라든지, 새로운 신분 제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점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독자는 풀이한다.
물론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회에서 통성명할 때 상대의 본관을 묻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또 누군가 우리 집안의 어른의 이름을 물을 때도 'OO 아무개씨'로 '본관'을 앞에 붙여 말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는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양반 집안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일에 불과한 말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옛날 인사법이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한때는 이력서에도 본관을 쓰는 난이 있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양반의식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한때 일곱 가지 성씨는 천민의 성씨라고 했던 적도 있다. 이른바 '천,방,지,추,마,골·피'씨를 말한다. 이들 성씨는 조선시대 성이 없던 천민들에게 나라에서 준 성인지, 사실 독자는 모르지만 어쨌든 김, 이, 박처럼 양반들은 가지지 않았던 성씨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동학혁명을 기점으로 노비 제도는 사라졌고 이젠 100년이 넘었다. 더욱이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고치면서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수모도 당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 성씨를 지킨 사람은 누구인가. 일부 양반 신분이었던 사람들은 앞장 서서 개명했지만 끝까지 개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국민이고 양반들이 '상놈'이라고 불렀던 이들이다. 누가 나라의 주인인가가 확연히 드러나는 일이다. 그대로 양반 운운하는 이들이 남았다는 것은 양반의 시대에 호의호식하고 '잘 나갔던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일까? 이 소설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행위에 웃기는 일들이 많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실소이다. 이 소설이 블랙코미디로 분류될 수 있는 이유이다. 소설가 고호는 사회 풍자 소설을 잘 쓴다고 평가되고 있다. 작가의 전작을 살펴보면 그 말에 설득력이 있다. 저자 고호는 전작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 『악플러 수용소』, 『과거여행사 히라이스』에서 보여주듯이 기발한 소재와 잘 구성된 스토리로 '천상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이미 잘 보여주었다. 그 연장선 상에 이 소설 『노비 종친회』를 읽으면서 웃고 우는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이 소설은 저자의 전작들보다 한껏 더 유쾌 발랄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저자가 야심 차게 들려주는 현대판 ‘뿌리 찾기’ 프로젝트라고 해야 할까? 겉으로는 뿌리 찾기 모양새를 갖춘다. 주인공 헌봉달이 벌이는 헤프닝을 소설로 구성했다. '현(玄)'씨는 많이 들었지만(예, 소설가 현진건) '헌'씨는 못 들어본 것 같다. 이 희귀한 성씨를 가진 이가 주인공이다. 그날 그날 살아가는 백수의 신세인 그는 어느 날 종친회를 설립한다. 대박을 꿈꾸던 사업이 실패하면서 인생의 막다른 길에 내몰린 주인공 헌봉달은 노모가 전답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준 덕에 가까스로 목숨은 부지했건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재기를 꿈꾸던 그가 마지막 카드로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종친회다.
자신의 성이 희귀 성씨인만큼 찾는 이가 뜸할 줄 알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곳곳에서 헌씨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웬걸? 이혼 위기의 전업주부, 탈북자, 어딘지 음흉해 보이는 노 교수, 전직 깡패,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청년, 엄마 성씨를 따른 문제아까지. 그야말로 좌충우돌 오합지졸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나름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 하나만은 강력하다. 종친회에서 감투 하나씩 맡은 이 많은 뱃사공들 틈에서 회장 헌봉달은 은밀한 계략을 진행시킨다. 과연 노비 종친회의 미래는? 녹록지 않은 각자의 현실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오던 헌 씨들이 모여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겪는 에피소드들이 독자들을 유쾌하게 한다. 물론 그들의 여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자신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던 중 헌 씨가 과거에 노비였다는 문서가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발칙한 상상은 서서히 이 소설이 단순히 코미디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을 준다.
반전에 반전. ‘노비 종친회’는 예측하지 못한 일들에 휩싸이고. 그들이 노비 가문일지언정 뿌리를 찾아가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진한 우정과 혈육의 정도 드러난다. 헌 씨들의 우스꽝스러운 휴먼 스토리에 독자들이 한참 웃다 책장을 덮을 때쯤 되면, 가히 가볍지만은 않은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하게 될 것이다. 어쩐지 사랑스러운 헌 씨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헌 씨가 실제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지만 진짜 종친회를 만들어 헌 씨들 등록 공고를 내면 찾아올지 누가 아는가? 과연 ‘노비 종친회’는 숨겨진 헌씨 가문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탄탄한 스토리 전개의 힘이 놀랍다. 저자의 내공과 스토리 전개 능력을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저자 : 고호
일꾼, 이야기꾼, 때로는 상상꾼. 그러나 정작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고, 재미없는 무역회사에서 평범한 밥벌이를 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자음과 모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다. 그런 고민이 만들어낸 세계로는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와 『악플러 수용소』 등이 있으며, 사회적 이슈를 문학적으로 녹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도 꾸준히 또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단법인 이효석문학선양회와 의정부전국문학상에서 수상한 바 있다. 『과거여행사 히라이스』를 썼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